증명은 케이팝의 오랜 화두다. 아이돌은 실력이 없다는 편견, 팬덤의 열광이 인기의 전부라는 편견, 장르 음악을 시도하거나 프로듀싱하는 경우 겉핥기일 뿐일 거라는 편견. 시대와 유행에 따라 내용만 바뀔 뿐, 아이돌을 향한 뿌리 깊은 의심은 단 하루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그렇게 편견 넘어 편견을 만나야 하는 사정이 그나마 나아진 건 케이팝이 세계적으로 환영받기 시작한 2010년대 후반 즈음부터다. 적어도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다’는 걸 증명할 필요에서 벗어난 이들은 모든 방면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도 점차 해방되어 갔다. 해외에서의 인정은 한국 사회에서 무엇보다 강한 프리패스 권이기에 더욱 그랬다.
이토록 견고한 해외 만능주의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건 180도 뒤집힌 시선이었다. 어디까지나 외부의 시선으로 파장을 일으키던 해외가 케이팝의 중심에 본격적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소비자의 입장에 선 해외는 비교적 이해가 쉬웠다. 평생 반도에만 머물 것 같던 ‘우리의 것’이 너울너울 인터넷 파도를 타고 바다 건너 이름도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커다란 사랑을 받는 기분 좋은 상상은 이미 현실이 된 지 오래였다. ‘꿈★은 이루어진다’가 전한 반짝이는 자기 효능감은 그러나 케이팝 내부로 들어오며 온도를 바꿨다. 제작자가, 창작자가, 플레이어가 된 해외는 케이팝은커녕 아이돌이라는 단어도 희미하던 팍팍한 인정 욕구의 시대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케이팝이 좋아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에서 인생을 걸게 된 이들은 거듭 증명해야 했다. 당신이 케이팝에 얼마나 진심인지, 한국을 정말 좋아하는지, 그런 케이팝과 한국을 끝내 배신하지 않을 건지. 실력은 다음 문제이자 당연히 충족해야 하는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이 혼돈의 한가운데 리사가 있다. 블랙핑크의 막내이자 매인 댄서로 2016년 데뷔한 그는 앞서 이야기한 케이팝의 변형된 구조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더없이 적합한 인물이다. 리사는 태국 출신으로 팀 내 유일한 외국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빅뱅과 2NE1을 좋아한 탓에 태국에서 열린 YG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 지원하게 된, 이제는 익숙해진 케이팝 키드 츨신이기도 하다. 타고난 피지컬과 재능으로 운명처럼 한국 땅을 밟게 그는 해당 태국 오디션에서 유일하게 합격한 참가자였다. 두고두고 회자할 전설 같은 에피소드를 뒤로 하고, 리사는 5년이 넘는 연습생 생활을 거쳐 그룹 블랙핑크로 데뷔했다.
이후는 잘 알려진 그대로다. 블랙핑크는 BTS와 함께 케이팝의 영토를 세계로 확장한 한국 대중음악계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블랙핑크 이름으로 세운 수많은 기록 가운데 2025년 2월 말 현재 구독자 9,590만 명을 보유하고 있는 블랙핑크의 유튜브 채널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2021년 저스틴 비버를 누르고 음악 채널 구독자 수 1위 자리에 오른 블랙핑크의 채널은 이후 3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굳건히 왕좌를 유지하고 있다. 유튜브와 함께 성장한 케이팝이 획득한 가장 큰 훈장이자, 케이팝의 인기가 상상 그 이상이라는 걸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고마운 증거였다. 한마디로, 블랙핑크는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어진 이름이었다. 적어도 케이팝 범위 안에서는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스테이지로 멤버 개인의 활약이 부각된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멤버들은 블랙핑크라는 우산 아래 쿼터로 가려져 있던 각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하나일 때 무엇도 두렵지 않았던 이들이 흩어져 내는 빛은 사람들의 기대보다 더욱 밝고 뚜렷했다. 리사 역시 확신이라 불러도 좋을 움직임으로 화답했다. YG와의 계약 종료와 더불어 자신과 비전을 나눌 회사 라우드(LLOUD) 설립을 알렸고, 2021년 발표한 싱글 ‘LALISA’와 ‘MONEY’와 핵심을 공유하는 ‘ROCKSTAR’로 솔로 활동의 화려한 포문을 열었다. ‘ROCKSTAR’에는 스물일곱 ‘라리사 마노반’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랩, 힙합, 케이팝, 한국, 태국, 아시아, 여성, 영광 그리고 마침내 얻은 온전한 자유.
누구의 입김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리사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지금 가장 주목받는 라틴 팝 아이콘 로살리아(ROSALÍA)와 호흡을 맞춘 ‘NEW WOMAN’에 이어 국내에도 익숙한 식스펜스 넌 더 리처의 ‘Kiss Me’를 샘플링한 ’Moonlit Floor (Kiss Me)’을 선보이며 랩 못지않은 출중한 보컬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2025년 지금을 대표하는 팝 아이콘 도자 캣(Doja Cat)과 레이(RAYE)를 초대한 ‘BORN AGAIN’는 또 어떤가. 디스코의 황금기를 연상케 하는 기타와 베이스 연주가 작렬하는 가운데 노래에 참여한 세 사람이 굳게 팔짱을 끼고 거침없이 걷는 걸음마다 불꽃이 타오르고 꽃잎이 피어났다. 이 장면을 보며 가슴 어딘가 뭉클해지지 않은 여자아이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리사는 그렇게 지금,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갖은 편견 속을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다. 케이팝으로 한국을 만난 뒤 세계와 연결된 태국 출신의 이 여성이 걷고 있는 길은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이다. 지금껏 없었기에 문득 길을 헤맬 수도 있을 것이다. 솔로 독립 이후 발표한 곡들이 다소 통일성이 부족해 보이는 건 어쩌면 그러한 현실을 바탕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것이 모두의 초행이기에, 그리고 그 모두가 리사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월 28일 발매될 리사의 첫 번째 정규 앨범 [Alter Ego]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마음 든든하다. 지난 수년간 케이팝의 K가 무엇이고 케이팝에서 K를 떼면 무엇이 남을지 증명해 보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다. 2025년 기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고개를 들어 리사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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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 (LISA) - Alter Ego
출판사 | Sony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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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