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원 “저는 웃기고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어요”
『신곡』을 좋아하고, 이번 시집도 『신곡』의 구조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아요. 겉으로 보기에 이질적이고 단절된 세계들(지옥-연옥-천국)을 가로지르는 여정으로 되어 있는 점이요.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2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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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로 2021년 제4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최재원 시인이 두번째 시집 『백합의 지옥』으로 돌아왔다. 『백합의 지옥』의 무대는 사후세계에 지어진다. 최재원의 사후세계에는 가치의 위계를 정할 신이 없으므로 신의 집인 천국도, 신을 기다릴 장소인 연옥도 없다. 오직 무가치하고 성스럽지 못한 이들을위한 지옥만이 남아 있다. 대부분의 순간이 시적이지도, 가치 있지도, 성스럽지도 못하다면, 삶은 잔여물, 이물들의 집합일 것이다. 최재원은 가치와 의미가 그토록 희소하다면 ‘삶’은 그 자체로 어떤 의미일 수 있는지 이 지옥을 통해 우리에게 되묻는다. 

 



안녕하세요, 최재원 시인님. 두 번째 시집 『백합의 지옥』 출간을 축하드려요. 2021년 첫 시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로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고 3년 정도 시간이 흘렀네요. 미국과 한국을 오가기도 하고, 번역한 책도 내면서 바쁘게 지내신 듯한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잘 지냈습니다. 요즘엔 스포츠를 많이 봤어요. 2024년 시즌부터 야구를 다시 보기 시작했는데, 월요일 빼고 매일 경기가 있으니까 볼 게 많더라고요. 스트라이크나 아웃 판정 손동작이 심판마다 조금씩 다르고, 극적인 순간에는 거기에 걸맞게 강렬하고 리드미컬해서 보는 맛이 있었어요. 그런데 올 시즌부터 기계 판정(abs)이 도입되면서, 실질적인 판정은 볼이 글러브에 들어가는 순간 끝나버리니 예전보다 동작이 좀 작고 심심해진 점이 아쉽지만 하여간 재미있습니다.

 

그동안 한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직 책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영미권의 놀이 동요 ‘두껍아 두껍아’ 또는 ‘쎄쎄쎄’라고 할 수 있는 마더 구스 영한 번역 작업이에요. ‘험티덤티’나 ‘반짝반짝 작은 별’처럼 잘 알려진 것 위주로만 된 게 아니라 ‘너서리 라임’(자장가 또는 전승 동요) 모음집을 보고 제가 직접 곡을 고르고 구성을 제안할 수 있어서 더 재미있었어요. ‘텅트위스터’ 같은 말놀이는 직역하면 정체성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에 “경찰청쇠창살쌍창살” 같은 구절들을 새로 썼어요. 말놀이 류가 아닌 것들도 실제로 노래로 부를 수 있도록 번역하는 과정이 정말 즐거웠어요. 전래 동요지만 놀랍도록 참신하고 기괴하고 현대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잔인한 것들도 많았어요. 본질적이고 순수한 즐거움 속에 깃든 삶의 비애에 대한 본능적인 이해를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아요.

 

 

이번 시집을 받아 보신 독자분들의 첫 번째 반응이 모두 ‘분량에 대한 놀라움’이더라고요. 아무래도 432쪽 분량의 시집은 흔치 않으니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고요. 막상 시는 80여 편으로 많지 않은데, 첫 시집에 비해 장시, 산문시가 많이 늘어났어요. 이런 변화에 어떤 의도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인칭 화자의 감정이나 감각, 생각의 나열보다는 어떤 진행을 따라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목련 나무 아래에서’나 ‘태양의 탄생’처럼 추리극이나 연작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띤 게 아니더라도 여러 캐릭터가 있고,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앞뒤와 연결되어 있고, 다음 사건이 생기거나 전의 사건이 회상되고, 반전이나 새롭게 발견된 사실이 있고, 템포나 분위기가 전환되는 그런 것이요. 길이나 개수 자체에 대한 의도는 없었지만 각 장의 스토리와 장들이 이루는 전체적인 스토리를 생각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길어진 것 같아요. 더 짧은 글로 축약해도 ‘주제’에 상응하는 것들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시더라도, 그러지 않았어요. 일인칭 화자가 나올 때 그 사람의 시선으로 같이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인물 바깥의 시선으로 캐릭터로서 표현하고 싶어서요. 애초에 ‘말’이라고 생각하고 써서 화자의 호흡, 동어 반복 등을 통해 집착적이고 격앙된 상태의 화자를 묘사하고 싶기도 했고요. 캐릭터의 성격이나 상태를 그의 말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싶었고, 반대로 말하면 그 성격과 상태를 통해서 그의 말이 이해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극적(hyperbolic)이고 연극적(theatrical)이고 사람을 지치게 하는 화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또 다른 화자들을 통해서 그 화자를 새롭게 볼 수 있게 되기도 하고요. 이런 게 비극적이기도 하고 희극적이기도 하다고 생각했어요.

 

 

백합의 지옥’이라는 제목과 아홉 개의 부 구성을 보고, 자연스레 단테의 『신곡』 중 ‘지옥’을 떠올리게 되었어요. 단테의 지옥은 지은 죄의 내용과 무게에 따라 아홉 개로 나뉘는데, ‘백합의 지옥’은 어떻게 나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숫자 9에 상징적 의미를 두진 않았는데 『신곡』을 좋아하고, 이번 시집도 『신곡』의 구조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아요. 겉으로 보기에 이질적이고 단절된 세계들(지옥-연옥-천국)을 가로지르는 여정으로 되어 있는 점이요. 다른 점이라면 단테가 『신곡』을 코미디라고 부른 만큼 『신곡』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상승하는 진행인데, 이 책은 “한참 가다 보니 또 같은 곳에 와 버렸네.”의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가는 곳들이 어떤 곳은 천국에 더 가깝고 어떤 곳은 지옥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실은 그게 별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된, ‘여기’ 안에 ‘저기’가 있는 지그재그 세계인 거죠. 개인적으로는 단테의 『신곡』도 단절된 세계들 간에 긴밀한 의미의 연결이 있는 것으로 읽었어요. 이 책을 쓸 때 지옥보다는 천국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클립아트처럼 생각했을 때 천국이 파란 하늘, 온갖 꽃과 풍요, 빛과 화음으로 충만한 곳이라면 그곳에는 바닥에 떨어진 낙엽이나, 이사할 때야 발견되는 소파 아래 말라비틀어진 바퀴벌레, 음치인 사람은 없나? 소음, 갈망, 죽음, 애도, 이런 단어들은 의미를 잃게 될까? 그런 단어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될까? 천국이 오로지 아름다운 노래와 빛나는 기쁨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인간으로서의 경험 중 많은 부분을 잃게 되는 것일까? 같은 상상을 많이 했습니다.

 

첫 시집에서도, 두 번째 시집에서도 ‘한 권의 책’이라는 분량 안에서 전체 시의 구성을 치밀하게 고민하고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이번 시집의 경우는 부마다 색이 명확히 구분된 데다, 각 부마다 흐름도 소설처럼 기승전결이 읽혀서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각 부마다 어떻게 구상하고 쓰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오래전에 저에게 소중한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걸 저에게 알리지 않아서 몇 달 후에 알게 되었어요. 장례식도 못 가고, 전혀 믿을 수 없어서 슬프지도 않았어요. 아직까지도요. 그러다가 오륙 년 전에 또 하나의 죽음의 소식을 들었어요. 역시 믿을 수 없었어요. 그 해인지 그다음 해인지 그다음해인지조차 모르겠지만 하여간 봄밤에 목련이 가득 핀 거리를 걷는데 목련의 향기가 저를 압도할 정도로 강렬했고 형언할 수 없었어요. 분명히 아름다운 것 같은데 지독하고 분명히 향기로운 향기인데 발악하는 목소리 같고. 그때 그 죽음을 실감했어요. 목련의 목소리가 그들의 목소리 같기도 했지만 또 만개한 목련의 향기가 부인할 수 없이 명백하고 파렴치한 생의 증거처럼 여겨졌어요. 향기로울수록 더더욱 뻔뻔스러웠어요. 죽음, 상실, 다시 태어남,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삶의 노래들에 대해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노래라는 게…… 죽음을 자각하고 애도할 수 있는 것은 그 시점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몫이고, 살아 있는 것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유희, 상상, 기쁨, 즐거움, 실없음, 모순, 반복, 노동, 착란, 중독 같은 것이 아닐까. 대조되는 세계를 계속 보여 주고 싶었어요. 천국 대 지옥이 아니라 천국 속의 지옥, 지옥 속의 천국 같은, 끝난 것 같은데 끝이 아닌…… 웃기지만 슬프고 비극적이지만 코미딕한. 희극인데 비극이고 비극인데 희극인 것을 생각하면 김수영의 시 「생활」이 떠올라요.

이 시집의 부 ‘목련 나무 아래에서’―‘geodesics’―‘별늪’―‘소년의 가죽’―‘세상의 죄를 사하러 온 백숙’―‘목련은 죽음의 꽃’―‘푸가’―‘태양의 탄생’―‘시는 언제나 뜬 눈일 것’에는 어떤 흐름과 진행이 있고, 이 흐름을 앞뒤를 통해 반전시키거나, 이어 가거나 깨거나 더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어요. 그래서 전체적으로 연작이든 연작이 아니든 ‘시 모음집’보다는 ‘여정’이라고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목련은 죽음의 꽃’을 빼고 말할 수 없죠. 형태적으로만 보면 다섯 편의 시가 동시에 흘러가는 듯 보이는 시인데요. 형태가 낯설긴 하지만 한번 몰입해 읽고 보면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읽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다섯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이 시를 읽는 듯 들리더라고요. 160쪽이라는 분량을 떠나, 이 시가 만들어 내는 압도적인 분위기, 여러 소리가 울려 퍼지며 만들어 내는 공간감만으로도 ‘그 자체로 죽음 같은 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인님께 이 시는 어떤 의미인지, 이 시 이전과 이후는 시집 안에서 어떤 변화를 의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음악, 영화, 연극, 그림 등은 모두 여러 겹의 이미지, 텍스트, 사운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글이라는 매개는 선형적으로 한 번에 한 글자씩 읽잖아요. 양가적 감정이라던가 복잡한 생각도 그 한 줄을 따라가면서 피어오르고요. 그게 매력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번에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글이 실제로 공연되든 공연되지 않든 처음부터 소리로 떠올리고 썼어요. 한 번에 하나의 목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라 화음, 반주, 코러스, 듀엣처럼 겹치는 질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요. 처음 읽는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경험할지 제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크게 두 개의 스토리가 진행되는데 한 번에 두 줄을 읽기는 어려울 테니 왔다 갔다 하거나 각각을 하나씩 다 읽는 방법이 있겠죠. 왼손 오른손이 동시에 나오는 피아노 악보를 ‘읽는’ 것과 비슷한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겹치는 소리로 머릿속에서 들릴 수도 있겠고요. 궁극적으로는 여러 줄이 한 번에 프로세스가 되어서 오케스트라처럼 들리기를 원했어요.

 

뇌의 텍스트 인식의 확장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중첩된 질감을 통해서만 전달이 가능한 의미 또는 감정의 전달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목련은 죽음의 꽃’은 중간에 잠깐 아홉 개의 라인으로 나뉘지만 크게 다섯 개의 라인으로 진행되는데 저는 이게 다섯 명 각각의 목소리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장례식에 간 자라나 죽음을 기리는 다른 화자가 같은 사람의 성부가 다른 키로 나뉜 것일 수도 있고, 메아리나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소리일 수도 있고요. “거짓말”이 반복되는 부분은 모놀로그나 혼잣말일 수도, 수십 명의 거대한 코러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제목은 목련이 ‘죽음의 꽃’이라고 암시하지만 앞서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저는 목련이 한편 ‘지나치도록 살아있음의 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합의 지옥”과 비슷한 느낌의 역설인 것 같습니다. 시집 전체에서 볼 때 직전과 직후만 보면, 이 시 전에 암시와 조의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무덤」―「날파리의 노래」―「사는 게 넘 행복해 아」를 넣었습니다. 「목련은 죽음의 꽃」으로 시집을 마치는 것이 깔끔했겠지만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가혹함, 혹은 잔인함(relentlessness)을 위해서 이 뒤에 ‘푸가’를 배치했습니다.

 

『백합의 지옥』에는 ‘백합’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재미있기도 해요. 시집을 다 읽고 나면 ‘목련’의 존재감이 상당해서 ‘왜 목련이 아니라 백합이지?’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기도 하고요. 어떤 의도로 지은 제목인가요?

출간되기 전 이 시집은 여러 버전이 있었어요. 버전마다 구성이나 길이가 다 달랐고, 그에 따라 각각의 시가 꽤 다르게 읽힐 수 있어서 묶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처음에는 그냥 1, 2, 3 이렇게 숫자로만 부 제목을 짓다가 수록 시 제목 중 하나를 랜덤하게 골라 부르다가 했어요. 언젠가부터 모종의 이유로, 또는 별 이유 없이 “백합의 지옥”이라고 불렀고 그냥 임시로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저는 ‘나 오늘 생일이야’와 ‘백합의 지옥’ 두 가지 제목으로 내고 싶었어요. 이름 자체가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또 이름이 순간적으로 드리우는 그림자는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는 데가 있으니까 완전히 똑같은 내용이라도 제목이 ‘나 오늘 생일이야’인 시집을 읽는 사람의 인식은 제목이 ‘백합의 지옥’인 시집을 읽는 사람의 인식과 다르겠죠. 그 간극이 매우 흥미로웠어요. 한편 그래서 ‘백합’이나 ‘지옥’이 실제로 시집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 저에게 중요했던 것 같아요.

 

목련도 그렇지만 특히 백합은 순백, 순수, 신성 같은 문학적 상징성이 있는 꽃이잖아요. 둘 다 좀 거대하고 자세히 보면 좀 그로테스크하기도 하고…… 백합은 주로 천국과 연관 지어서 떠올리고 천국에 어울리는 꽃처럼 여겨지니까, 그 속에도 지옥이 있는 게 이 시집의 희비극적인 것들과 잘 어울리지 않나 생각했어요.

 

 ‘시 아닌 것’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행보를 보여 주는 듯합니다. 시의 형태적인 면이나 내용적인 면에서도요. 그래서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시인인데요, 앞으로 어떤 ‘시’를 혹은 어떤 ‘시 아닌 것’을 쓰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냥 흥미로운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 같아요. 부조리극이나 초현실주의적인 작품들을 마치 모더니즘의 전유물처럼 여기지만 저는 우리가 흔히 ‘고전적’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을 읽을 때 그런 특성이 더 도드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시집보다 소설을 읽을 때 시적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고요. 소설이라고 말했지만 다른 형태의 글이나 글이 아닌 것을 다 포함해서요.

 

무엇이 시이고 시가 아닌지 잘 모르지만 시적인 것 말고 시, 가사, 희곡 같은 장르에 대해 생각해 보면 소리와 의미가 별개가 아니고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본질적인 유희와 재미를 만드는 것 같아요. 라임, 조, 박자, 빠르기, 호흡, 화음 같은 음악적 요소는 특히 코미디(또는 비극)에 있어서 결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미디(또는 비극)에서는 내용만큼이나 타이밍과 톤, 화자의 전달이 중요하잖아요. 똑같은 대본이라도 그런 부분에서의 미세한 차이로 웃기기도(슬프기도) 하고 웃기지 않기도(우습기도) 하고요.

 

저는 웃기고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어요. 그리고 제게 재미란 원초적인 슬랩스틱, 본질적인 기쁨을 주는 상상과 유희,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가지고 노는 것, 구분과 정의가 불명확한 세계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런 희열이 있는 세계를 계속 그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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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