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세상 지친 영혼이여, 지지 말아 포기 말아
오늘 드디어 이츠학에게도 여자로서 무대에 설 기회가 왔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길. 당신도 당신만의 무대를 갖기를!
<font color="#8c7301">* 이 글은 이츠학을 연기한 배우 이영미와의 대화를 기초로 한 가상 인터뷰입니다.</font>
<font color="#000000">당신, 오늘 공연하는 동안 계속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font><font color="#5c585a">난 크로아티아에서 드래그 퀸으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당시 우리나라에선 인종 청소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유태인인 데다가 성적 소수자였던 난 제일 첫 번째 희생 대상이었죠. 살기 위해선 어떻게든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는데, 그때 헤드윅을 만났고 그녀를 따라 미국에 왔어요. 그때 우리가 약속한 게 있는데, 헤드윅이 내게 원한 것은 여장하지 말고 남자인 채로 살라는 거였어요. 그땐 살고 싶어서 그러마 약속했지만, 사람마다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나도 헤드윅처럼 여장하고 싶은데, 그걸 못하도록 억누르니 지금 그 불만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예요. 정말 더 이상은 헤드윅 성격 못 받아주겠고, 더는 못 참겠다는 마음이 차오르니 그런 얼굴로 공연하게 됐네요.</font>
<font color="#000000">헤드윅이 관객들 앞에서 모욕을 주거나 핀잔주는 거 무척 속상하죠?
</font><font color="#5c585a">헤드윅이 워낙 그런 사람이라서, 사실 별로 대수롭지는 않아요. 하지만 공연장에서 공개적으로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화가 나죠. 헤드윅은 성격이 좀 극단적으로 오락가락해요. 기분이 좋을 땐 굉장히 친절하고 애교도 잘 떨어요. 그런데 성미에 맞지 않으면 굉장히 까칠해져요. 그럴 땐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죠. 상대를 막 대하다가도 돌아서서 호호호 하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아서, 가끔은 감싸주고 싶을 때도 있고 그렇게 못 참을 만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최근에 토미 사건 때문에 많이 격해졌고, 그래서 내게 함부로 대하는 정도도 심해졌죠.</font>
<font color="#000000">그런데도 그동안 헤드윅을 떠나지 않고 함께했던 건 무엇 때문인가요?
</font>사실 제가 이 관계를 끊고 떠나려면 떠날 수도 있었어요. 헤드윅이 제게 족쇄를 채운 것도 아니고, 될 대로 되라고 떠나버릴 수도 있었지만, 쉽게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 우리 사이에 가족 같은 정이 쌓이기도 했고, ‘저 사람도 참 안됐다’는 일종의 동질감이 들었달까요. 겉으로는 무척 까칠하지만 사실 속내는 그리 모질지 못한 사람이란 걸 알아요. 제가 옆에서 지켜줘야 할 것 같고요. 내가 떠나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 걱정되기도 하고, 되게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어요.
<font color="#000000">헤드윅과 공연할 때 당신은 주로 뭘 하죠?
</font>코러스 넣고 헤드윅의 의상 챙겨주고 가발도 정리하고, 뭐 전체적인 뒤치다꺼리를 하죠.
<font color="#000000">공연 내용에 대한 논의도 함께하나요?
</font>아뇨. 헤드윅은 독선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계획을 세워요. 밴드 멤버들과 저는 그냥 따를 뿐이죠. 평소에도 헤드윅 혼자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떠드는 편이고, 우린 그냥 듣고 있죠. 주식이 위스키이신 분이라, 낮부터 취해선 시키지도 않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늘어놓곤 해요.
<font color="#000000">헤드윅을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요?
</font>그럼요. 헤드윅이 크로아티아 투어 공연을 왔을 때 제가 그 밴드의 오프닝 무대에 섰거든요. 공연 전부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트랜스젠더인 데다가 자기 나름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독특한 캐릭터의 뮤지션으로 유명했죠. 그녀를 만나면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물어볼 수 있겠구나, 만날 날만을 기다렸죠.
<font color="#000000">그때 당신에겐 발칸 최후의 유태 여신이란 별명이 붙어 있었죠. 어떤 무대에 섰나요?
</font>그저 여성 복장을 하고 여성 디바들이나 뮤지컬 캐릭터들을 흉내 내며 그들의 음악에 맞춰 입술을 움직이는 립싱크 퍼포먼스를 했어요. 노래를 직접 하진 않았죠. 그땐 내가 노래를 잘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헤드윅을 만나고 나서 그녀가 내게 코러스를 시키면서부터, 나도 노래를, 음악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티나 터너나 휘트니 휴스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가장 좋아했어요. 저는 예쁜 여자보다는 멋있는 가수가 좋더라고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못생긴 얼굴인데도 그녀가 감성적인 노래를 할 때면 정말 아름다워 보여요.
<font color="#000000">그렇게 무대에 서면 기분이 어땠어요?
</font>그때만은 굉장히 자유로웠어요. 일상이 늘 회색빛이었다면 그땐 제가 붉은색으로 빛났죠. 관객들이 나를 여자라고 믿었는지, 여장을 한 남자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를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선을 받으면 정말 짜릿했어요.
<font color="#000000">외적인 아름다움도 빛났지만 쇼도 정말 잘했나봐요?
</font>후훗, 글쎄요. 배우의 끼가 발휘돼서 잘한다는 이야기를 곧잘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는 퍼포먼스를 멋지게 잘해내려는 생각보다는 내가 느끼는 행복이 더 컸어요. 그 순간에만 내가 여자일 수 있었으니까.
<font color="#000000">크리스탈이란 이름으로 활동할 당시, 크리스탈의 트레이드마크는 뭐였나요?
</font>금발 가발에 미니 레드 드레스. 금발보다 좀 더 노란 가발을 쓰고, 블랙과 레드가 섞인 가죽 소재의 드레스를 자주 입었어요.
<font color="#000000">헤드윅을 처음 만났을 때 꿈이 모델이라고 했다죠?
</font>음, 그땐 뚜렷한 꿈이 없었을 땐데 꿈이 뭐냐는 질문에, 때마침 TV에 나오고 있는 모델이 무척 예뻤고 또 남자들이 좋아
하니까, 나도 모델이 되고 싶다고 답했어요. 큰 의미를 두고 말한 건 아니에요.
<font color="#000000">그럼 지금 당신이 꿈꾸는 건 뭔가요?
</font>헤드윅 옆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무대의 주인공으로서 내 이름 크리스탈을 찾는 것. 여자로서, 또 나 자신으로서 오로지 나 혼자 무대에 서는 거요. (헤드윅처럼요?) 헤드윅보다 더 멋지게요. 잘은 모르겠지만 저는 블루스나 소울 음악이 좋아요. 그런 뮤지션을 만나고 싶고, 또 뮤지컬 무대에서 연기하고 싶어요.
<font color="#000000">뮤지컬 오디션에 도전해본 적은 없어요?
</font>한번 시도해보려 했는데, 헤드윅에게 들켜서 못 갔죠. 내가 배우가 돼서 떠난다고 해서 그녀 인생에 어떤 변화가 있진 않겠지만, 헤드윅이 마음대로 권력을 부릴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나잖아요. 그래서 내게 그렇게 못되게 굴면서,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font color="#000000">그런데 오늘 공연의 마지막에 헤드윅이 당신에게 가발을 건넸어요.
</font>미국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건 내가 여자일 수 없다는 점이었어요. 내가 입고 있는 남자 옷과 수염, 남들 앞에서 남자로밖에 설 수 없다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헤드윅의 옷과 가발, 화장, 내가 한다면 더 예쁠 텐데…. 그런데 마침내 저의 무대가 시작됐어요. 드디어 첫걸음을 내딛은 거죠.
<font color="#000000">당신이 원했던 꿈을 꼭 이루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부침이 있겠지만 좀 더 쉽게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font>글쎄요, 부딪쳐봐야죠.
<font color="#000000">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9호 2012년 10월 게재기사입니다.</font>
<font color="#000000">*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font><font color="#000000">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font>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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