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는 일,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여행 작가들은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왔을까요? '여행'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주제로 듣는 이야기.
1년 전 여름, 나는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 만토바에 머무르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한 보름 간의 여름 휴가였다. 여행 전, 우리는 어느 도시로 갈지를 고민하면서 한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유명한 관광지나 인파로 붐비는 도시는 피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는 우리의 리스트에서 배제되었고, 우리는 이탈리아 북부의 역사적인 도시들 만토바, 모데나, 비첸차로 향했다. 각 도시마다 나를 매혹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첫번째 방문지인 만토바는 특히 그 계기가 무척 사적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본 어느 작은 방의 사진. 침대 위에 새하얀 캐노피가 드리워진 푸른 벽의 공간이 그 시작이었다. 작고 소박하지만 고유한 아름다움이 서려있는 그곳이 만토바에 있는 작은 농가 호텔 코르테 만토바넬라(Corte Mantovanella)라는 걸 알아냈다. 몇 개월 후, 성급한 끌림이 가장 순수한 동기를 만들어내듯 나는 만토바를 찾았다. 낮 기온이 40도까지 치솟은 7월의 어느 날이었다.
코르테 만토바넬라는 만토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산탄토니오(Sant'Antonio)에 위치하고 있다. 기차에서 내려 간이역을 걸어나오자 우릴 픽업하기 위해 나온 조반니가 반갑게 인사한다. “한국에서 온 손님은 처음이에요. 환영해요.” 그의 낡은 차에 올라탄 우리는 5분만에 넓다란 정원이 딸린 호텔에 도착했다. 사실 호텔이라기 보다 방이 4개 뿐인 농가형 B&B에 가까웠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테라스에 앉아 조반니가 내어준 차가운 복숭아 주스를 들이켰다. 그는 아내 줄리아와 함께 밀라노에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인생의 두 번째 챕터를 위해 이곳의 낡은 농가를 2년 동안 고쳐가며 코르테 만토바넬라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페인트 칠도 직접 하고, 1900년대 초반의 침대와 가구들을 구하기 위해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녔죠.” 내가 반한 사진 속의 목가적이고 자연스러운 미감은 패션 일을 했던 부부의 탁월한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침 호텔의 투숙객은 나와 남편 둘 뿐이었다. 덕분에 조반니는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챙겨주었다. 덜덜거리는 낡은 에어컨을 다루는 법과 옛날 방식의 창문을 열고 닫는 방법은 물론 만토바에서 꼭 가봐야 할 레스토랑 리스트를 내어주고, 내일 아침 조식을 위해 포카치아가 좋은지, 치아바타가 좋은지를 묻는다. 정겹고 사적인 그의 환대에 호텔이라기 보다는 친구의 친구 집에 놀러온 기분이다. 내친김에 내가 반한 사진 속의 캐노피 침대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지역 특유의 장식인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의 왕이나 왕비의 침실을 보면 늘 두꺼운 캐노피가 드리워져 있잖아요. 추위로부터 보호하고 권력을 드러내는 기능이 있었지만, 내겐 그 장식 자체가 늘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왔어요. 그래서 이 지난 시대의 것을 우리식으로 한번 꾸며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는 나머지 방들에도 캐노피 장식이 되어 있다는 말과 함께 편히 구경하라며 다른 객실의 열쇠까지 건네주고 떠났다.
다음날 아침, 조식을 위해 정원 테라스에 앉았는데 덜깬 잠이 후루룩 달아날 정도로 차원이 다른 식탁이 차려졌다. 줄리아가 직접 구운 포카치아에 리코타 치즈, 롬바르디아산 프로슈토를 얹은 멜론, 정원에서 따 온 토마토에 오렌지 주스가 차례로 테이블에 놓였다. 달콤한 과즙이 턱선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로, 나는 맛과 시간의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조반니와 줄리아의 손이 우리를 위해 낡은 꽃무늬 접시에 내어준 것들, 여름의 빛과 색을 머금은 소박한 맛. 하지만 그 어떤 럭셔리 호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친밀함이 길어올린 진짜 맛이었다.
오후에는 거북이처럼 생긴 잔디 깎는 기계가 돌아다니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해먹에 누워 밀린 일기를 쓰며 잠깐 졸기도 했다. 나름대로 이탈리아식 여름을 만끽하는 중이었는데 조반니는 그런 우리가 무료해 보였는지 드라이브를 가자고 한다. 그는 15세기에 지어진 만토바의 두칼레 성을 가장 멋지게 조망할 수 있는 강가로 안내했다. 그의 네살 짜리 아들 디마리아까지, 좁은 차에 옹기종기 앉은 우리는 차의 속도감과 함께 제법 들떠 있었다. 운전을 하던 조반니가 우리를 향해 이런 얘길 던졌다. “호텔을 막 오픈했을 때, 코로나가 세상을 정지시켰죠. 2년 넘게 손님이 없었어요. 여러모로 견디기 힘들었지만, 내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한번 두고 보자는 심산으로 여기까지 왔죠.” 부단히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나머지는 놓아버리겠다는 초연함, 그건 생각보다 단단한 마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문득 그에게서 어떤 연대감마저 느껴졌다. 강가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함께 16세기 만토바를 다스렸던 곤차가 가문의 궁전인 두칼레를 바라보았다. 해자를 둘러싼 물결이 수백 년 전 그대로 유유히 흘러갔다.
사진 한장이 이끈 만토바로의 여정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와 시간, 만남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많은 이가 찾지 않는 소도시의 여유 안에서 서울에서 온 우리와 이탈리아 남자 조반니가 시공을 뛰어넘는 취향의 일치를 이뤘는지도 모른다.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가 이런 얘길 했다. “난 서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정도의 규모와 밀도가 좋아요. 친밀감이라고 할 수 있죠. 내가 추구하는 건 4성급 호텔이 제공하는 표준화된 서비스와 쾌적함이 아니에요. 당신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처럼요.”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며 헤어졌고, 지금도 가끔 소식을 주고받는다. 성급한 끌림은 가장 순수한 동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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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아트, 디자인, 건축, 가구 등 매혹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칼럼니스트. 특히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에 기반한 취향과 스타일을 찾아가는 여행을 즐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 이론을 공부하고, 『하퍼스 바자』 『보그』 『노블레스』 등 예술과 패션, 디자인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여러 대중매체에 꾸준히 글을 기고해왔다. 아티스트와 관객 사이에 사적이고 내밀한 만남을 연결하는 플랫폼 ‘식스 체어스’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