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은 기괴하고 물리적이다. 토끼장처럼. 하지만 미덕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신처럼.
소설은 죽어가는 ‘블랜딘’의 속삭임으로 시작한다. 블랜딘이 그토록 원했던 순간이다. 자신의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는 것. 곱씹고 음미한다. 달콤한 죽음과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자신의 지난 삶을. 그렇게 톺아보는 블랜디의 죽음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낡은 비명으로 전환된다. 우렁차거나 명료하지조차 못한 비명이다. 혼돈과 혼란의 외침, 낙담과 분노가 뒤섞여 오래된 나무 문짝에서 나는 균열의 소리. 그 힘없는 비명이 여러 겹 쌓여 어설픈 화합을 만들어낸다. 이 책은 그렇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침묵이 덮어버린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는 거대한 진공 상태를 맞닥뜨리게 된다. 테스 건티의 강렬하고 날 선 문장이 어느 순간 우리의 폐부를 깊이 찌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고통을 무디게 만든다. 그것은 치유라는 착각을 낳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치유된 것이 아니라 곪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을 태고의 책이라 말하고 싶다. 한국어판의 제목인 『우주의 알』은 우주의 빅뱅 같은 혼돈을, 비명을 방관하는 신을 향한 의구심을, 그 근원의 존재 여부를 잘 표현한 제목으로 읽힌다.
작품의 원제인 「The Rabbit Hutch(토끼장)」처럼 소설은 토끼장 같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숨 쉴 구멍만 간신히 뚫어놓은 토끼장은, 흔히 한국의 비유로 들자면 닭장과 다를 바 없다. 출구와 창문이 없다. 서로를 질식하게 만드는 호흡의 찌꺼기는 그렇게 토끼장 안에 비명과 함께 고이고 그 선명한 지옥을 덮는 것은 따스한 신의 품이다.
토끼장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벽 너머의 소리로 서로를 추측할 뿐이다. 그것은 개인주의와 사생활 보호라는 그럴듯한 현대 사회의 명목 아래 숨겨진 방관과 외면 그리고 이 세상의 안쓰러운 민낯으로 보인다. 응당 해야 할 말과 주어야 할 관심, 최소한의 예의를 포기한 이 세계는 진실을 목전에 두고 진실을 보지 못한다. 두 눈과 귀를 막고 세상의 가십만을 떠들기 바쁘다. 소설은 그 끔찍한 말들을, 문장의 형태조차도 추악하고 괴로운 말들을 무심하게 던져놓는다. 이 세계에서는 그것을 경계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듯이. 진실을 보는 법, 진정으로 애도하는 법, 신을 섬기는 법을 아는 이가 없다는 듯이.
그녀의 작은 도시를 가로지르면서 블랜딘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감각은 부재(不在)다. (353쪽)
블랜딘이 느끼는 도시의 감각은 정확하다. 이곳은 한때 자동차 사업으로 부흥했던 도시지만 이제는 아니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미국 도시의 뒤, 안 편에 자리한 이곳은 자본주의 사회의 방치가 만든 염증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하물며 때때로 그 방치는 신의 뜻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방패 삼는다. 납치와 강간, 낙태, 착취, 불균형 같은 것들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이곳의 신은 블랜딘이 느끼는 도시의 부재와 같다. “인류의 역사는 남자 쪽에서 여자에게 저지른 반복적인 상처와 강탈(152쪽)”로 진화해왔지만, 이것이 정말 신이 원한 세상이 아님을 블랜딘은 알고 있다. 블랜딘은 끊임없이 신의 존재를 찾고 그를 숭배하지만 토끼장이라는 이 인위적인 공간을, 자본이라는 거대한 규칙을 신이 설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신을 원한다. 이 드넓은 지구에서 블랜딘에게 허락된 공간은 고작 토끼장 안 한 칸. 블랜딘은 신이 절실했고, 그런 블랜딘에게 신이 나타난다. 누구도 부여하지 않았지만 타인 옆에서 기꺼이 신이 된 자다.
이 세계의 신은 권력이 만든다. 블랜딘의 신은, 블랜딘이 참가한 학교 연극의 총괄이자 음악 선생님인 제임스이다. 제임스는 블랜딘이 원치 않았음에도 그 옆에서 신이 된다. 모든 행위를 사랑이라 말하며 블랜딘의 생각과 입을 틀어막는다. 신의 탈을 쓴 인간은 그런 식으로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고 몸을 소유하며 지금 이 사회를 뒤덮은 차별과 계급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넌 권위주의적 통제권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 절대 안 믿을 아이잖아. 그리고 넌 수명이 있는 보통 인간이 계급도 없고 돈도 없고 국가도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기엔 너무 영리한 아이야. (389쪽)
통제가 평화와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임스는 자신의 사랑과 블랜딘과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리고 블랜딘의 고발을 막기 위해 이 세계의 불합리함이 당연한 것이라 말한다. 제임스의 행위는 의심할 여지 없는 가스라이팅이지만, 블랜딘은 제임스보다 계급 층위가 낮다. 그렇기에 제임스의 말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고, 블랜디에게는 마치 신의 속삭임처럼 들린다.
이 토끼장에서는, 더 크게 이 도시에서는, 어쩌면 이 세계에서는 신이 한 칸 차이로 만들어진다. 누구나 자신보다 낮은 이들에게 신이 된다. 그것은 무책임하게 부재해버린 신의 탓이다.
최후. 이야기는 다시 죽어가는 블랜딘에게 돌아온다. 원하던 순간이다. 신비주의자인 블랜딘이 신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비극 앞에서 블랜딘은 이제 신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보지 못했던 신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난 신의 배를 때리기 위한 블랜딘의 작전처럼 읽힌다.
직접목적어는 여자에 관한 완전한 폭압의 설립이죠. 이걸 증명하기 위해서 자연스러운 상태의 세계에 사실을 제시해봅시다. 남자는 여자가 선거권에 대한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행사하는 걸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여자는 어떤 의견도 내지 못한 채 만들어진 법에 여자들이 복종하도록 강요했죠. (152쪽)
신에 대항하는 이 고단한 과정을 거쳐 블랜딘이 얻은 것은 막을 거둔 세상이다. 날것의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잔인하겠지만 선명하리라. 그 선명함은 테스 건티의 단호한 소리와 함께 독자에게도 닿을 것이다. 테스 건티의 소리는 위에서 아래로가 아닌, 옆에서 흘러온다.
블랜딘에게 던진 조앤의 마지막 질문을 곱씹어본다.
깨어 있었네요.
그리고 블랜딘의 대답을 따라 읽어본다.
네. 당신은요?
*필자 | 천선란 1993년 인천에서 태어나 안양예고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 작가적 상상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늘 고민했지만, 언제나 지구의 마지막을 생각했고 우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꿈꿨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일들을 소설로 옮겨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시간 늘 상상하고, 늘 무언가를 쓰고 있다. |
천선란(소설가)
1993년 인천에서 태어나 안양예고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 작가적 상상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늘 고민했지만, 언제나 지구의 마지막을 생각했고 우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꿈꿨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일들을 소설로 옮겨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시간 늘 상상하고, 늘 무언가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