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팥에 대한 취향이 무궁무진하게 까다로워져만 간다. 살면 살수록 좁아지고 또렷해지는 취향의 길이 있다면 나에게는 팥이 그렇지 않을까. 나는 많고 많은 갈래 중에서도 팥길의 여정을 나누고 싶다. 이 책은 내 인생에서 팥이 등장하는 흐름으로 훑어본 포슬포슬한 추억 모음집이자, 입에서부터 마음까지의 취향이 담긴 이야깃주머니이자, 좋아하는 것 중에서도 가장 좋은 부분만 쏙 골라 입에 가져가는 이가 전하는 행복 안내서이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컴퓨터 작업용 클라우드에 작은 폴더를 만들어 ‘팥진아’라고 적어두었지만 성을 ‘팥’으로 바꿀 만큼 팥의 모든 면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닌 이야기다.
임진아 작가의 『팥 : 나 심은 데 나 자란다』에서 읽었습니다. <황정은의 야심한책> 시작합니다.
<인터뷰 – 임진아 작가 편>
오늘은 에세이 『팥 : 나 심은 데 나 자란다』를 쓴 임진아 작가님을 모셨습니다.
황정은: 이번 책이 팥을 향한 마음을 기록한 에세이입니다. 작가님 그림을 표지로 사용을 했어요. (그림 속의) 이 작은 사물들이 다 책에 나오는 그 음식과 사물들인 거죠. 이 그림 그릴 때 어떤 고민하셨는지 궁금해요.
임진아: ‘띵 시리즈’ 같은 경우는 글 작가 분이 일러스트레이터 분이랑 협업하는 식의 시리즈인데요. 제가 그간 냈던 책들이 글뿐만 아니라 그림도 같이 선보이는 작업물이어서, 이렇게 글로만 선보이는 게 처음이었더라고요. 그래서 좀 뜻깊기도 했었는데요. 그래서 제가 각 잡고 제 책의 표지 작업을 제대로 한 게 처음이었어요.
황정은: 그렇습니까? 원래 작가님 책에 다 작가님의 그림이 실려 있잖아요?
임진아: 맞아요. 그런데 대부분 본문에 들어가는 그림들을 디자이너 분이 디자인으로 잡아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제 책이 나왔을 때 제일 좋아하는 과정 중에 하나가 표지 시안을 보내주실 때예요. ‘디자이너 분이 어떤 그림을 골라주셨을까’ 이런 고민을 같이 해나가면서 선물 받듯이 시안을 받는 날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이 책 같은 경우에는 그림을 제가 그려야 하니까 너무 고심이 많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저도 다른 작가(일러스트레이터) 분이랑 같이 이어주시나요?’ 이런 얘기도 했었는데, 제 글에는 역시 제 그림이 제일 어울린다는 생각을 저도 편집부 분들도 하게 되어서 제가 표지 그림을 그리게 되었어요. 정말 엄청 고민을 해가면서 두어 차례 시안을 잡고 그렸는데, 계속 고민이 많이 들더라고요. 원래는 스노우볼 그림이 아니었고 작은 사람 캐릭터가 눈사람을 닮은 호빵 찐빵들을 손에 들고 있으면 옆에서 호빵 찐빵을 닮은 눈사람이 그걸 쳐다보면서 ‘오잉?’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을 먼저 그렸었어요. 거의 그 그림으로 매듭을 짓고서 그림 작업을 끝냈었는데 계속 꿈에 스노우볼 그림이 나오는 거예요. ‘이런 느낌이면 어때?’ 라고 계속 꿈에서 나와서 아침에 작업실로 달려가서 하루 종일 스노우볼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데 사실 번복하는 것도 좀 창피한 일이잖아요. 이미 그림을 다 보내드렸고 (편집부에서) 디자인 시안을 잡고 계실 것 같은데. 그런데 조금 용기 내서 보내드렸었는데 편집자 님이 너무 좋아해 주시기도 했고, 또 신기했던 게 편집자 님도 시안 생각하시면서 스노우볼을 떠올리셨대요.
황정은: 그래요?
임진아: 네, 그런데 이미 제가 그림을 몇 차례 그린 다음에 이야기 하시기가 조금 어려우셨나 봐요. 아무래도 그림을 또 그리는 게 노동이기도 하니까 고민하다가 이야기 안 하셨는데, 제가 메일을 보냈을 때 스노우볼 그림이 있어서 엄청 기쁘셨다고...
황정은: 혹시 텔레파시 보내신 거 아닙니까? (웃음) 저는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임진아: 자꾸 꿈에 나왔던 이유가... (웃음) 어쩐지 꿈이 자꾸 ‘이거 어때? 이렇게 할 수도 있지 않아?’ 이런 느낌인 거예요. 그리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지금도 표지를 보면 만족스럽습니다.
황정은: 그렇게 나온 표지네요. 스노우볼 안에도 그렇지만, 이 표지 안에 작가님이 좋아하는 걸 다 모아둔 것 같아요. 여기 보면 찐빵 호빵도 있고 찻주전자도 있고 책도 있고, 그리고 팥 들어간 과자들이 있잖아요. 제가 붕어빵이랑 딸기까지는 알아봤는데, 옆에 있는 먹거리들은 각각이 뭔지는... 오른쪽에 있는 게 찹쌀떡이겠죠?
임진아: 네, 한 입 베어 문 건 찹쌀떡이고요. 딸기 밑에 있는 건 국화빵, 그리고 찹쌀떡 위에 있는 건 도라야끼입니다.
황정은: 제목도 좋지 않습니까? 『팥 : 나 심은 데 나 자란다』. 그런데 작가님이 지으신 제목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물론 이 말이 책에 등장합니다만, 이번 책을 기획하고 편집을 담당한 김지향 편집자님이 제목을 지으셨다면서요? 왜 이 문구를 제목으로 권하셨는지 혹시 들으셨나요?
임진아: 일단 (제목) 후보가 몇 개 왔을 때 저도 이것밖에 안 보이더라고요.
황정은: 그랬을 것 같아요. 후보로 어떤 제목들이 있었는지 궁금한데, 들어도 될까요?
임진아: 책에 있던 꼭지 중에 하나인데 「대단한 에피소드는 없지만 사랑해」도 제목으로 골라주시기도 했고요. 그런데 (지금의 제목에) ‘나’가 두 번이나 들어가잖아요. 에세이를 쓸 때 ‘나’를 빼는 글이 많은데 ‘나’가 두 번이나 들어가는 제목이라는 게 이상하게 개운하고 박력 있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저 혼자 생각했던 제목 중에는 ‘찐빵이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런 식의 제목을 떠올리기도 했어요. (웃음)
황정은: 작가님, 제목 잘 짓는 편이십니까? (웃음)
임진아: (웃음) 누가 봐도 제목처럼 안 느껴지는 제목이잖아요.
황정은: 좋기는 좋은데요. 제목으로는... (웃음)
임진아: 힘이 없습니다. (웃음)
황정은: 힘은 있어요.
임진아: 그런데 10명 중에 2명한테만 가 닿을 힘이어서...
황정은: 혹시 (편집부에) 이야기 하셨어요? 이런 제목 하고 싶다고?
임진아: 이야기했었어요. 그냥 ‘이런 것도 생각해봤습니다’ 했는데, 당연히 저를 포함해서 모두의 의견이 ‘나 심은 데 나 자란다’로 결정이 됐고. 지금의 제목이 좋았던 이유가, 저는 팥이 들어간 음식의 이름에 팥이 안 들어간다는 점이 참 좋더라고요. 호빵도 그렇고 찐빵도 그렇고 호두과자, 붕어빵, 양갱, 시루떡도 누구나 이름을 듣자마자 팥을 떠올리지만 이름에는 (팥이) 다 숨겨져 있단 말이에요. 이 책도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쓰기도 했고, 또 찐빵을 먹을 때 밀가루 부분이랑 팥을 같이 먹어야 맛있는 것처럼 제 글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제 이야기들을 팥의 비율과 비슷하게 썼는데요. 그런 글이랑 너무 잘 맞는 제목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황정은: 제목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까 더 제목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에세이 제목에 ‘나’가 등장하는 경우도 별로 없지만 두 번이나 들어갔는데 이렇게 매력 있기가 또 힘든 것 같아요. 저도 이 제목이 좋습니다.
황정은: 저는 사실 팥을 이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호빵은 대단히 좋아해요. 그리고 책에 앙꼬절편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시루떡 얘기도 있고. 저도 다 좋아해서 책을 읽으면서 계속 먹고 싶더라고요. 독자 리뷰에서도 팥 음식 이야기가 많이 올라올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임진아: 그간 제가 낸 책들은 대부분 (리뷰와 함께) 어느 카페나 밤 시간을 보내는 테이블 그런 사진이 많이 올라왔는데 이번 책은 그렇게 자기 동네 붕어빵을 같이 자랑하시면서... (웃음) 그리고 또 어떤 분은 제주도 여행 중이신가 보더라고요. 계속 오메기떡을 한 입 문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시고 저를 태그하시면서 ‘갖다 드리고 싶다’ 이런 글을 올리시고, 다음 날에는 귤이 들어간 찹쌀떡 사진을 올리시면서 또 저를 태그하시고, 그렇게 누군가의 여행기를 보게 되는 후기를 계속 보고 있습니다.
황정은: 지금까지 작가님은 빵, 도쿄, 책 그리고 강아지 ‘키키’처럼 작가님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글로 써오셨는데요. “혼자 걸을 줄 알면서부터 꼭 한 가지 이상은 좋아하며 지냈다”라고도 하셨어요. 그리고 스스로를 ‘매일 무언가를 좋아하기 일상 전문가’라고 소개도 하셨는데요.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계속 늘려가고 또 말하는 것이 작가님에게도 힘이 됩니까?
임진아: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게 꼭 있었더라고요. 우선 저는 참 저 자신을 좋아하면서 자란 것 같아요. 그게 생각보다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살면서 많이 느끼는데, 그래서 제가 뭔가 관심을 두거나 하는 것들에 늘 스스로가 반가워했던 것 같아요. 아마 그 어린 시절에는 일종의 생존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요즘 많이 하게 되는데요. 제가 내내 제 방이 없었어요. 그래서 대학생 때까지 오빠랑 그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한데요. 오빠랑 방을 쓸 수밖에 없는 집안 형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재미있는 것들은 너무 많았단 말이에요. 오빠랑 라디오를 듣는다거나 밤새 같이 만화책을 보고 웃는다거나, 그렇게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항상 제 방에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 보니까 오빠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각자 좋아하는 게 분명히 있고, 집안 분위기가 안 좋으면 안 좋을수록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고 그걸 어렵게 사 모으거나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인생은 이건 아니야’라고 스스로한테 보여주고 각자한테 얘기해 주는 과정이 되게 지난하게 흘러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뭔가를 좋아하면 되게 반가워요. 지금은 제 생활을 시작하고 찾아서 굉장히 평온한 나날을 이어가고 있는데, 언제나 제 후기를 제일 궁금해 하는 사람이에요. 뭔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만화책을 읽거나 하면서 ‘이게 왜 좋은지 어떻게 설명할까’를 내내 기다리면서 메모장에 적어가면서 블로그에 긴 글도 써보고, 그렇게 좋아하는 걸 말하기 시작하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마 30대 내내 썼던 책들이 그런 이야기들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황정은: 이번 책의 첫 번째 꼭지 제목이 「똥 맛 카레와 카레 맛 똥」이거든요. 음식 에세이 첫 글 제목에 똥이 들어가는 책이 어디 있느냐고, 작가님이 SNS에 직접 쓰셨다면서요? 그런데 또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쓰고 싶었고 지금의 순서로 배치를 하고 싶었다’라고도 하셨어요. 왜 그러셨어요?
임진아: 사실 이게 프롤로그 다음에 쓴 꼭지여서, 교정지 받을 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첫 번째 글이 될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원고를) 보내면서도 편집자 님이 어떻게 읽으실까 고민했었는데 교정지에 떡하니 같은 제목으로 있기에 ‘역시, 정말 웃기신 분이라니까’ 이렇게 생각을 했었고요. (웃음) 저는 뭔가 좋아하는 게 있거나 뭔가 느끼는 게 있으면 ‘왜 그런지’ 저 끝까지 한번 가보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요. 그래서 도착한 곳이, 친구가 그 이상한 밸런스 게임을 던졌던 차 안과 오빠 친구가 구멍가게에서 던졌던 이야기가 갑자기 붙어버리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왜 팥소를 좋아할까’에 더해서 ‘내가 싫어하는 음식은 왜 싫어할까’를 같이 생각하게 되면서 좋아하는 음식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었어요. 그 꼭지를 쓰면서 팥소를 되게 까다롭게 좋아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팥소를 보면 쉬는 마음이 되는 게, 단지 그게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되게 편하게 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라는 걸 얘기하고 싶더라고요.
황정은: 책에 실린 글 중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글이 있잖아요. 책의 제목이 나온 맥락의 글이기도 한데요. 내용을 보면, 고등학생 때 친구들하고 땡땡이를 치고 빙수를 드시러 가셨던 거잖아요. 그런데 바로 잡혀 들어가서 선생님에게 매를 맞는데, 선생님이 때리면서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을 한 거 아닙니까? 되게 난폭한 상황인 거잖아요. 그런데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폭력에 집중을 한 게 아니고, 글 마지막에서 ‘나 심은 데에는 결국 내가 자란다’라고 적으셨어요. 저는 이게 임진아 작가님의 에세이를 읽는 재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울적한 상황을 임진아 작가님의 스타일로 번역을 해서 ‘굳이 그 울적한 상태에 내가 몰두하지 않겠어’라는 게 느껴지거든요. 그게 굉장히 큰 장점이고 읽으면서 매력을 느끼는 부분인데, 그래서 이렇게 근사한 제목도 나오고 말입니다. 이런 질문을 드려보고 싶어요. 오래전에 심은 임진아 중에서 어떤 부분이 지금 임진아의 심지가 되었는지.
임진아: 저도 참 궁금하네요. 어렸을 때 저를 가장 가까이 봤을 엄마가 저한테 ‘넌 옛날부터 일단 앉기만 하면 계속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앉아서 같은 걸 하진 않았거든요.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또 지루해지니까 과자 뒤의 성분표 봤다가, 이렇게 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엄마가 보기에는 ‘쟤는 참 진득하게 앉아 있다’ 싶으셨는지 참 신기했다고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아마 그렇게 나랑 노는 게 재밌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많이 하고요. 저는 오빠라는 제일 친한 친구가 있었지만 혼자서도 되게 잘 놀았었던 기억이 나요. 그게 우울하거나 힘들지는 않았고, 집에 오면 늘 빈집이었었는데 그 시간 동안 그냥 한사코 즐겁게 놀고 싶었어요. 나가서 그냥 벌레랑 놀더라도. 그렇게 지냈던 것 같아요. 혼자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나랑 참 친하게 지냈다’라는 생각이 요즘도 많이 들어요. 사실 요즘도 집에 있거나 하면 참 바쁘거든요. 그런 것들이 비슷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또 아주 어렸을 때도 이를테면 벌레가 죽어 있거나 새가 죽어 있거나 그러면 꼭 묻어줬었어요. 묻어주고 팻말 세워주고 했었는데, 요즘도 지나가다가 다친 새가 있거나 벌레가 있거나 이런 걸 보면 ‘나라면’ 이런 생각이 들어서 묻어주거든요. 그런 것들이 모여가지고 제가 어떤 좋은 일이 있을 때, 이렇게 <책읽아웃>에 나온다거나 했을 때, 선물 주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내가 묻어줬던 개똥이가 이렇게 선물 주는 건가’ 이런 생각도 가끔 하게 되고. 참 그런 게, 한마음이 내 한 시절을 살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아요.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steal0321
2024.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