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연말 결산] 서평가 금정연의 내맘대로 출판 이슈
올해 출판계에는 어떤 이슈가 있었을까? 읽은 책 이야기만으로도 작업 일지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서평가 금정연이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주관적인 리스트를 보내왔다.
글ㆍ사진 금정연
202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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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출판계에는 어떤 이슈가 있었을까? 읽은 책 이야기만으로도 작업 일지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서평가 금정연이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주관적인 리스트를 보내왔다.



#쇼펜하우어의역습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피다 최상위권에 자리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는 제목을 보고 조금 놀랐다. 쇼펜하우어라고? 헤겔을 질투해서 자기가 기르는 개의 이름을 헤겔이라고 짓고, 늘 베개 밑에 장전된 총을 넣어두던 그 염세주의적인 독설가 말이야? 심지어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는 쇼펜하우어 책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물론 나도 쇼펜하우어를 좋아한다. 다만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이처럼 대중적인 공감대를 모으는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질 뿐이다. 유명인 추천이나 방송 노출을 이유로 들 수도 있겠지만 글쎄,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같은 제목 안에 이미 답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거장의마지막작품

우리는 예술가들의 말년에서 흔히 조화, 관용, 화해, 포용, 극복과 종합 같은 개념을 떠올리지만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와 반대되는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을 보고 그것을 ‘말년의 양식’이라 이름 붙였다. 2023년은 그런 개념틀로 바라볼 수 있는 굵직한 작품들이 유달리 많은 한 해였다. 사이드의 친우로서 사이드의 개념을 직접 빌려 쓴 오에 겐자부로의 마지막 작품 『만년양식집』은 물론이고 코맥 매카시의 유작 『스텔라 마리스』『패신저』, 그리고 마지막 작품은 아니지만 어느덧 노년의 나이에 접어든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폴 오스터의 『4 3 2 1』까지. 모두 긴 겨울밤에 읽기 좋은 작품들이다.


#끝나지않는에세이의붐

올해도 한국 출판계에는 어김없이 ‘에세이 열풍’이 불고 있다. 많은 사랑을 받은 에세이의 제목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이 지면을 꽉 채우고 남을 정도다. 근데 이게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일까? 열린책들의 편집이사를 지낸 김영준은 웹진 비유에 실린 ‘그것은 예술이 아니어야 한다-에세이라는 형식에 관한 단상’에서 매년 새롭게-똑같이 ‘에세이 열풍’ 운운하는 행태를 꼬집는다. “방금 검색한 20년 전의 한 신문 기사는 ‘올해가 에세이 붐을 이룬 해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30년 전에도 그런 기사는 있었다. 40년 전도 마찬가지다.” 내가 궁금한 건 이거다. 에세이는 각각의 작품에 대한 비평이나 고찰이 이루어지는 대신 늘 ‘붐’이나 ‘열풍’ 같은 말로 싸잡아 수식되며 오직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하나의 현상으로 취급되는 이유가 뭔지. 뭐, 사정이 있겠지. 더할 나위 없는 에세이의 방식으로 에세이를 다루는 브라이언 딜런의 『에세이즘』 출간이 시의적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뮤지션에대한책

내가 이용하고 있는 스트리밍 사이트의 연말정산에 따르면 올해 나는 총 41735분, 약 28일 동안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작년 6만 분에 비하면 30퍼센트가 넘게 줄었지만, 올해는 여느 해보다 더 많은 CD를 들었고 운전 중에는 다른 스트리밍 사이트를 사용해서 통계에 잡히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아마 큰 차이는 없지 않을까? 여느 해보다 음악에 대한 책들이 풍성하게 출간된 한해였지만, 그중에서도 팝스타들의 회고록이 눈에 띈다. 브렛 앤더슨의 『칠흑 같은 아침』, 조지 마이클의 후광에 가려졌던 왬!의 ‘나머지 멤버’ 앤드류 리즐리의 『왬! 라스트 크리스마스』, 90년대의 아이콘이었던 너바나의 드러머를 거쳐 푸 파이터스의 리더가 된 데이브 그롤의 『스토리 텔러』, 그리고 ‘팝의 여왕’ 『머라이어 케리』까지. 나와 같은 연배의 리스너라면 반갑지 않을 수 없는 목록. 이것과 결은 조금 다르지만 지금-여기에서 전자 음악을 하는 영 다이, 위지영, 키라라, 애리, 조율, 황휘 여섯 명의 여성 뮤지션의 이야기를 담은 『여성×전기×음악』도 음악을 사랑한다면 놓칠 수 없는 책이다.


#응답하라1990년대?

드라마 〈응답하라 1997〉과 〈응답하라 1994〉가 방영된지도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났다. 복고, 레트로, 뉴트로 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유행도 이미 잠잠해진지 오래. 거기에 1994년에 마지막 우승을 했던 어느 프로야구팀이 29년 만에 통합우승을 차지하며 이런 회고적 경향에 확실한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보인다(오랜 트윈스 팬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힙니다). 그런데 1990년대라고? 이제 와서? 하지만 그게 바로 책의 속도이고, 여전히 책이 필요한 이유다. 내 생각은 그렇다. 사람들이 우르르 지나간 자리를 되짚어 보고 의미화 하며 우리 사회의 이야기 속으로 갈무리하는 것. 척 클로스터만의 『90년대』와 윤여일의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은 단순한 추억 팔이, 가짜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서의 90년대가 아니라 지난 20세기와 단절로서의 90년대, 혹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재의 근원으로서의 90년대를 재구성한다.



#뜨거운코트를가르며너에게가고있어(아직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개봉이 올해 초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거의 ‘신드롬’이라고 할 수 있을 ‘슬램덩크 열풍’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그게 이미 한물 간 것처럼 느껴져서가 아니다. 1992년 〈소년 챔프〉에 처음 번역 연재되었던 『슬램덩크』를 시작부터 따라 읽었던 독자로서, 지난 30년 동안 『슬램덩크』가 꾸준히 정상의 자리에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착각 자체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그 후폭풍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죠? 난 지금입니다”라고 말하는 강백호에게 이입하던 꼬맹이 독자는 그 말을 듣는 영감님에게 이입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작품은 늙지 않고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사랑을 받고 있다. 정말 대단한 일 아닌가?


#평산책방문재인MD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을 해마다 갱신하고 있는’(그리고 이제 이 말이 단순한 클리셰를 넘어 일종의 관용어구가 되어가고 있는) 출판계에 등장한 한줄기 빛. 이런저런 이슈가 많았지만 출판계 내부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됐던 건 역시 평산책방과 평산책방 추천도서(의 판매량) 아니었을까? 작년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시작으로 김상욱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조국의 『디케의 눈물』 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좋은 책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는다는 푸념이 끊이질 않는 출판계의 상황에서, 좋은 책을 추천하고 알릴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서점인의 존재는 분명 소중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향력 있는 서점인이 되려면 먼저 대통령 정도는 되어야 하는 서점-출판계의 현실이 더욱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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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연

이런저런 매체에 책에 관한 글(90%)과 책에 관한 글이 아닌 글(10%)을 납품하는 소규모 자영업자이자 LG 트윈스 팬. 지은 책으로 『서서비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