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안내서를 읽다 보면 심해나 심우주 같은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나와 만날 일이 없을 세계. 그러나 분명히 내게 영향을 끼치고 있을 세계. 내가 수심이 얕은 물에 사는 물고기라면 로버트 재단은 깊은 바다에 사는 심해어였다. 두 존재는 만날 확률이 적지만 간혹 바다가 뒤섞이는 일도 벌어진다. 난기류를 통과할 거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페이지 위의 섬들이 정말 대이동 중인 누떼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중 몇은 악어의 먹이가 되겠지? 어리고 아픈 존재라면 더 쉽게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나는 가장 작아 보이는 섬 하나를 고르기 시작했는데, 다음 순간 내 시선을 붙잡았던 섬 하나가 페이지 위에서 증발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거짓말처럼, 마치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이. 눈을 끔뻑 감았다 떴다. 섬의 개수가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이 내가 봤던 그것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이게 사진 1이라는 것.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 전혀 다른 표정이 보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윤고은 작가님의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의 한 대목을 읽었습니다. 한때 촉망받는 젊은 예술가였던 주인공 ‘안이지’는 현재 배달 라이더로 일하고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죠.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파격적인 조건으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로버트 재단이 연락을 해옵니다. 천국 같은 작업 환경, 작업비 전액 지원이라는 후원 내용에 덧붙은 것은 완성한 작품 중 재단에서 선택한 작품 하나를 불태워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작품을 불태우기. 주인공 안이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에 『불타는 작품』을 쓰신 윤고은 작가님을 모시고, 기발한 상상력의 세계로 독자들을 몰고 가는 윤고은 월드의 넓고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뷰 – 윤고은 편>
오은: 스튜디오는 아무래도 무척 익숙하실 것 같습니다. 어느덧 5년 차 라디오 DJ예요. <윤고은의 북카페>의 DJ로 활동하면서 달라진 점 있을 것 같아요. 진행 기간이 1년, 2년 쌓이다 보면 경험치도 쌓이고,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도 각별해질 것 같거든요. 또 제가 알기로는 시 코너도 있다 보니까 다루는 문학 텍스트의 폭도 넓어졌을 것 같고요. 그사이 달라진 점에 대한 이야기 들려주세요.
윤고은: 이 프로그램을 하기 전에는 아무래도 소설 중심으로 많이 읽었던 것 같은데요. 진행을 하면서 시를 많이 접하게 됐어요. 시의 세계도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또 기술, 과학과 같은 분야의 책들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라디오 진행하면서 알게 됐어요. 그것들이 엄청 영감을 많이 줘요. 사적으로도 욕망이 들끓는 상태로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웃음)
오은: 윤고은 작가님 프로필을 소개하겠습니다.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1인용 식탁』, 『알로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장편소설 『무중력증후군』, 『밤의 여행자들』, 『해적판을 타고』, 『도서관 런웨이』 등이 있다. 한겨레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대거상 번역 추리 소설상 등을 수상했다.”
대산대학문학상 출신 소설가들이 꽤 있잖아요. 대산대학문학상을 받고 나서 지면 발표의 기회가 많이 주어졌나요?
윤고은: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았을 때는 이어가지 못했어요. 당시 제가 쓴 소설 중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완성된 유일한 작품을 냈는데 그게 덜컥 상을 받았거든요. 그다음 할 게 없었던 거죠.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야 했는데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나중에 장편을 내면서부터 저는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글을 써보고,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 번 하다가 멈추면 금단 증세가 있어요. 소설을 쓸 때 내가 나 같은 느낌이 들고요.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은 이후 장편을 내기까지 4년 중 마지막 1년 동안 소설을 썼고요. 그게 저의 첫 장편 소설인 『무중력 증후군』이라는 소설입니다.
오은: 『불타는 작품』이 어떤 책인지 작가님께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이 책, 어떤 책이죠?
윤고은: 제가 쓴 소설 중 가장 아끼는 소설, 가장 최고의 소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상당히 난감한 기분에 휩싸이거든요. 아마 많은 작가들이 그럴 텐데요. 그럴 때마다 보통 가장 최근에 쓴 소설을 언급하곤 했었고,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어요. 그런데요. 『불타는 작품』은 그런 순서상의 문제를 떠나서도 윤고은이라고 하는 작가가 어떤 작품을 쓰는지를 소개하고 싶고, 알려드리고 싶을 때 꼭 언급하게 될 것 같은 소설이에요. 제게는 너무나 중요한 작품입니다.
오은: 저도 읽고 나서 깜짝 놀랐어요. 다 읽고 나니까 질문들이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마지막 그 장면 읽고 나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한편 이 책의 띠지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국내 출간 전 영미권 수출, Scribe 출판사 출간 확정’이라고요. 어떻게 계약을 한 건가요?
윤고은: 『불타는 작품』을 쓰는 동안 제가 생각했던 것이 있어요. 제 소설 중 해외에 소개된 작품이 『밤의 여행자들』이었잖아요. 그 작품이 워낙에 발표 시점과 소개 시점 사이에 시차를 둔 채로 소개가 되다 보니까요. 다음 작품을 해외에 소개하게 된다면 최대한 국내 출간과 해외 출간 사이에 시차가 줄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고요. 실제로 관련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 얘기를 했었어요. 그래서 준비를 했던 거죠. 영어 샘플을 준비해서 관심을 가질 만한 출판사와 미팅도 하고요. 완전 초고이긴 하지만 한국어 전문도 미리 전달했어요. 외국 출판사에 한국어 리뷰팀이 요즘은 많이들 있더라고요. 그렇게 거기서 검토해서 결정을 하게 된 거예요.
오은: Scribe 출판사와 계약이 가능했던 것도 연재를 했기 때문이었을 것 같아요. 혼자서는 쓰다가 중간에 갈아엎기도 하고, 처음을 바꾸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잖아요. 『불타는 작품』은 <악스트>에 연재하면서 원고가 쌓였을 거고, 그러니까 처음에 초벌 번역을 해서 선보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저나 연재를 마치고 나서도 1년 정도 수정을 거쳐서 완성했다고 들었어요. 그 1년 동안 어떤 작업들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윤고은: 연재도 오래 했어요. 1년 좀 넘게 했거든요. 짧지 않은 기간이었는데 그 연재가 끝나고 1년 정도 다시 작품을 갈아엎는 작업을 했어요. 그래서 연재 때 얘기와는 또 완전히 달라졌죠. 굉장히 많이 바꿨거든요. 거의 처음부터 다시 수정해서 쓰다시피 한 작품이기도 해요. ‘로버트’, ‘안이지’, 『불타는 작품』이라는 제목만 똑같고 나머지는 변형을 많이 가했어요. 제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계속 수정을 했죠.
오은: 처음 이 소설을 구상한 게 두 편의 단편이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 단편은 어떤 내용이었나요?
윤고은: 두 편이 있는데요. 한 편이 「불타는 작품」이라는 제목 그대로고요. 어떤 예술가를 후원해서 작품을 소각한다고 하는 조건에 동의해야 하는 기본 골조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단편이었어요. 또 다른 한편이 「Q」라는 단편이었어요. Q라는 도시 이름이 이번 소설에도 등장하는데요. 어떻게 보면 이번 소설에 주된 골조 두 개를 가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 단편들 중에서 계속 미련을 두고 있었던 단편이기도 하고요. 개가 등장하는 두 단편이기도 했어요.
오은: 『불타는 작품』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면, 주인공인 안이지라는 작가가 ‘로버트 재단’에 픽을 당하죠. 너의 작품을 로버트가 골랐다고 하면서 재단의 초대를 받습니다. 미국으로 초대를 받는 거죠. 주인공은 ‘내가 됐단 말이야?’ 하면서 기쁜 마음에 가기도 하고요. 한편으로는 ‘왜 나한테 이런 지원을 해준다는 거지?’ 하는 의구심도 있습니다. 게다가 공항에서 도착하니 플래카드도 없이 방치되어서 공항 인근에서 자력으로 시간을 보내게 되고요. 겨우 재단에 방문을 하게 되는 것이 초반부의 이야기입니다.
작가님이 한 인터뷰에서 서사를 이끄는 방법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신 적이 있습니다. “독자가 호기심 궁금증을 하나 이상 품고 그것을 따라가게 한다. 호기심과 궁금증 유발 인물을 선택의 기로에 놓는 것을 좋아한다. 인물이 선택의 기로에서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사건에 개입될 수도 휘말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인공 안이지가 자꾸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등장하잖아요. 선택의 기로가 작가님 장편에서는 일종의 분기점이 되는 것 같은데요. 이게 이야기를 이끄는 방식이면서 윤고은식의 어떤 스타일이기도 한 것 같아요.
윤고은: 제 소설, 특히 장편 소설 같은 경우는 인물이 끊임없이 움직이거든요. 어떻게 보면 게임판 위의 말처럼 계속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를 결정을 하게 되는 거죠. 예스/노 게임을 하듯이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할지,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결정을 하는 기로에 있는데요. 사실은 우리 인생이 그렇잖아요. 아주 미세한 선택 하나로 갑자기 운명이 바뀌기도 하고요. 제가 그런 얘기에 흥미를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오은: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입니다. <책읽아웃> 청취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을 소개해주세요.
윤고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예요. 이 소설을 너무 좋아합니다. 플라타너스 낙엽만 한 크기 정도의 책인데요. 저는 이걸로 이 작가를 처음 알았거든요. 이 책을 읽고 나면 진짜 폐하고 간 사이에 이런 장기가 있었어, 이런 느낌이 들어요. 그게 막 떨리고요.그게 ‘나 여기 있어’ 하고 말하는 느낌이 드는 그런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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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