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홍빛 엔진이 재차 진동하기 시작한다. 비운의 사고로 보컬 '반'이 팀을 떠난 후 그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뒀던 브로큰 발렌타인은 새로운 동력이 될 인물을 발굴했고 마침내 그들이 운용해 온 강렬한 사운드에 시동을 걸었다. 양가적인 소리에 대한 굳은 믿음도 올곧다. 어김없이 한 손에는 차갑고 도회적인 그런지 록을, 아울러 감성을 한껏 머금은 록 발라드를 쥐고 돌아왔다.
여러 차례 객원 보컬을 맡았던 밴드 허니페퍼의 김경준이 정식으로 합류했고, 신보에서도 그 막중한 역할을 수행한다. 다양한 분위기의 곡이 넘실대는 와중에도 그는 폭발적인 야성과 처연한 감정을 노래하며 오랜 빈자리를 무난하게 채웠다. 뜨거움과 차가움을 넘나드는 브로큰 발렌타인 스타일을 스스로 해석하고 합당한 톤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능수능란한 목소리다. 덕분에 팀이 지향하는 'Standing in my way'와 같은 하드한 록 사운드와 '언젠가 눈물 속의 시간이 지나면'이 대표하는 발라드 모두 안정적으로 담겼다.
마초성과 서정성이 동석한 음반은 푸 파이터스가 그 영역을 확대한 포스트 그런지 장르의 기본이자 정석으로 불리기에 충분하다. 쨍하게 부서지는 기타 주법을 더 강하게 갈고 닦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유의 부드러운 멜로디 창조에 힘썼다. 초장부터 'Shine the darkness'까지 질주하는 록 연타 구간에는 라이브 공연에서나 느껴질 법한 열기와 힘이 자리하고, 반대로 'Every single day'나 '무제' 등에서는 기세를 죽인 연주와 부담없는 후렴 덕에 안온한 기운이 감돈다.
다소 일관된 원투 펀치가 지속되는 가운데 곳곳에 위치한 변주가 균열을 내고 청취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드럼과 리듬 기타가 변칙적인 박자로 꾸민 'Mozambique drill'과 스트링이 난입해 기타 솔로와 긴밀한 대화를 주고받는 '언젠가 눈물 속의 시간이 지나면'에서는 보컬 대신 세션들이 일선에 나서서 각자의 존재감을 뽐낸다.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도록 신경 쓴 악기 간의 섬세한 조화, 전통적인 스튜디오 녹음 방식을 채택할 정도로 좋은 소리를 담기 위한 노력과 진정성이 돋보인다.
오랫동안 명맥을 지켜온 멤버들의 색은 더욱 진해졌고, 앞으로의 여정을 함께 할 신규 멤버와의 조합 검증도 끝마쳤다. 공격적이고 야수적인 욕망을 분출하는 하드 록 안에 당당하게 들어찬 매혹적인 선율, 브로큰 발렌타인의 핵심이 그대로 살아있는 음반이다. 변화한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새로 단장한 브로큰 발렌타인의 의지를 대변하여 과거 대신 진중한 미래를 내다본다는 것. 요동치는 격렬한 배기음에 가슴 속 무언가가 계속해서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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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