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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노을, 마법이 일어난 이후의 이야기

파란노을(Parannoul) 'After The Mag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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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의 이유로 과민 반응하는 사람들과, 듣지도 않고 선입견을 품은 사람들에게 심술이 났다"는 그의 언급처럼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이후 진행된 후속 작업은 개선이나 수리보다도 덜어냄의 과정이었다. (2023.02.16)


마법이 일어났다. 긴 잠에서 깨어 밖을 보자, 창문 너머 추종자들이 자기 이름을 연신 연호하고 전 세계에서 날아든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이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무도 알지 못하던 은둔 음악가는 하루아침에 모두에게 주목 받는 주인공이 되었다. <After The Magic>은 그 이후의 이야기다. 어떠한 신상 공개도 꺼리던 그가 용기 내어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여러 아티스트와 교류하며 화합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순간들...

이 후일담에는 '변화'와 '배제', 두 가지 양상이 강하게 맞물린다. "모종의 이유로 과민 반응하는 사람들과, 듣지도 않고 선입견을 품은 사람들에게 심술이 났다"는 그의 언급처럼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이후 진행된 후속 작업은 개선이나 수리보다도 덜어냄의 과정이었다. 더 정확히는 감정 과잉의 근원인 이모(Emo) 색채를 걷어내고, 그가 선호하는 질감과 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모색 과정에서 생겨난 타의적 변화에 가깝다. 앨범 커버가 마음의 조리개를 열어 어두웠던 골방에 마냥 빛을 비춘 결과물 같다가도 문득 지우고 싶은 영역을 지우개로 세차게 문질러 없앤 흔적처럼 보이는 이유다.

파란노을을 상징하는 대부분의 요소가 정돈된 모습이다. 정제되지 않은 로파이 효과를 기반으로 사운드 간 층위를 분명하게 구분하던 전작에 비해 안정된 보컬과 더욱 다양해진 악기 구성은 동등한 위치에서 조화를 이룬다. 불투명한 미래와 고독에 몸부림치던 내용도 한껏 긍정적으로 변했다. 무엇보다 공백을 메우기 위해 모여든 협업자의 명단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홍대 롤링홀에서 열린 '디지털 던' 라이브 공연에서 함께 어깨를 맞대며 정을 나눈 동료들. 피처링 보컬의 델라 지르(Della Zyr)와 기타를 덧댄 아시안 글로우, 트럼펫을 협조한 핀 피오르(Fin Fior)가 만든 두터운 대형이 앨범 곳곳에 연대의 흔적을 스민다. '타의적 변화'는 바로 이 온기에서 흘러나온다.

달라진 분위기는 수록곡 단위의 조밀한 화소로 확대할 때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입문용으로 각색되었다 해도 믿을 만큼 부드러운 필터를 입힌 뒤 슬며시 비기를 꺼내 드는 '북극성'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연성화 작업과 클리셰 탈피다. 기존 작법의 골자는 취하되 유려한 현악 세션으로 접근성을 높이고 투박함을 지워낸 '우리는 밤이 되면 빛난다'와 'Parade'가 전작의 작법을 일부 부수고, 그다음 라디오헤드의 'High and dry'의 명료함을 구현한 'Sound inside me, waves insdie you'와 넬의 일렉트로닉 기포가 부글거리는 'After the magic'이 변혁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비관 속에 가려져 있던 상상이 발색하는 순간이다.

포효가 바래진 것도 아니다. 가사와 운용법이 조금 순화되었을 뿐 감흥을 극한으로 끌고 가는 드라마틱한 연출은 여전히 건재한데다 오히려 선율을 전면으로 가져온 덕에 듣는 부담을 상당수 줄였다. '흰천장'의 과포화 포맷을 계승한 후일담 '불면증'을 보자. 전자가 침잠이라면 후자는 전진이다. 그는 '차가운 감촉 아래 날아보고, 떨어지고, 죽어봤'기에 이제 '아침이 되어도 무섭지 않'다고 고백한다. 여러 소리가 마구 뒤섞이는 가운데 유일하게 선명함을 잃지 않는 노랫말에서 혼란의 눈보라를 헤치며 꿋꿋이 나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가 이 한없이 작은 음악가에게 기대 이상의 감정을 투자하게 되는 이유는 평면적인 음악적 감흥을 넘어 실제 서사가 체감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일정 수위를 유지하던 전작과 달리 출렁이는 기조와 배치가 간혹 방해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저분한 마찰이 자아내던 날 것의 매력이나 한없이 음울한 감성이 일순간 없어진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단적인 예로 두 차례의 극적인 체력 소모를 요구한 후, 등장하는 평탄한 대곡 '도착'은 사실상 앨범의 마무리를 종용하는 듯하고 일종의 댄스 트랙 '스케치북'과 느슨한 도입부의 '개화'는 조합에 일부 의아함을 가져온다.

그럼에도 온전히 하고 싶은 소리를 구현하고, 그 소리를 통해 의도를 전달하는 것, 아티스트라면 반드시 겪는 이 두 가지 고민을 명쾌하게 해결하며 과도기적 희열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순식간에 이미지를 전복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구축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 여느 때처럼 적막한 고요의 밤을 넘어, 꿈의 저편을 지나, 새하얀 아침을 맞이한 파란노을. 다만 어제와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수많은 친구가 그의 곁에 늘 함께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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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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