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의 선택
정서경, 서유미, 홍한별, 임소연, 장하원 외 6명 저 | 돌고래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엄마이기도 한 여성들이 돌봄과 작업을 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표지를 보시면 호랑이 모양의 탈인지 모자인지를 쓰고 있는 아이가 그려져 있어요. 소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품고 있는 모습입니다. 강렬한 느낌, 강인한 느낌을 주는 표지예요. 아이가 품고 있는 것이 돌봄일 수도 있고 작업일 수도 있고, 둘 다이기도 한 것 같아서 의미하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표지의 그림은 서수연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렸고요. 책의 앞쪽에 서수연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과 짧은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의 앞쪽에는 김희진 편집자의 글이 실려 있는데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다양한 분야의 여성들이 일과 관계 사이에서, 자기 작업에 집중하는 것과 주변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사이에서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지 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섭외한 열한 명의 필자를 소개해 드리면 정서경 시나리오 작가, 서유미 소설가, 홍한별 번역가, 임소연 과학 기술학 연구자, 장하원 과기술학 연구자, 전유진 아티스트, 박재연 미술사 연구자, 엄지혜 인터뷰어, 이설아 입양 지원 실천가, 김희진 편집자, 서수연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저는 이 책의 저자로 참여한 모든 여성들이 흔들리면서도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마치 표지 그림의 느낌처럼 다리에 힘을 주고 중심을 잡고 서 있으려고 하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돌봄과 작업이 전혀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고, 두 가지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계속 이어지고 같이 자라나는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좋았던 글을 하나 소개하자면, 엄지혜 저자는 여성으로 엄마로, 딸로, 그리고 인터뷰어로 경험한 일들을 들려주는데요. 육아를 하면서 인터뷰를 통해 만난 인터뷰이들이 저자가 갖고 있는 고민을 덜어주기도 하고, 힘을 내게 해주기도 하고, 숨통을 틔워주기도 하고, 위로를 주기도 하는 거예요. 특히, 저는 여성 작가 인터뷰들이 인터뷰를 통해서 저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이 참 좋았어요. 같이 돌봄과 작업을 하는 여성들끼리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이 느껴져서 좋았는데요. 이를테면 조남주 작가가 이런 말을 합니다. 『82년생 김지영』을 쓰면서 자존감이 높아졌대요. 일을 그만두고서 집에 있으면서 그게 자신의 능력과 열정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을 쓰면서 '내가 항상 열심히 살았는데 나에게 선택지가 너무 적었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엄지혜 저자가 공감을 해요. 자신 역시 직장생활하면서 아이 키우면서 에세이를 한 권 쓰고, 그 책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고 또 그 책이 사랑받는 걸 보면서, 자긍심을 얻었다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또 정아은 소설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집안일은 일단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하잖아요. 매일매일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자기가 자기 존재를 떠받드는 훈련을 한 사람은 결코 거만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에 덧붙여서 저자는 '내 존재를 떠받드는 훈련, 그리고 타인을 위한 일상적인 노동.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있을까?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라고 썼습니다.
열한 명의 저자가 쓴 에세이를 읽어 보면,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깨닫는 바가 달라서, 이 책을 읽으며 열한 개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어요. 그 안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감정들이 있고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를 다채롭게 볼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한자의 선택
권성아, 김은주, 이진희, 임현아, 홍미정 저 | 사이드웨이
화면 해설 작가로 활동하는 저자들이 모여서 쓴 책입니다. 화면 해설은 시력이 약하거나 전혀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을 위해서 영상 속 상황을 해설자가 음성으로 설명해주는 서비스입니다. 한국의 지상파 방송에서는 2001년에 MBC <전원일기>와 KBS <일요스페셜>로 이 서비스가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자막 방송은 제작 기준이 청각장애인이고, 화면 해설 방송은 제작 기준이 시각 장애인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영상들은 시각 정보 그리고 소리 정보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리만으로는 어떤 상황이고 무슨 소리인지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빗소리하고 전을 부칠 때 나는 기름 끓는 소리를 시각 정보 없이 들으면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전투씬 같은 것들, 제가 아는 유명한 예로는 <와호장룡>의 대나무 결투씬이 있는데, 그 장면에서 소리만 들으면 두 사람이 대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면서 심지어 나무에 매달면서 검 싸움을 한다는 걸 전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 장면을 음성으로 들려주는 서비스입니다. 대사 이외의 정보들을 음성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화면 해설이 하는 건데요. 영상에서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의 이름 정보를 포함해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등을 해설하고 시간 정보도 알려줍니다. 저물녘인지 돋을녘인지, 밤인지 새벽인지. 그리고 날씨 정보도 물론 들어가고요. 공간 정보도 들어가고, 뿐만 아니라 인물들이 처한 상황 혹은 인물들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 등등을 목소리로 전달을 하는데요.
화면 해설 작가란 바로 그 원고를 쓰는 노동자들입니다. 작가가 화면 해설 원고를 쓰면 그 원고를 성우들이 낭독해서 영상에 입히는 거죠. 그러면 그냥 드라마나 영화의 대본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할 텐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해요. 화면 해설에서는 영상 속 내용하고 틀리지 않게 해설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최종 영상물이 대본 그대로 제작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예를 조금 들어보자면, 이진희 작가가 <나의 해방일지>의 화면 해설 원고를 썼다고 해요. 1화의 원고인데요. 이런 장면입니다.
"시간이 지나 구 씨가 혼자 떨어져 앉아 바람에 땀을 식히며 먼 산을 응시하고 있다. 제호네 가족은 새참으로 국수를 먹고 있다. 산등성이와 가까워진 태양은 마지막 열기를 내뿜고, 구씨의 눈빛은 멍한 듯 깊어진다. 제호가 국물까지 마신 뒤 그릇을 내려놓는데 창희와 미정은 땀에 전 얼굴로 무표정하게 국수를 먹는다."
이런 내용이거든요. 이 장면은 등장인물들이 말을 전혀 나누지 않는 장면이에요. 이 장면에 만약에 해설이 없다면 시각장애인들은 그냥 먹는 소리만 듣게 되는 거죠. 그 자리에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도 전혀 모를 테고요.
『눈에 선하게』는 4부로 나누어진 책인데요. 1부에서는 화면 해설이라는 일을 소개하고, 그리고 작가들이 하는 일을 각자의 입장에서 소개하는 글이 실려 있고, 이어지는 2~4부에서는 이 작가들이 고민하고 일하는 동안에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 문제들, 그리고 몇 가지 원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권성아 작가는 이 일을 하는 원칙으로 눈을 감고 영상을 들어보는 과정을 이야기하는데요. 소리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을 확인할 수 있어서 눈을 감고 들어본다고 해요. 그러면서 비시각장애인들이 무심코 영상을 볼 때 얼마나 많은 시각 정보를 동시다발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깨닫는다고 합니다.
임현아 작가 역시 소리에 민감한데요. 영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소리들은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기 때문에 허투루 들어가 있는 소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해설이 들어가면 그 소리를 덮어야 하기 때문에, 타이밍과 맥락을 잘 읽고 원음과 해설 둘 중 어느 쪽이 중요한 정보인지를 계속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일이기도 한 거예요. 공부도 많이 필요한 일인데요. 영상에 잠시 스쳐가는 사물들의 이름도 중요하기 때문에 정보나 자료 조사가 대단히 많이 필요하고, 역사도 알아야 합니다. 또, 표현이 반복되지 않도록 더 풍부한 말을 사용하도록 말을 꾸준히 수집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영상 장르에 따라서 작가들이 다른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책에 많은 사례들이 재미있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화면 해설의 역사는 올해로 21년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2001년에 <전원일기>부터 시작해서 2010년에 장애인 차별 금지법, 그리고 2011년에 방송법 개정으로 한 해 약 5~10%의 비율로 화면해설 방송을 제작해야 하는 것이 방송 사업자들의 의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청률이 낮으면 바로 제작이 중단된다고 해요. 그래서 공급이 많이 부족한 상태고요. 김은주 작가의 경우에는 화면 해설이 꼭 시각장애인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여러 이유로 방송을 즐기기 힘든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콘텐츠를 감상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이 서비스가 조금씩 더 알려지면서 이미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받은 드라마의 시청자들이 화면 해설 영상으로도 드라마를 다시 시청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좋아하는 드라마를 재경험하면서 즐기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하는데요.
화면 해설 작가들은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 그 아름다움에 압도되기도 전에 먼저 '저걸 어떻게 해설하지?'라는 고민을 한다고 합니다. 작가들의 바람은 함께 감동하고 같이 웃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비시각장애인들이 어떤 장면을 보고 웃을 때 시각장애인들도 같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단호박의 선택
앨러스테어 샌트하우스 저 / 신소희 역 | 심심
원제로 보이는 영어가 표지에 실려 있습니다.
'Head First : How the mind heals the body'
번역을 해보자면 '머리가 먼저다 : 어떻게 마음이 몸을 치유하는가'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에 띠지를 보고 약간 혹했는데요.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으로 아픈 경험이 있거나 마음을 다루는 일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라는 추천서가 적혀 있고요. 고려대학교 정신건강연구소장 한창수 님의 추천사인 것 같습니다.
이 책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최근에 제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으로 몸이 아픈 적이 있거든요. 사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이 여러 가지가 있긴 해요. 조금씩 아픈 것들이라 그렇게 심각하진 않은데, 병원에 몇 번씩 갔을 때 추가적으로 저한테 병명을 알려주지 않은 증상들이 몇 개 있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됐고요.
저자는 종합 병원 정신과 의사로 20년 넘게 근무한 분인데, 런던의 가이스 병원과 모즐리 병원에서 일을 하셨다고 하고요. 종합 병원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한다는 건 기존의 지역 병원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넘어오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리고 그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다른 과에서 계속 돌다가 결국 해결이 안 되면 마지막에 정신과로 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병과 질환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환자 본인이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는 어떤 증상의 경험을 '병'이라고 한다면 '질환'은 의사가 검사하고 결과를 내려주는 진단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질환은 온갖 검사를 통해서 실제로 확인되고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하다면, 병은 증상만 남아있고 의사가 이 증상을 입증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질환이 아닌 병은 흔히 실제가 아니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으로 인해서 영국에서도 연간 30억 파운드 정도의 비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는데요. 이게 국민 보건 서비스 1년 예산의 3% 정도의 액수라고 합니다. 온갖 검사를 해도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혹은 진단명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무의미한 검사를 계속해서 정당화시키게 되는 거죠. 근데 왜 이렇게 증상을 가지고 질환 진단명을 내리는 게 중요하게 됐냐 하면, 사실 이건 의사가 환자의 고통에 진단명을 붙여서 정당화하려는 시도라고 저자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증상이 있는데 실제적으로 의사가 확인시켜준 병명이 없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부정적이라거나 수치스러운 거라든가, 아니면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한다고 여기게 되는 거죠.
반면에 의사가 '이 사람은 환자입니다'라고 보증한 환자, 병명을 갖게 된 환자는 결백하고 '이 사람은 병 때문에 이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지원을 받을 가치가 있다'라고 여겨지는 사회적 풍조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의학은 점점 더 사람들의 증상을 질환으로 정당화하는 구실을 점점 더 많이 갖게 되고, 그래서 더욱더 사람들한테 진료를 보게 하고 더 많은 검사를 받게 하고,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로 일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사례가 나오는데요. 저자가 봤을 때, 환자들을 엄청 다양하게 만났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본다면, 이 사람들이 울 때마다 의사한테 사과하려고 한다는 점이었어요. 와서 울면서 '내가 울어서 미안하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는 거죠. 그럴 때마다 이 사람들한테 '감정을 느끼는 것도 인간성의 일부다, 내가 웃었다고 해서 사람들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않듯이 눈물을 흘렸다고 사과할 이유도 없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환자들 같은 경우에 자신의 감정을 느꼈다는 것만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거죠. 그리고 자신이 통증이 있는데 그 통증을 마음의 병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내 통증을 빨리 없애줬으면 좋겠다, 의사가 왜 내 통증을 없애주지 않지?' 그러면서 점점 더 의사를 불신하게 되고, 그 불신으로 인해서 훨씬 더 통증이 심하게 되는 악순환도 겪게 되고요. 그래서 저자는 결론적으로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시간이 너무 필요하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 경험 때문에 이 책에 관심을 가졌다고 얘기를 드렸는데, 저의 경우와 딱 들어맞는 책은 아니었지만, 현재의 진료 방식이라든지 아니면 신체적 증상에 있어서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이 그 신체적 증상을 일으키는가'에 대해서는 인사이트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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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