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누리의 소녀 등장] 마법 : 오래된 구원으로부터
나도 나의 '마법'으로 절망의 뜰에서 열심히 절망을 파내는 사람들과 함께 견디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 마음은 내가 바라는 거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글ㆍ사진 권누리(시인)
202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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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손잡기』의 권누리 시인이 좋아하는 '소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세계를 지키기 위해 힘껏 달리는 '소녀'들을 만나보세요.


임주연, 대원씨아이 제공

내가 아는 어떤 작가들은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으며 많이, 자주 읽으며 성장했다고 했다. 청소년 시기, 도서관이나 서점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거나 도서부에 소속되어 활동하곤 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조금 다른' 청소년기를 보냈다. 열세 살. 초등학생 6학년이던 나는, 어른이 되면 '당연히' 만화가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유치원에 다니던 때부터 내 꿈은 만화가, 삽화가, 디자이너, 화가를 오갔다. 나에게는 아파트 정문 상가의 비디오 대여점에서 한 권에 삼백 원, 오백 원 하던 만화책을 와르르 빌려와 읽고, 또 읽고, 조금 더 자라서는 용돈을 모아 조금씩 소장본을 사 모으던, 하루 내내 만화를 읽고 그리던 한 시기가 있었음을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기꺼이 고백한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장르 만화 『씨엘』(임주연)의 주인공 '이비엔'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인물이다. 『씨엘』(총 23권)의 1부에 해당하는 4권에서 이비엔은, 라리에트에게 "나는 견딜 수 없이 좋아하는 것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어. 되고 싶은 것도 없고 지키고 싶은 것도 없어"라고 고백한다. 라리에트는 그런 이비엔에게 "원하는 게 없는 삶"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하얀 커튼', '볕이 드는 뜰',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가구' 같은 '선호(選好)'를 가진 '평범한 삶'을 상상하게 한다. 이후, 둘은 패밀리어1)로써 '영원히' 함께하게 된다.

사실 이미 이비엔은 로우드(마법 학교)의 입학시험을 위해 고향을 떠나던 중, 마차를 얻어 타기 위해 가지고 있던 짐을 강에 던져버린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가방 안에 있었던 모든 물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그 가방 안에 있던 것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작품2)에서 서술되는 이비엔과 라리에트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 살이다. 나는 『씨엘』을 서로를 모르고 살아온 '두 사람'3)이 서로를 성장시키고, 이해하고, 한 사람의 세상을 어떻게 '유지하게 만드는지'를 다룬 이야기이며,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소중하게 다루는 작품이라고 갈무리하고 싶다.

이를 테면, 이비엔은 지팡이를 고르러 가서는 크로히텐의 선호에 따라 ("전 이게 좋아요. 선생님이 이걸 저한테 주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왔거든요.") 조금 무겁고 또 단순하게 생긴 '소드 스틱'을 고른다. 또, 옥타비아는 '좋아하는 색'으로 오렌지색과 보라색, 핑크색과 흰색을 차례로 나열하기도 한다. 작품 전반에 걸쳐, 작품 속 '소녀'(윗치)들은 저마다의 취향으로 아름다운 옷, 신발과 장신구, 꽃과 차, 다과를 '선택'한다. 사소하고 가볍고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에도 모든 선택은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에 따라 주어지며, 누군가는 선뜻 고를 수 있는 것을 누군가는 고려 대상에 놓지도 못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무언가를 - 무엇이든 직접 고르고 선택할 수 있는 힘과 그 가능성을 언제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든 공평하고, 평등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중학생 때 처음 『씨엘』을 읽었다. 그 무렵에는 내가 반드시 만화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고, 그래서 만화를 찾아 읽는 건 내게 일종의 공부였다.

여전히.

이따금 마주치는 선뜻한 요행이 누군가의 '마법' 덕분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청소년기를 훌쩍 벗어난 여태까지도, 어디에선가 어린 여자애들이 - '마법'으로 - '세상'을 지키기 위해 좌절을 경험하고, 슬픔을 견디고, 사랑을 나누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종종 『씨엘』 7권 도입의 서술4)처럼 내가 '가용한 기쁨과 행복'을 이미 가졌고, 그러나 죄 소모해버렸고, 살아가며 가질 수 있는 감정을 모조리 경험해 본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오만함, 과오, 막막함, 깊은 허무감과 몹시 평평해서 무한하게 느껴지는 상실감은 중학생 때도 겪은 적이 있다. 또, 그런 상태 - 혹은 병증, 병식 - 을 경험하는 사람이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여전히 실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다. 이 순간에도 슬픔과 허무를 공글리고 있는 소녀들과 – 한때 소녀였던 -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라리에트의 '선택'이 이비엔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주었듯, 나도 나의 '마법'으로 절망의 뜰에서 열심히 절망을 파내는 사람들과 함께 견디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 마음은 내가 바라는 거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1) 만화 『씨엘』의 세계관 설정 중 하나. 『씨엘』에서 마법을 쓰는 인간은 메이지(마법사), 윗치(마녀), 소서러(술사)로 구분되며, 마력이 작용하는 공간은 '필드'로 규정한다. 윗치는 필드 안에서 '원하는 대로 세상의 법칙과 원리를 재구성'할 수 있으나 개인의 힘으로는 현실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서로의 '필드에 간섭하고 목숨을 맡길 수 있을 정도의 친밀함과 신뢰'로 묶여 있는 또 다른 윗치인 '패밀리어'의 존재가 필요하다. '패밀리어'는 '서로를 필드에서 꺼내줄 수 있'으며 '짝으로 정해진 이후부터 마녀로서의 생을 함께'한다.

2) "우리는 15년이나 만나지 못했다. 당연히, 할 얘기가 너무 많았다.", 『씨엘』 4권(대원씨아이, 2006).

3) 이비엔과 라리에트, 제뉴어리와 도터, 이비엔과 크로히텐, 마고트와 도터 등. 

4) "생각해보면 나는 겨우 열여섯에 평생에 걸쳐 얻어야 할 것들을 거의 다 갖고 있었다. 친구, 재능, 아름다움, 원한다면 부와 명성,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리함과 직관, 그리고... 사랑. 그러므로 신은 공평하셨는지도 모른다. 나는... 열여섯에 이미 내 인생에 주어진 좋은 몫들을 다 살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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