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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누리의 소녀 등장] 카메라, 액션! : 기록하는 소녀들

관찰,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봄",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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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하는 소녀'들이 가진 '사랑의 힘'은 너무 강력한 것이라, 그 대상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 힘으로 '소녀'들은 사회의 정상성과 규칙, 사회가 요구하는 '논리'를 '제거'해버린다. (2022.10.04)


『한여름 손잡기』의 권누리 시인이 좋아하는 '소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세계를 지키기 위해 힘껏 달리는 '소녀'들을 만나보세요.


블록베리크리에이티브 제공

돌이켜 보면 나는 청소년 시기에 가장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물론 지금도 사진을 찍고, 영상으로 풍경 기록하는 일을 좋아하지만, 열다섯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의 나는 체육 대회나 스승의 날, 졸업식 같은 중요한 날이면 전날 밤부터 필름 카메라를 가방에 챙겨 넣어두곤 했다. 나의 첫 번째 필름 카메라는 미놀타의 '하이매틱 SD HIMATIC SD'였다. 하이매틱 SD는 목측식 카메라로, 카메라 자체에 초점 거리 측정 기능이 탑재되어 있지 않아 '목측(目測)'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피사체까지의 거리를 직접 조절하거나, 초점 링을 맞춰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일이 중요했다. 이 '초점' 맞추기 작업을 불성실하게 행한다면 모든 것이 흐리게 나온 사진이나 원하지 않는-예상치 못한 피사체에 초점이 맞은 '실패한 사진'만 남게 된다. 나는 하이매틱 SD 이후 야시카의 'FX-3'를 가졌고, 더는 어설프게 '목측'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나에게 '목측'의 경험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진을 찍을 때도, 찍지 않을 때도.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2022)의 '킥보드'(카와이 유미)는 천문부에 소속되어 있고, SF를 좋아한다. 그리고 '맨발'(이토 마리카)이 각본과 감독을 맡은 영화 <무사의 청춘>의 촬영을 담당한다. 이 영화를 촬영하기 위한 킥보드의 도구는 스마트폰과 짐벌 삼각대, 그리고 사랑이다. 영화부원인 '맨발'이 학교 축제 영화 상영을 위해 출품했던 <무사의 청춘>이 투표에서 탈락되어 낙담하는 모습을 보이자 '킥보드'와 '블루 하와이'(이노리 키라라)는 기꺼이 '맨발'을 돕겠다고 나선다. 학교 축제 상영작으로 선정된 것은 팀 '카린'(코다 마히루)의 <사랑한단 말밖에 할 수 없잖아>라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몹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외치고 또 고백하는 것이 전부인 이 팀 '카린'의 영화는, 이후 로케이션 장소가 겹쳐 '카린'과 마주한 '킥보드'에게 "지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만든다. 아니, 선언의 '형태'로 '킥보드'의 사랑을 '고백'하게 한다.

"세상에 너보다 재밌고 귀여운" 건 없다고 말하며 '사랑'을 관찰하는 소녀는 또 있다. 바로 만화-애니메이션 <카드캡터 체리>(원작 <카드캡터 사쿠라>)의 '지수'(원작 '다이도우지 토모요')다. <카드캡터 체리>는 주인공인 '체리'가 '크로우 카드'를 봉인하고 회수하여, 세상의 재앙을 막는 것이 주된 내용인 마법소녀물이다. '체리'가 세상의 재앙을 막을 때, '지수'는 '체리'의 '카드 봉인을 위한 과정'을 캠코더로 촬영한다. 카드 회수를 위해 촬영이 꼭 필요한가를 묻는다면,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지수'의 기록은 자신에게 그 자체로 사랑이자, 사랑의 관찰이자, 사랑의 표현이 된다.

'킥보드'와 '지수'에 덧붙여, 아이돌 그룹 '이달의 소녀' 멤버 '츄'의 데뷔 프로모션 솔로 뮤직비디오인 <Heart Attack>에서도 '이브'를 향한 기록자의 태도를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소녀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성실하게 기록한다. 전술한 내용과 같이, 소녀들이 기록하는 '사랑하는 것'은 말 그대로 피사체(사랑하는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사랑', 그 자세와 방법, 형태, 마음, 순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기록'을 선택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피사체가 아닌 '관찰자가 되는 소녀들'은 카메라 렌즈와 화면 바깥에서 기꺼이 가깝고도 먼 미래를 기록한다.

사진이나 그림을 통해 '사랑을 기록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종종 언급되고 있다. 영화 <캐롤>(2016), <아가씨>(2016), <윤희에게>(2019),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20)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카메라로 사진을 촬영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형태로 '사랑'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여성'들은 연령, 계급, 성별 등 사회적 정체성에 따른 위계와 질서, 정상 규범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마주하며, 때문에 (사진과 그림으로 나타나는) 기록을 숨기고, 지우고, 스스로 제거하거나 '제거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이러한 장면들에는 사회가 '충분히 성숙한 비청소년 성인으로서의 여성들'에게 바라는 '정상성'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어쩌면 가까스로) 기록하고 기록되는 소녀들 사이와 그 주변부는 선망, 우정, 동경, 희망, 바람, 용기를 '포함'하는 '사랑'으로 가득 차있다. 그것은 역시 '소녀들'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를 직시하는 힘은 사랑의 초점을 명쾌하고 선명하게 맞춘다. '관찰하는 소녀'들이 가진 '사랑의 힘'은 너무 강력한 것이라, 그 대상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 힘으로 '소녀'들은 사회의 정상성과 규칙, 사회가 요구하는 '논리'를 '제거'해버린다. 그리고 그 기록과 관찰 속에서 소녀들의 '사랑'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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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누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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