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하얼빈』, 젊은 시절부터 쓰고 싶었던 소설”
『하얼빈』은 실존 인물 안중근의 삶을 철저한 상상으로 빚어낸 소설이다.
글ㆍ사진 엄지혜
202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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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이 신작 장편 소설 『하얼빈』을 출간했다. 김훈은 오랫동안 안중근의 청년 시절로부터의 짧고 강렬한 생애를 소설로 쓰고 싶은 꿈을 품어 왔다. 『하얼빈』은 실존 인물 안중근의 삶을 철저한 상상으로 빚어낸 작품이다. 기존의 책들이 안중근의 일대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력한 것과 달리, 김훈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순간과 그 전후의 짧은 나날에 초점을 맞춰 안중근과 이토가 각각 하얼빈으로 향하는 행로를 따라간다. 『하얼빈』은 안중근에게 드리워져 있던 영웅의 그늘을 걷어내고 그의 가장 뜨겁고 혼란스러웠을 시간을 현재에 되살려 놓았다.

지난 8월 3일, 『하얼빈』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김훈은 “오랜 기간 동안 틈틈이 안중근의 자료와 기록을 찾아보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의 족적을 찾아서 일본의 여러 곳을 들여다보았다”며, “이 소설을 쓰며 여러 서물(書物)들에 의지했다. 이미 연구되고 기록된 사실들의 바탕 위에서 등장인물의 내면을 구성하고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하얼빈』을 출간한 소감이 궁금하다.

이런 (공식적인) 자리를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쑥스러운 자리를 만들게 되어 식은땀이 난다. 『하얼빈』은 오랜 기간 동안 쓰고 싶었던 소설이다. 청년 안중근의 고뇌, 에너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 블라디보스톡의 허름한 술집에서 우덕순을 만나 “이토를 죽이러 가자”고 말했다. 서른 살이 넘은 젊은이들이 왜 이토를 죽여야 하는지, 그 대의명분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토론하지 않았다. 총알 개수나 자금에 관한 논의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너무 놀라웠다. 그들의 고뇌는 무거웠지만 처신은 바람처럼 가벼웠다. 얼마나 아름다운 대목인가. 이 소설을 쓸 수 있어서 행복했다.

제목을 『하얼빈』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원래 내가 생각한 제목은 ‘하얼빈에서 만나자’였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만나자’를 뺐다. 주제를 과하게 노출시키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목이 더 완성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얼빈이 제국주의 세력의 교차점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다. 출판사의 결정이 옳았다.

젊은 시절부터 이 작품을 구상했던 것으로 안다.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가 있나?

우선 밥벌이를 하느라 바쁘게 지냈고 이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젊은 시절부터 생각한 소설이지만 방치했었다. 올해 초부터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극도로 압축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대학 영문과에서 공부했던 시절, 안중근의 신문조서를 읽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안중근의 '신문조서'를 읽었는데 이 두 권의 책이 내 인생의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책이라는 것이 결국 한 사람의 생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안중근과 우덕순의 아름다운 만남,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세상에서 혁명을 꿈꿀 때 두 사람의 몸가짐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다는 사실, 그들의 삶의 추동력과 열정과 격정이 놀라웠다. 그래서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말에서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둬 놓을 수 없다"고 썼다.

나로서는 굉장히 중요한 문장이었다. 안중근이 이토를 자기 시대의 적으로 여기고 그를 쏴 죽였다고 사명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다. 동양 평화의 명분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 시대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현재가 더 고통스럽다. 초야의 글쟁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경험으로 생각해볼 때 지금이 더 절망적이다. 중국은 강대국이 됐고 북한은 핵으로 무장했고 중국과 북한은 군사 동맹을 만들고 있다. 동양 평화는 그때보다 지금 더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 시대의 문제로만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나온 문장이다.


사진_전예슬 

자료 조사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

일본에 가서 이토 히로부미의 전성기를 취재했다. 그런데 소설에 반영되지는 못했다. 다만, '이토'라는 인간의 분위기를 아는데 도움이 됐다. 안중근을 취재하기 위해 하얼빈은 물론 하바로프스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고 싶었지만, 건강에도 자신이 없었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바람에 가지 못했다. 안중근을 연구한 보고서는 한국, 중국, 일본, 북한 등 너무 많은 자료가 있다. 그 책을 다 읽어보진 못했고 중요한 책 몇 권을 읽었다. 안중근의 민족주의, 영웅성이 내 소설에도 들어 있지만 그보다 안중근의 청춘, 영혼, 생명력을 더 담고 싶었다.

소설을 쓰며 가장 힘들게 쓴 대목이 있나?

안중근의 처자식에 관해 쓸 때 가장 힘들었다.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러 가면서 황해도에 있던 처자식들을 하얼빈으로 불렀다. 그들이 하얼빈에 도착한 날짜가 10월 27일인데, 안중근이 이토 암살을 시도한 날이 10월 26일이었다. 하얼빈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게 됐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 이 대목을 쓸 때 괴로웠다. 대사 한 줄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는데 안중근은 훗날 면회 온 동생에게 “내가 처자식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너무나 안중근스러운 말이었지만, 김아려 여사는 조선 여성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생애를 산 사람일 것이다.

역사를 반영한 소설을 계속 쓰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많이 썼지만, 그것이 역사 소설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 소설 속 이순신은 역사 속 이순신이 아니다. 『남한산성』『하얼빈』 모두 마찬가지다.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지만, 안중근이라는 인간의 청춘, 그 내면에 관해 쓴 소설이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영웅인지는 이미 수많은 책과 보고서에 나와 있다. 나는 인간 안중근이 내 옆에 와 있는 것처럼,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고민이 뭔가를 듣는 것처럼, 개인적인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김훈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하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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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jaebang

2022.11.04

김훈 작가님의 책은 100% 읽고 있는데,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에서 느낄 수 있었던 관점의 전환이 하얼빈에서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작년에 많이 아프셨다 던데, 꼭 건강 잘 챙기셔서 계속 멋진 글 써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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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혜


eumji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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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휘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산악부에 들어가서 등산을 많이 다녔다.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위타기를 처음 배웠다 한다. 대학은 처음에는 고려대 정외과에 진학했다.(1966년).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은 것이 너무 좋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정외과에 뜻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영문과로 전과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이 4학년 올라갈 때 그는 영문과 2학년생이 되었다. 영문과로 옮기고 나서 한 학년을 다니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니까 여동생도 고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운 상태라 한 집안에 대학생 두 명이 있을 수는 없었다. 돈을 닥닥 긁어 보니까 한 사람 등록금이 겨우 나오길래 김훈은 "내가 보니 넌 대학을 안 다니면 인간이 못 될 것 같으니, 이 돈을 가지고 대학에 다녀라"라고 말하며 그 돈을 여동생에게 주고, 자신은 대학을 중퇴했다. 김훈 씨는 모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이며 또 "우연하게도 내 생애의 훈련이 글 써먹게 돼 있으니까" 쓰는 것이라 한다. 그의 희망은 희망이 여러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음풍농월하는 것이라 한다. 또 음풍농월 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훈이 언어로 붙잡고자 하는 세상과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선상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선원들이기도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민망하게도 혹은 선정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게도 미인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현미경처럼 자신과 바깥 사물들을 관찰하고 이를 언어로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를 하면서 변화하는 자신의 몸과 느낌을 메타적으로 보고 언어로 표현해낸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그를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다. 1986년 [한국일보] 재직 당시 3년 동안 [한국일보]에 매주 연재한 것을 묶어 낸 『문학기행』(박래부 공저)으로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빼어난 여행 산문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으며 한국일보에 연재하였던 독서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등의 저서가 있으며 1999∼2000년 전국의 산천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에세이 『자전거여행』(2000)도 생태·지리·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칼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전략 전문가이자 순결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삶을 통해 이 시대 본받아야 할 리더십을 제시한다. 영웅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되, 소설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순신 1인칭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여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 이외의 저서로 독서 에세이집 『선택과 옹호』, 여행 산문집 『풍경과 상처』,『자전거여행』,『원형의 섬 진도』, 시론집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밥벌이의 지겨움』, 장편소설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