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현의 영화적인 순간] 우리는 모두 태초의 맘모스처럼
영화 속 주인공 모모코도 오래전 지구의 생명체들이 공유한 시간을 함께 사는 중이다. 그리고 이제는 탄생과 멸종 중에서 멸종의 시간에 좀 더 가까워져가고 있다.
글ㆍ사진 한정현(소설가)
202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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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운석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나도 실제 운석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지 못해서 장담은 못 하지만 영상으로 볼 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인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지구의 기원이 나오고, 이 지구의 시작점을 들여다보면 우주의 탄생점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연관 있는 건 아닐까. 저 돌 하나도 결국은 나와 연관된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탄생도 또 멸종도 거대한 과학책 속 이야기만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대단하지만 또 대단히 나와 가깝기도 한, 그렇게 우리 모든 삶이 서로 연관되고 또 대단하고 소중하게 말이다. 이 영화 속 주인공 모모코도 오래전 지구의 생명체들이 공유한 시간을 함께 사는 중이다. 

그리고 이제는 탄생과 멸종 중에서 멸종의 시간에 좀 더 가까워져가고 있다. 사람들은 모모코의 그런 인생 주기를 아마 ‘노년’이라고 부르는 듯 하다. 그래, 이 영화는 노년의 삶을 보여주려는구나, 그런데… 흔히 노년의 삶을 보여주는 일본 영화라면 빵을 만들거나 시골에 들어가 카페를 하는 그런 내용을 떠올리겠지만 이 영화는 운석이 날아와 깨지고 부서지고 지구가 탄생하는 과학 다큐멘터리를 방불케하는 첫 장면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대체 이게… 뭐지?'라는 마음이 다 가시기도 전에, 그렇게 깨지고 터진 운석의 탄생 끝에 이 영화는 비 오는 모모코 할머니의 어두컴컴한 집으로 돌아온다. 드디어 할머니의 이야기인가, 하면 이젠 뜬금없이 세 명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내는 니다.” 

태초 시간의 탄생과 홀로 사는 여성 노인 모모코, 그리고 젊은 남자 셋. 아무리 이 지구, 아닌 전 우주가 연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조합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런데 이 조합에 당황한 건 보는 사람뿐이 아닌 모양이다. 모모코는 스스로 치매부터 의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남자 셋은 무려 모모코가 고향을 떠나온 이후 고치려고 노력하며 거의 쓰지 않았던 그녀의 고향 사투리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병원을 가봐도 의사는 그저 노환이라며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는다. 

이때부터 모모코는 치매도 예방할 겸 고대 생물사 책을 빌려 공부하는 게 유일한 취미가 된다. 모모코는 고대의 명멸하는 다양한 종들 사이에서 등장한 태초의 존재를 찾아보는 것을 특히 좋아하게 된다. 마치 저 '시원'의 생명사를 통해 마치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으려는 듯 말이다. 그러나 엇비슷한 생애주기에도 사람의 삶은 총천연색인 것처럼, 모모코의 존재 이유는 태초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미 자신의 삶 속에 잘 녹아 있다. 누군가에겐 이제 늙다못해 화석이 될 것 같은 모모코지만 내면엔 여전히 열띤 젊음이 숨어 있기도 하고 또 새롭게 나타나기도 한다. 젊은 시절이라면 도저히 혼자 해내지 못하는 바퀴벌레 잡기, 옷 다 벗고 집안에서 춤추기와 같은 더 열띠고 새로운 모모코도 말이다. 

사실상 한 명의 인간도 이렇게 다양한 내면을 숨기듯 가지고 있다면 영화의 초반부터 ‘나는 너다’라며 등장하는 남자 셋은 역시나 모모코의 모습 중 하나가 아닌 걸까. 사실 누구나 그렇듯 모모코에게도 사연이 좀 있다. 모코코는 정략결혼을 피해 신여성을 꿈꾸며 도쿄로 야반도주를 감행할 정도로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이 남자 셋은 그런 모모코의 열정을 보여주는 상징인 셈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내면 그대로 드러내고 살 순 없듯이 이들이 자신의 내면 모습이라는 인지에도 모모코는 여전히 이들이 마냥 반갑지 않다. 매일 아침이면 이 '남자 셋'은 모모코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시작한다. “일어나지 마! 일어나 봐야 할 일도 없잖아”라고. 이 남자 셋, 모모코가 가리고 있던 내면을 너무나 투명하게 보여주니, 모모코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애써 지우려고 했던 것이 어쩌면 우리가 가장 오래 기억하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닐까.



모모코는 이 세 남자를 통해 차츰 젊은 날 가족을 위해, 남편을 위해 애써 잊었던 자신의 지난날을 찾아보게 된다. 모모코가 그렇게 원하던 신여성의 꿈은 낯선 도쿄에서 외로웠던 자신 앞에 고향 사투리를 쓰며 나타난 남자 '슈조'와의 사랑으로 맞바꾸었다. 그런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고 나서야 모모코는 “남편이 죽었을 때 한 점 기쁨도 있었어”라고 솔직히 고백한다. 가끔은 '홀로' 살아봤으면 하고 '소망'했었음을 담담히 말한 것이다. 사실상 슈조에게 자신의 인생 절반을 반납한 것이나 다름없는 모모코에게 그런 인정은 그 자체로 ‘실패 선언’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꿈을 버려가면서까지 함께 했던 남자에게 가끔은 멀어지고 싶기도 했다고, 원래의 나대로 살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고 말하는 셈이 되어버리니까. 하지만 모모코는 그런 내면을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남편의 부재가 곧 자기 삶의 상실이 아니라,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기회'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실제 모모코가 병원에 다녀오는 길 그녀의 곁을 따르는 건 이제 자식도 친구도 아닌 오래전 멸종된 맘모스와 자신의 내면인 남자 셋이다. 이들이 천천히 화면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 걸어나갈 때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건 나 또한 지구상 생명체 중 하나로 이들이 가는 길을 언젠가는 걸어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결국 그 길을 가는 건 나 자신, 오롯이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영화의 종반부, 모모코는 홀로 산중의 가족 묘지를 찾는다. 버스도 타지 않고 홀로 산을 오르며 모모코는 어린 시절 자신의 품을 좋아하던 자식들을 만나기도 하고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젊은 시절의 슈조와 함께 걷기도 한다. 그리고 그제야 슈조에게 모모코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다음 세상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어, 당신이 그렇게 가고 나서부터야.” 모모코의 이 말은 이번 생의 완벽한 작별 인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무수히 반복되는 지구상의 탄생과 죽음을 인정하는, 그리하여 언젠가 다시 연관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건네는 다음 생의 첫인사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은 또한 이번 생 완벽한 모모코의 독립적 인생이 시작될 것이란 선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비로소 홀로 선 모모코 앞에 아주 어린 모모코와 20대의 모모코, 그리고 70대의 모모코가 한 화면에 잡힌다. 복잡한 내면으로 들끓었던 청년 셋은 어딘가를 함께 바라보는 모모코‘들’을 애틋한 표정으로 바라고 있다. 체념이라 해도 좋고 긍정이라 해도 좋을 미소를 나란히 짓는 그들. 아무 것도 명확하게 결말내지 않았지만 이들의 표정에서 나는 비로소 이 영화가 진정한 ‘힐링’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면 과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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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소설가)

한정현 소설가.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