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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의 영화적인 순간] 빵과 영화, 그 우정의 관계를 위하여

영화 <안녕, 용문객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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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용문객잔>의 감독 차이밍량 또한 이 두 노배우의 영화 보기를 통해 이런 인간의 시간을 보여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쉽게 지나쳐버리는 것에 대한 존중과 다가올 것에 대한 기꺼움. (2022.04.08)


“제 딸은 작가예요.”

가족 중에 누군가 글을 쓴다고 하면 뒤따라 오는 질문이 몇 개 있는 것 같다. 나의 경우를 보면 크게 두 가지다. “나도 글 잘 쓰는 사람이 부럽더라.”하는, 그러니까 글 쓰는 것이 딱히 어떤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질문이 아닌 정리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첫 번째. 그다음엔 “작가요? 방송작가세요? 뭐 드라마 쓰시나?” 그나마 장르를 세분화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두 번째. 둘 중 어떤 부류가 되었든 결론으로 치달으면 꽤나 비슷해진다. “아뇨, 소설가예요.” 이 대답에 잠시간 침묵이 흐른다는 점이다. 그러고는 웹소설을 쓰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책은 냈는지 물어보곤 하는데 이것도 결말은 좀 한결같다. “소설 써서 먹고 살 수 있어요?” 아무래도 글을 쓴다고 하면 주로 방송 쪽이나 웹소설을 떠올리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주변에 방송이나 웹소설을 제외한 글쓰기를 취미가 아닌 하나의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있지 않기 때문에 ‘보통’이 되지 않아버리는 것. 그리고 또 하나, 한국에서 ‘예술’이라고 생각되는 장르는 곧 가난을 의미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와 비슷한, 혹은 더한(?) 반응이 돌아오는 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로 영화를 쓴다고 했을 때였다. 소설과 영화, 그리고 예술. 아무래도 노동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인 것. 지금은 익숙하기까지 한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어떤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 앞에 서 있었다. 곧 그 영화관이 없어진다는 이야기에 찾아간 거였는데 그 순간 이건 뭐랄까, 그 영화관과 내가 비슷하게 느껴졌다고 하면 조금 웃기는 이야기일까. 그러니까 자본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서, 우리 일상의 내용과는 영 다를 것 같아서 사라지는 그런 영화, 영화관. 사실 이제 영화나 드라마는 넷플릭스나 왓챠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들이 생겨나서 과거보단 훨씬 보기가 수월해졌지만 도리어 그런 플랫폼에서 선택받지 못한 그 외 영화는 더욱 보기 힘들어진 것도 사실이니까.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흐르며 무언가가 변하는 건 당연한 이치겠지만, 그래도 요즘 나는 부쩍 사라진 영화관들과 이 영화를 떠올리곤 한다. 차이밍량 감독의 <안녕, 용문객잔>. 

2003년도에 제작된 차이밍량 감독의 <안녕, 용문객잔>은 폐관되는 영화관의 마지막 하루를 다루고 있다. 한때는 1000석 규모의 웅장함으로 초기 영화의 시대를 주름잡았을 복화대극장은 시설 좋은 영화관들이 하나둘 생겨나면서 시대와 함께 막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 복화대극장 마지막 상영 영화는 1967년 작 <용문객잔>이다. 1967년 작인 <용문객잔>은 대단한 수작으로 호평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1967년 작 <용문객잔>이 몇십 년 전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할지라도 상업적 가치와 재미는 별반 없어보이는 이 영화를 위해 낡은 영화관에 올 사람은 많지 않아보인다. 그런 영화(관)의 사정에 걸맞게 마지막 날의 관객들도 여느 날과 딱히 다르지 않다. 딱, 딱 소리를 내면서 영화 도중 견과류를 씹어먹으며 무료함을 달래는 관객, 무표정한 얼굴로 매표소에 앉아 있다가 늘상 그랬듯 화장실을 청소하고 다시 매표소에 앉아 빵을 데우는 매표소 여직원, 언제나처럼 파트너를 찾아 어두운 영화관을 헤매는 게이, 한때 배우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나 이제는 폐관 직전의 영화관에서나 상영되는 1967년 작 <용문객잔>에 실제 출연했던 두 배우. 

그리고 이 두 노배우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오래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등장한다. 마치 사라져가는 영화관의 오마주처럼 느껴지는 유령(이라고 주장하는 유령)이 바로 그 존재다. 사실 이들은 주구장창 이 영화관에 온 사람들, 혹은 존재들이다. 결과적으로, 영화관의 마지막 날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날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영화는 별다른 사건 없이, 마치 다음 날도 이 영화관이 계속될 것처럼 오랜 극장의 마지막 몇 시간을 그저 ‘보여’준다. 어떻게 보자면 영화관에서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영화관이 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을 느끼게 되면서 말이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도 마지막이라고 하면 되돌아보게 되듯, 나는 자연스럽게 이 오래된 극장의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되짚게 되었다. 특히 젊은 날이 오롯하게 담긴 1967년 작 <용문객잔>에 출연한 두 노배우들을 보고 있자니 이들의 삶이 어쩐지 이 영화관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았던 이 배우들은 이제는 그저 ‘나이든’ 사람들로만 보인다. 하지만 영화를 바라보는 두 노배우의 표정이 무겁지만은 않다. 아니, 어떤 장면에서 이들의 표정은 기꺼운 환희에 찬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 모두의 삶이 이 영화관과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통 나를 클로즈업하는 것만 같은 젊은 날에서 이제는 영화 바깥의 관객이 되어가는 듯 나이를 먹어가는 것, 웅장한 영화관에서 덩치만 큰 낡은 영화관이 되는 것이 아닐지 싶었던 거다. <안녕, 용문객잔>의 감독 차이밍량 또한 이 두 노배우의 영화 보기를 통해 이런 인간의 시간을 보여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쉽게 지나쳐버리는 것에 대한 존중과 다가올 것에 대한 기꺼움. 내가 만약 영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나는 극중 <용문객잔>이 끝날 즈음 이 두 배우에게 충분한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가끔은 행복하고 또 어떤 날은 슬픈 각자의 인생을 살아온 모두에게 보내고 싶은 찬사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물론 그 찬사는 꼭 살아있는 인간에게만 보내고 싶은 건 아니다. 나는 영화의 말미로 갈수록 이 영화관 지박령처럼 존재하는 ‘존재’에게도 친근감을 느꼈다. 재미있는 건 이 유령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이 유령이 인간의 형체로 등장할 때가 있는데 바로 파트너를 찾아 헤매는 게이 남성 앞에서다. 그런데 그는 실체 없는 유령보다 ‘실재’의 사랑을 너무 간절하게 찾아 헤맸던 걸까. 그는 유령을 본 순간 도망치듯 떠난다. 설사 영화관이 문을 닫지 않더라도 이곳에 다시 나타날 것 같지 않다. 물론 영화관에서 유령의 존재를 느끼는 또 다른 사람도 있다. 바로 매표소 여직원이다. 그녀가 화장실을 청소할 때, 그리고 극장을 돌아볼 때 자주 이 ‘유령’을 느낀다. 그런 ‘존재’를 꾸준히 느끼면서도 그녀는 특별한 행동을 하거나 감정을 드러내진 않는다. 

그러나 영화관의 말미에서 나는 비로소 그녀가 그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든 존중했음을 알게 되었다. 영화관의 문이 영원히 닫히기 전, 그녀는 매표소 안에 빵을 따뜻하게 데워두고 그냥 나온다. 마치 그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따뜻한 빵을 대접하듯이 말이다. 나는 그제야 이 존재가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사소하고 오래된, 어쩌면 유행에 조금 뒤떨어졌다고 그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존재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영화에서는 오래된 극장과 오래 전 수작으로 표현되는, 그러나 이제는 돈도 흥행도 되지 않는 영화관과 영화로 대변된 어떤 존재 말이다. 감독은 어쩌면 이 오래되고 무해한, 그러나 자본이 끝없이 흘러야만 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무용하다고까지 말해지는 존재들 모두에게 따뜻한 빵과 마음을 대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 보았다. 그런데 처음 이 영화를 본 극장은 이제 서울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여전히 내 주변에 많은 이들이 영화를 너무 사랑하기에 결코 없어지지 않을 곳이라 생각했던 장소였다. 그리고 가장 최근, 그러니까 두 번째 이 영화를 본 곳은 한국영상자료원이었다. 앞으로의 정책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문화예술 지원이 지금처럼 이뤄진다면 없어질 일이 없는 곳.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 영화와 이러한 영화들이 사라질까 봐 걱정한다. 또 그에 따라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는 바람을 갖는다. 아무리 큰 찬사에도 쓸모가 없어지면 사라질 수밖에 영화처럼 우리 모두 또한 언젠가 늙고 인생의 막은 내려오니까. 그때 우리 모두의 삶이 어떤 식으로든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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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정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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