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원의 Designers’ Desk] 묻히지 말아야 할 목소리에 온몸을 포개는 북디자인 - 이재영 디자이너
“모든 것을 직접 관장한 책들이 흐름을 만들며 쌓아내는 것을 즉각 확인하는 재미가 있죠.”
글ㆍ사진 유지원(디자이너)
202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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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디자인이 전부일까?’ 디자이너 이재영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는 사회에 관심이 많아 이 사회에서 묻히는 낮은 목소리들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내는 존재들을 기록으로 잘 남기고, 또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만 28세 때인 2012년, 북디자이너의 손길을 그 목소리에 보태고자 1인 출판사 6699프레스를 세웠다.


『뉴노멀』, 손에 들면 성경책을 쥔 듯한 느낌이다.

『뉴노멀』

이재영의 6699프레스가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방식

『뉴노멀』의 표지를 펼치면 작은 성화가 하나 툭 떨어진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창세기의 한 장면이다. 이 ‘성스러운’ 종교화를 바닥에 떨어트렸다가 주워 올리는 ‘불경스러운’ 경험과 함께 허니듀 작가의 글이 첫 장을 연다. 목사인 작가의 아버지 역시 아브라함처럼 아들보다는 하나님이 먼저였다. 목사의 아들인 작가는 게이다. 이 사실이 가족에게 알려졌을 때, 가족은 아들의 정체성과 아버지의 목회 사이에서 갈등했다. 『뉴노멀』은 대안 가족을 다룬 전시의 도록이다. 이 책을 손에 탁 쥐던 순간, 이것은 ‘성경책’의 디자인을 비튼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대안 가족, 탈북 청소년, 성소수자, 여성,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사라져가는 서울의 목욕탕과 공원…. 6699프레스가 낸 열네 권의 책은 이런 목소리들을 기록해왔다. 이재영을 처음 만난 건 2016년 『한국,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11』에 참여했을 때다. 이재영과 김린이 기획한 이 책에서는 11팀의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가 두 명씩 짝을 이루어 대화를 나누었다. 이재영은 24명 중 유일한 남성이었다. 그 당시 어떤 여성도 이 남성에게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신기했다.


『한국,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11』 표지

『한국,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11』 본문 이모티콘. 여성의 (웃음) 이모티콘에 더불어,
책에서 유일한 남성인 이재영을 비니를 쓴 남성 (웃음) 이모티콘으로 워크스와 맛깔손이 디자인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재영의 성장 배경에 대해 묻고 답하는 긴 대화 끝에, 그는 고향인 부산 지역 일부 남성들의 마초적 경향이 거북했던 기억을 길어 올렸다. 여성들이 느끼는 부당함과 불편함을 당사자와 비슷한 입장에서 민감하게 체감한 것이다. 그는 대상을 향한 공감을 넘어서, 주체로서 그 입장에 자신을 포개어 볼 줄 알았다. 내게는 마쓰오 바쇼의 글귀가 떠올랐다. ‘소나무에 대해서는 소나무에게 배우라’던. 소나무를 대할 때는 이 대상을 ‘꼿꼿한 절개’ 같은 프레임에 가두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 자체를 보라는 소리다. 마찬가지로, 이재영도 눈물샘을 자극한다든가 하는 프레임을 작위적으로 씌우는 등의 대상화를 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상과 일체가 되어 당사자인 주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낸다. 이재영의 책도 그 목소리에 온몸을 포갠다.


사진집 『서울의 공원』 표지

사진집 『서울의 공원』 본문의 사진들

이런 특성을 감지하고 나서 사진집 『서울의 공원』을 보니, 인간 아닌 공원 역시도 책의 주체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눈에 보였다. 사람이 공원을 바라보는 사진인 데에 그치지 않고, 공원 자신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포개어진다. 그 시선 속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며 말을 거는 공원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오는 것 같다.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학회지 『글짜씨』(안그라픽스) 중 이재영이 디자인한 일곱 권

목소리에 책의 촉감이 온몸을 포갤 때 

이런 목소리를 지금처럼 단단히 여문 편집과 디자인 솜씨로 세상에 전하기까지,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의 출판국장으로서 학회지인 『글짜씨』 일곱 권을 만든 이력을 빼놓을 수 없다. 활자를 다루는 감각과 편집의 탄탄한 기본기 위에 다양한 실험을 접목한 장이었다. 편집인이자 북디자이너 이재영은 이를 계기로 한층 완숙해진다.


사진집 『서울의 목욕탕』 표지

사진집 『서울의 목욕탕』의 입장하는 페이지에 삽입한 반투명한 간지

이후 출간된 『서울의 목욕탕』과 『서울의 공원』이 보여주는 촉각적인 물성의 세계는 6699프레스가 고유하게 펼쳐나가고 있는 영역이다. 사진집 『서울의 목욕탕』은 일본에 6699프레스를 알린 책이기도 하다. 한국의 UE(언리미티드 에디션)에 방문한 일본인들을 통해 일본 서점에서 발주가 들어왔다. 목욕탕은 한국과 일본을 정서적으로 연결한다. 이후 일본의 북페어에 초청받는 등 일본 출판인들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표지 사진 속의 목욕탕도 공원처럼 이제는 자주 찾아주지 않는 누군가를 아득하게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다. 표지를 넘기고 면지를 지나면 목욕탕 마크가 찍힌 얇고 반투명한 노루지가 나온다. 표지가 목욕탕 건물 입구라면, 이제 욕탕 바로 앞까지 와서 보얗게 김 서린 반투명 유리 미닫이문으로 입장하는 셈이다. 이런 장치들이 책을 경험하는 오감의 감도를 높여 놓는다.


이재영이 키링으로 늘 들고 다니며 사용하는 줄자

사진집 『서울의 목욕탕』 간지 종이의 재질과 미싱 제본

이재영은 손끝의 감각을 예민하게 유지하기 위해 손톱깎이를 곁에 둔다. 줄자를 키링으로 늘 들고 다니기도 한다. 갑자기 만난 책과 글자의 치수와 비례를 재어서 확인할 때 쓴다. 물론 길고양이랑 놀 때도 꺼내 쓴다. 『서울의 공원』 속 간지에는 한 면이 미끈한 노루지와 양면 모두 초를 먹인 듯한 매뉴얼지를 썼다. 책장을 넘기면 고운 종이로 포장한 선물을 들추는 것 같다. 그러면 독자가 책장을 넘기는 손동작도 달라지게 된다. 평범한 백색 모조지의 경우에도 종이 회사마다 다른 느낌을 감각에 익혀두고 있다. 발색은 비슷하지만 감촉이 각각 다르다. 심지어 같은 회사의 모조지라도 해마다 차이가 난다고 한다. 평소에 인쇄소에서 모조지 샘플을 확인하고, 주기적으로 종이 회사들을 찾아 많은 종이를 확보해서 익혀둔다. 그러니까, 그가 만든 책의 풍부한 촉각성은 평소의 성실함과 광대한 탐구력에서 오는 것이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듯한 박현성 작가의 사진은 이재영이 공들여 고른 백색 모조지와 잘 어울린다. 사진작가가 인쇄의 메커니즘과 최종 결과를 이해해서 사진을 잘 찍은 덕이라고 하더니, 이재영은 문성인쇄에 다음 공을 넘겼다. 인쇄의 언어와 디자이너의 언어가 다른데 인쇄기를 돌리는 기장도 인쇄소의 대표도 디자이너의 언어를 잘 이해하기에 좋은 디자이너들이 이곳을 찾는다는 것이다. 인쇄소에서 아름다운 책을 만드는 데에 기쁨을 느끼며 스스로의 작품처럼 여기기에, 가격은 높지만 실험적이고 공예적인 시도도 해볼 수 있다.


사진집 『서울의 공원』 제본 디테일

『서울의 공원』 제본의 디테일은 놀랍다. 표지를 넘기기 좋도록 책등 약간 앞쪽에 넣는 선을 ‘오시’라고 한다. 오시는 보통 책을 감싼 안쪽 방향으로 넣는데, 이 책은 안에서 밖으로 넣었다. 문성인쇄에서 이 책의 특별한 제본 방식에 꼭 맞도록 고안한 장치다. 덕분에 책을 펼치면 오타바인딩한 표지가 사철 제본한 본문으로부터 절도 있게 꺾여서 단정한 모양새를 갖춘다. 이 정도면 건축공학적인 발명에 가깝다. 문성인쇄와 6699프레스의 ‘협업’에는 사업체와 개인 아닌 사업체와 사업체가 만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기에 가능한 시너지가 생겨난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책은 그 목소리와 물성과 형식이 고유하고도 완벽에 가까워져가는 일관성을 갖게 된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점이 있었다. 기획, 디자인, 제작, 유통, 홍보, 재고 관리 등 어떻게 디자이너로서 혼자 운영을 다 해내는지. 뜻이 있다고 반드시 몸이 따라준다는 보장은 없을 텐데, 외부의 강제력이 없는 상황에서 몸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원은 무엇인지. 그는 살짝 웃으며 답했다. 

“모든 것을 직접 관장한 책들이 흐름을 만들며 쌓아내는 것을 즉각 확인하는 재미가 있죠.” 

그렇군요. 그거군요!


뉴노멀
뉴노멀
구은정 등저
6699프레스
한국,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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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99press 편집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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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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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목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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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원(디자이너)

글문화연구소 소장, 디자이너,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작가. 『글자 풍경』, 『뉴턴의 아틀리에』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