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원의 Designers’ Desk] 지성적인 페미니즘 북 디자인 - 우유니 디자이너
<월간 채널예스> 2021년 9월호
우유니의 디자인은 다양성을 표방하지만, 그래도 특유의 일관된 명랑함이 있다. 이 명랑함은 우리 스스로를 희생자로 만들지 말자는 다짐처럼 보였다. 모두가 웃으며 오실 길을, 당장 오늘의 우리도 너무 아프지는 않도록 웃으며 걸어가자고 권하는 것 같았다. (2021.09.01)
“자유로운 사고를 가두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유럽 낙태 여행』에서 읽은 문장이다. 우유니를 향한 문장은 아니었지만, 그의 디자인과 글, 활동, 페미니스트로서의 지향을 이 문장보다 멋지게 집약할 수는 없다고 감탄하며 밑줄을 그어두었다.
우유니의 Desktop
우유니의 데스크톱은 『보스턴 결혼』 표지 디자인 작업으로 한창이다. 그래픽적으로 발산하는 표지 작업은 일러스트레이터에서, 타이포그래피적으로 수렴하는 본문 작업은 인디자인에서 한다. 한창 발산 중인 이 단계에서는 활동가로서 우유니의 거침없는 추진력이 겹쳐 보인다.
우유니의 디자인은 ‘기법’과 ‘발언’으로 나누어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책의 기법적 측면에 대해 우유니는 지적인 탐구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인 『Boox-ray』는 신진대사를 하는 유기체로서 책을 바라본다. 책 안에는 텍스트와 이미지, 페이지 번호, 심벌 등 여러 시각적인 요소가 살아간다. 그는 한 권의 책을 이루는 여러 페이지를 겹쳐서, 책의 몸을 마치 엑스레이로 투과한 듯 보게 한다. 책의 내장을 보는 것 같다.
우유니는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의 공동 운영자이고, O-O-H(오오에이치)의 대표이며, FDSC(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의 창립 멤버다. FDSC는 한국의 여성 그래픽디자이너들과 단단한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건강한 업계 문화를 만들어나가고, O-O-H는 환경과 사회에 덜 해로운 디자인을 지향한다.
봄알람은 프랑스어로 ‘Baume à l'âme’이고, 의역하면 ‘마음의 위안’ 정도의 의미다. Baume은 ‘연고’나 ‘고약’을 뜻한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모인 직후부터 봄알람은 5년 동안열 권 넘는 책을 냈다. 이 책들은 ‘연고’라는 이름그대로, 당장 아프고 상처 입은 여성들에게 쓰러지지 말라고 긴급하게 발라주는 응급 처방 같은 성격을 지녔다. 지금의 왕성한 활동에 앞으로오랜 연륜이 더해지면, 나아가 이 사회의 체질을 본격적으로 개선하는 책들을 내리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봄알람의 첫 책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는 책의 제목이면서 선언이기도 하다. 기존의 언어와 인식에 담긴 교묘한 함정들을 예리하게 파헤치면서 이에 대처하는 언어를 여성들에게 쥐여준다. 책은 손바닥만큼 작고도 단단해서, 친근하면서도 만만하지 않다. 늘 소지 가능한 그 몸체는 여성들을 언어로 지켜주는 호신용 친구같다.
우유니의 디자인은 페미니즘을, 소수자와 환경에 대한 담론을, 산뜻하고 멋진 것으로 여기게한다. 그 아름다움이 설득한다, 변화의 방향은 긍정적일 것이라고. 활동가로서의 목소리가 잘 읽히도록 해야 하겠기에, 본문 타이포그래피는 안정감 있으면서 좋은 긴장감도 잃지 않는다. 그의 로고와 일러스트레이션, 그래픽 작업들은 ‘일러스트레이션 인포그래픽’이라고 장르의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 같다. 짧은 글귀와 단순한 그림으로 메시지를 또렷하게 전한다.
‘페미니즘 디자이너’ 하면, 주변의 모든 디자이너가 주저 없이 우유니를 꼽을 만큼 그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디자인의 시각적 층위에서는 어떨까?
예컨대 페미니즘 예술가 바버라 크루거는 흑백과 빨간색, 푸투라 폰트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스타일 자체로 발언한다. 그에 비해 우유니는 스타일을 정착시키지 않는 디자인 기법의 전략을 지향한다. 페미니즘 안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살피며, 의식적으로 더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표현을 하고자 한다.
우유니의 Desk
우유니의 활동은 책상 밖으로 펼쳐져서 발로 뛰어나가고, 그의 디자인은 발언한다. 그는 『유럽낙태 여행』에 공저자이자 디자이너로 참여했다. 이 책을 읽으면 낙태가 생각보다 훨씬 흔하게 일어난다는 데에 놀란다. 이렇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을 가리려 들며, 여성 개인의 몸을 국가가 통제하려 한다는 데에 낙태 문제의 이슈가 있다. 책은 여행기이면서 보고서 성격이 강하다. 책을 읽다가 문득 책배를 본다. 무지개가 떠올라 있었다. 유럽의 삼색 혹은 이색 국기들이 모여 무지개색을 만들고 있었다. 유럽 페미니스트들은 한국에서 찾아온 네 명의 봄알람 운영자를 환대하며, 국경을 넘는 페미니스트 교류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표지의 검은색은 이 연대라는 스펙트럼 속에서 빛이 스며 색이 분해되듯 책배와 책등으로 넘어가면서 색색 무지개로 펼쳐진다.
『김지은입니다』는 개인의 아픈 기록이면서, 권력이 오작동하는 구조를 구체적으로 고발하는 책이기도 하다. 폐쇄적인 조직에서는 필연적으로 권력이 남용되고 불의가 일어난다. 그 앞에서 무거운 생계를 짊어진 조직의 일원은 무력한 희생자가 되기 쉽다. 이 책이 다룬 사건과 강남역 살인 사건, 세월호 참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당사자가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것. 그 무력함이라는 공포의 뇌관을 건드린 사건들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공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구조를 직시하게 해준다. 그렇게 위협에 방어하는 힘을 얻게 해주며, 나아가 방어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지키게 해준다. 그 용기가 미안하고도 고마웠다.
책 본문 디자인의 구조는 단행본과 보고서, 메모장이 혼재한다. 흰 바탕은 본문 텍스트이고, 창백한 회색 바탕은 재판 입장문 혹은 사건의 추이 같은 공식 문서들이며, 속마음을 드러낸 듯한 살구색 바탕은 저자의 일기를 모은 부분이다.
일상 수준의 부당한 위력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제목의 ‘김지은입니다’에 자기 자신을 수없이 포개어보게 된다. 『82년생 김지영』만큼 흔한 이름 김지은은 나일 수도 있었다. 함께 분노하면서 나누는 힘이 생겨난다. 이 제목에는 명조체의 보편성에 개별적인 고유성을 겸비한 옵티크체를 변형해서 썼고, 단호하고 절도 있는 어조를 드러냈다.
박노해 시인은 이런 시를 썼다. “내일이면 모두가 웃으며 오실 길을 / 오늘 젖은 얼굴로 걸어가는 사람아”. 아프게도 김지은은 젖은 얼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내일을 향해.
우유니의 디자인은 다양성을 표방하지만, 그래도 특유의 일관된 명랑함이 있다. 이 명랑함은 우리 스스로를 희생자로 만들지 말자는 다짐처럼 보였다. 모두가 웃으며 오실 길을, 당장 오늘의 우리도 너무 아프지는 않도록 웃으며 걸어가자고 권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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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문화연구소 소장, 디자이너,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작가. 『글자 풍경』, 『뉴턴의 아틀리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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