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자 한승훈의 '신화의 질문' 칼럼이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화를 새롭게 읽으며, 인류의 흥미진진한 질문과 만나 보세요. |
19세기 말 이후 종교학이 세계의 서로 다른 신화들을 비교하기 시작했을 때 학자들의 관심을 끈 미스터리 하나가 있다. 그것은 “살해당하는 신”이라는 테마다. 살해당하는 신이라니! 많은 문화에서 신은 정의상 불멸의 존재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선언이 있기 수천 년 전부터 몇몇 신들은 살해당했고, 그 시체는 갈가리 찢겼다.
대표적으로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가 있다. 오시리스는 대지의 남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가 간통을 해서 낳은 자식이었다. 누트의 남편인 태양신 라는 분노에 차서 이런 저주를 내렸다. “누트는 달력에 있는 1년 열두 달 어느 때든 아이를 낳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누트의 또 다른 연인인 지혜의 신 토트가 도움을 주었다. 토트는 달과 내기를 하여 날마다 하루의 72분의 1을 따낸다. 그 일 년 어치를 모으자 5일이 되었다. 이것은 음력(360일)과 양력(365일) 사이의 격차에 대한 신화적 설명이다. 양력에만 있는 5일은 라의 저주가 미치지 않는 시간이었으므로 누트는 이 기간 사이에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 등의 남매였다.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와 네프티스는 각각 결혼해서 부부신이 되었다. (고대 신화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런데 오시리스가 지상의 왕이 되자 이를 시기한 세트는 오시리스를 죽여버리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멋진 상자를 만들어와서 거기에 몸이 딱 들어맞는 신에게 선물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오시리스가 상자에 들어가자 세트는 뚜껑을 못으로 박아버리고는 나일강에 버린다. 아내인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찾아 헤매지만, 관을 먼저 찾아낸 세트는 오시리스의 시체를 열네 조각으로 나누어 이집트 곳곳에 뿌린다. 이시스는 네프티스와 아누비스의 도움으로 오시리스의 시체 조각을 모아 미라로 만들었고 오시리스는 죽은 자들의 왕이 되었다.
『황금가지』의 저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이집트의 오시리스, 메소포타미아의 탐무즈(두무지), 그리스의 아도니스와 디오니소스 등 “살해당하는 신”이 모두 농경이나 식물과 관련이 있는 신이라는 데 주목하였다. 이를테면 오시리스는 식인종이었던 태초의 이집트인들에게 밀, 보리, 포도의 재배법을 알려주었다. 아버지 제우스의 왕좌에 앉아있다가 티탄족 암살자들에게 갈기갈기 찢겨서 살해당한 디오니소스도 포도나무의 신이었다. 식물이 ‘죽어서’ 땅속에 묻혀야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처럼 식물의 신은 살해당해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년 죽어서 지하세계로 내려갔다가 부활해서 지상에 봄을 가져다주는 탐무즈도 마찬가지였다.
르네 지라르는 살해당하는 신이 식물의 생명력과 계절의 변화를 상징한다는 프레이저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프레이저가 다루기는 했지만 ‘식물신’ 이론에 비해서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던 ‘희생양 의례’에 주목했다. 희생양 의례는 공동체의 죄악이나 재앙을 특정한 대상(인간, 동물)에게 옮겨서 추방 또는 살해하는 풍습을 말한다. 지라르는 신의 살해를 말하는 신화와 그 사건을 기념하는 의례가 태초에 ‘실제로’ 일어난 집단 살인을 은폐하고 미화시키는 문화적 장치라고 설명한다.
그는 인간 본성에 내재한 모방 성향 때문에 사람이 모여 살면 경쟁과 폭력으로 인한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누군가 그 책임을 지고 모든 구성원들의 집단 린치로 죽지 않으면 사회가 성립할 수 없다. 희생양은 그 공동체에서 가장 무력한 사람, 또는 가장 고귀한 사람 가운데에서 선택된다. 사실 남들과는 달라서 눈에 띄는 사람이라는 점 이외에 희생양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지만, 그를 죽임으로써 공동체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살해에 가담한 공범자들은 비로소 하나의 공동체로 단합된다. 현실의 희생양은 신화 속에서 죽어 마땅한 악마로 비난받거나 공동체를 구원한 영웅으로 기억된다.
오늘날의 좀 더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신화 연구에서 프레이저나 지라르의 이론은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신의 죽음에는 너무나 다양한 이유와 맥락이 있다. 식물신 이론이나 희생양 이론 같이 그런 모든 신화를 한 방에 매끄럽게 설명해주는 ‘만능열쇠’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죽음이라는 인상적인 이야기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의도치 않게 새로운 현대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프레이저와 지라르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신화는 한정되어 있지만,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작된 현대의 시와 소설들은 무수히 많다. 신화학은 과거의 신화를 설명해주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신화를 창출해내는 모태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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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훈(종교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