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아일리시가 펼치는 암울한 성장 드라마
성장 드라마의 끝이 완벽한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타성에 젖지 않는 젊은 성인은 언제든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 웃는 얼굴로 돌아올 것이다.
글ㆍ사진 이즘
2021.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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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혐오와 정신 건강에 대한 진솔한 탐구는 빌리를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10대로 만들었다. 소름 끼치는 상상에 기반한 첫 정규 앨범 는 청소년의 불안한 심리를 대변하며 단숨에 디지털 세대의 마음을 훔쳤고 그 파급력을 증명하듯 그래미 어워드 본상까지 쓸어 담았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는 또 다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어둠의 정체는 스스로를 옭아매던 '침대 밑의 괴물'이 아닌 '실존하는 낯선 이들'이다.

주변을 배회하는 스토커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또한 인터넷 너머 익명의 누군가는 빌리의 헐거운 옷차림에 대해 갖은 악평을 날렸다. 그는 2020년 투어에서 선보인 뮤직비디오이자 이번 음반에도 수록된 곡 'Not my responsibility'로 응답했다. 속옷만 남긴 채 깊은 늪에 빠져드는 퍼포먼스는 자신을 규정하려 하는 세상에 대해 '당신이 날 알아?'라며 일갈한다. 연이어 양산된 여러 평가와 잣대에 '과열(Overheated)'된 팝 스타는 정면돌파를 택한 것이다.

자전적 서사를 보다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 전체 구성을 간소화했다. 전작에서 의도적으로 높였던 저역대의 데시벨을 낮추고 잔잔한 사운드를 배치해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은은한 전자음이 깔리는 오프닝 'Getting older'는 작품 전반에 진지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서정적인 멜로디의 'My future'는 20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줄리 런던과 페기 리의 재즈를 공유하며 포근한 공기를 형성한다. 옛 거장의 영감을 빌려 마련한 순간은 낙관적인 메시지를 명확히 전하면서도 성숙도를 높인다.

물론 베이지색 앨범 커버처럼 음악이 포근하지만은 않다. 선공개 하지 않고 숨겨둔 비장의 무기들은 두터운 베이스를 활용해 익숙한 빌리를 소환한다. 사랑의 호르몬으로 주문을 거는 'Oxytocin'은 강렬한 비트 드롭을 통해 쾌락의 잠식을 시도하며 히트곡 'Bad guy'의 잔상을 이어간다. 다소 외설스러운 장면 직후의 'Goldwing'도 인상적이다. 힌두교의 한 구절을 노래한 찬송가는 둔탁한 드럼과 함께 잘게 쪼개지며 천사와 악마의 속삭임이 공존하는 고딕풍의 하모니를 선사한다.

유명인이란 이유로 참아야 했던 삶에 대한 불만은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보내는 마지막 안부 인사 로 절정에 달한다. 트라우마를 되뇌는 우쿨렐레의 독백만 들으면 덤덤히 넘어가는 듯하다. 그러나 일렉트릭 기타가 거칠게 질주하는 순간 작별을 고하는 대상은 전 연인에서 그동안 빌리를 괴롭혔던 모두로 확대된다. 떨림이 있지만 희망을 응축한 비명을 통해 묵혔던 감정을 시원하게 해소한다.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완성한 카타르시스는 내면의 불안을 음악으로 도출하는 빌리의 목소리와 친오빠 피니어스의 감각적인 프로듀싱 역량을 다시 한번 돋보이게 한다.

한순간에 쌓아 올린 명성과 그에 뒤따르는 희생을 언급한 것이 빌리가 처음은 아니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시대를 노래하는 팝 그 자체다. 어른들도 기겁할 만한 상상을 펼쳤던 소녀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예술가의 암울한 현실을 투영한다. 성장 드라마의 끝이 완벽한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타성에 젖지 않는 젊은 성인은 언제든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 웃는 얼굴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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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