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5월 대상 - 삐끗, 발길을 조금만 틀면
여행이 될 수 있다면 나의 일상을 계속 여행하고 싶다. 걸음이 이끄는 대로 오늘을 다녀보고 싶다. 삐끗, 발길을 조금만 틀면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으며.
글ㆍ사진 제갈명 (나도, 에세이스트)
202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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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왜 좋아?"

"거기선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으니까. 사람들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달까."

친구 수현은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수현의 영어 실력과 폭넓은 문화 경험을 남몰래 질투하기도 했다. 수현은 세련된 식당에서 생소한 메뉴를 원어민 발음으로 주문하곤 했다. 수현에게 이 세상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막힘없고 자유로워 보였다. 그런 수현의 대답치고는 어딘가 어색했다. 그 말을 반대로 바꿔보면 지금 수현은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며 산다는 것이니까.

"너 없이 심심해서 어떻게 해"

"거기가 좋아서 떠나는 것만은 아니야. 여기서 답을 찾았으면 안 갔을 거야."

연인처럼 매일 붙어 다니던 입사 동기 소정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에게 다른 꿈이 있어서 떠나는 줄 알았다. 더 큰 세상에서 더 멋진 사람이 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뜻밖에도 소정은 이곳에서는 더는 안 되겠더라는 말을 남겼다.

정말 지금 여기서는 찾을 수 없는 무언가가 그곳에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계절마다 여행을 가는 수현, 외국에서 살기로 결정한 소정을 따라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휴양지 관광지 가리지 않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회사원으로서 다니는 여행은 소비 활동에 가까웠지만 즐거웠다. 평소에는 상상도 못 하는 속이 파진 원피스를 입고 처음 보는 음식들을 먹었다. 하루 종일 사진을 찍고 그 지역에만 있다는 물건들을 샀다. 여행이 끝나면 사진들을 정리했고, 정리가 끝날 때쯤 다음 여행 계획을 세웠다. 나쁘지 않은 일상이었다. 그날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햇볕이 따뜻한 가을. 오후 반차를 내고 카페 거리를 산책했다. 햇살이 좋으면 마음이 흔들린다. 반짝이는 오후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데 뭐 얼마나 더 행복해지려고 아등바등 사나 싶다. 잘못 떨어뜨린 공이 데구르르 굴러가듯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녔다. 한참을 걷다가 주택을 개조한 소담한 책방이 눈에 들어왔다. 


<독서모임 멤버 모집>

포스터를 보고 책방 주인에게 물었다. "독서 모임... 아직 자리 있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날 오후의 기분이 독서모임 가입까지 하게 만들었다. 며칠 후, 밤에 보니 분위기가 더 좋은 책방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했다. 초콜릿을 섞은 위스키도 한 잔 마시고 분위기에 취해 평소 같지 않게 적극적으로 말하고 들었다. 서로의 생각에 온전히 집중하는 대화가 얼마만인지, 반가워서 옆사람을 꼭 안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거였구나. 수현과 소정이 찾아 떠난 거기의 일상.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때 물속을 유영하듯 자유로운 기분이 드는지 알아가는 일상. 그것은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 위에서 삐끗, 발길을 조금만 틀어도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선로를 이탈하지 않아도 이곳을 벗어나지 않아도 다르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익숙한 곳에서 한 발짝만 옮기면 처음 보는 사람, 낯선 풍경, 미처 읽지 못한 책, 이마가 찡하게 차갑고 멋진 위스키가 있으니까.

지금 있는 곳과 원하던 곳이 다르면 사람들은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 간극이 크면 클수록 지금 여기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나도 여지없이 그랬다. 나에게 없는 네이티브 아우라를 뿜어내는 수현이 부러웠다. 노력해도 가질 수 없었던 영어 실력과 애티튜드 앞에서 작아졌다. 당차게 문을 박차고 나선 소정은 너무 대단하게 느껴져서 부럽지도 않았다. 저 정도의 결심은 노력할 엄두조차 나지 않으니까. 그런 그들이 찾지 못한 오늘의 즐거움을 발견했을 때 얄밉게도 기분이 좋았다. 원하는 곳을 못 가도 지금 있는 곳에서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떴다.

그것도 여행이 될 수 있다면 나의 일상을 계속 여행하고 싶다. 걸음이 이끄는 대로 오늘을 다녀보고 싶다. 삐끗, 발길을 조금만 틀면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으며.


제갈명 일상을 단단하게 쌓아올리는 마음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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