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 흑백 세상에서 사제가 되고 벗이 되다
“위대한 인물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옆에 그 못지않게 위대한 인물이 있다.”라고 전한 이준익의 말에는 세상 사는 이치가 담겨 있다.
글ㆍ사진 허남웅(영화평론가)
202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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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1814년에 완성된 ‘자산어보’는 흑산도 연해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해양 생물 등의 명칭, 형태, 분포, 실태 등을 기록한 서적이다. 그림 없이 해설로만 이뤄진 이 서적에는 수산물에 관한 지식 차원의 자료뿐 아니라 어류의 특징을 활용한 요리법과 주민들의 생활상까지 실용적인 정보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이를 집필한 이는 공식적으로 정약전이다. 

정약전(설경구)은 조선의 유교 사상에 반한다는 이유로 천주교도가 탄압당한 순조 1년(1801)의 신유박해 때 흑산도로 유배 왔다. 가부장적 질서를 거부하고, 그래서 지배 체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둘째 정약종(최원영)은 사형에, 셋째 정약용(류승룡)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다. 정약전의 삼 형제는 더는 자신들의 뜻과 종교적 신념을 세상에 펼쳐 보이기 힘들어 보였다. 

아니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한양에서 접하지 못한 홍어 맛에 반했고, 명칭만큼이나 생김새도 희한한 짱뚱어가 신기했다. 흑산도의 바다에서 접하는 생물체의 모든 걸 알고 싶었다. 창대(변요한)는 스물이 조금 넘은 청년이지만, 바다 생물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다만, 고지식한 데가 있어 유교에 기반한 나라 질서를 어지럽힌 정약전을 사학죄인이라 칭하며 그의 도움을 거절한다. 

정치적 이념, 종교적 신념 등 여러 가지 기준으로 선을 그어 나와 너를,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행태는 시대를 막론해왔다. 이준익 감독이 <황산벌>(2003) <동주> <사도>(이상 2015) 등 시대극에 주목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지금 이 시대에 목격하는 갈등의 양상이 과거에서부터 반복되는 것이어서 그에서 얻을 수 있는 역사의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정약전과 창대를 내세워 <자산어보>를 연출한 이유에 대해 이준익은 이렇게 말한다. “이질적인 관계가 동질화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벗이 될 수밖에 없는 관계에 큰 인상을 받았다.” 

정 씨 삼 형제 중 가장 유명한 건 다산(茶山) 정약용이다. 이동과 건설이 수월한 배다리와 거중기를 만들었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저술에 힘을 쏟았다. 그와 다르게 좀 더 민중의 삶에 천착했던 정약전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기록하고 알리는 데 더 주력했다. 그중 하나가 ‘자산어보’이었다. 정약전의 저술 작업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창대의 도움 없이는 집필을 시작할 수도, 완성할 수도 없었다. 

사대부 집안의 학자라고 해도 정약전은 신분 여하로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성리학을 고수하는 양반들과 다르게 바다 건너에서 들어온 학문이나 종교라고 해도 사람 사는 세상에 도움 되는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데도 거부감이 없었다. 성리학 사상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도움을 거절한 창대의 반응이 씁쓸해도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기에 거래의 방식으로 제안을 우회한다.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어부 일 틈틈이 글공부하는 창대가 어려움을 겪자 정약전은 글 스승을 자처하고 해양 생물에 대해서는 창대의 제자가 되기로 한다. 


영화 <자산어보> 공식 포스터

이준익은 역사적 사건에 반응하는 인물에 주목해 그의 대응을 현시대와 호흡하는 메시지로 삼는다. “위대한 인물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옆에 그 못지않게 위대한 인물이 있다.”라고 전한 이준익의 말에는 세상 사는 이치가 담겨 있다. 정약전과 창대가 그들 사이의 높은 갈등의 파고를 넘어 서로의 스승이고 제자이자 벗이 되는 관계를 통해 어떤 삶의 지표를 가지고 관계 맺음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현시대의 사람들에게 성찰적으로 제시한다. 이것이 이준익이 역사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대신 미시적으로 접근하여 개인에 집중하는 이유다.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는 <자산어보>는 흑백으로 영상을 묘사한다. 사물 공부에 호기심을 갖는 정약전과 창대의 행보에 관객의 시선을 모은다. 또 다른 의도도 있다. 두 개의 색만 존재하는 흑백은 이분화된 세상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시선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의 인식을 깨려는 <자산어보>는 양반과 평민으로 구별되는 정약전과 창대가 서로 손을 잡음으로써 개별의 정체성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결말로 나아간다. 그에 맞춰 컬러로 변화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색, 즉 다양성으로 관객의 시선을 확장하려는 영화의 의도가 압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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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