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음악원에서 쫓겨난 에릭 사티(1866-1925)의 마지막 성적표에는 ‘음악원에서 가장 게으른 학생’이라고 적혔습니다. 재능은 있으나 훈련되지 못한, 아니, 훈련이 불가능한 영혼을 가진 사티는 음악원을 나와 자신의 음악을 펼칠 만한 다른 곳을 찾아 평생을 떠돌았습니다. 사티의 삶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열세 살에 파리 국립 음악원에 입학했다가 2년 반 만에 쫓겨났고, 열아홉 살에 다시 음악원에 입학했지만 역시나 선생들에게 인정 못 받고 음악원을 그만둔 후, 보병으로 자원입대, 들어간 지 몇 주 안 되어 군대가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차가운 밤바람에 맨가슴을 노출해 폐울혈에 걸려 소집 해제, 기독교적 신비주의 비밀결사 단체였던 장미 십자회의 비공식 교회음악 감독으로 예식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다가 스스로 <안내자-예수의 도시 예술 교회(‘안내자-예수’는 Jesus-Christ에서 Christ대신 안내자Conducteur를 써서 비튼 이름)>를 창시하고 교주와 회계를 겸임한 유일한 신도가 되었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해체, 사회주의자였다가 사회주의 정치가, 장 조레스가 암살된 것에 분노해 공산주의자가 되어 코민테른에 가입, 죽기 직전 자신을 보러 온 신부에게 두 번이나 영성체를 해달라고 주문하고 가톨릭 신자로 생을 마감.
삶 전체가 모순이었습니다. 죽어가던 사티를 찾은 빈자(貧者)들의 성자, 라미 신부는 그를 떠나기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티는 마음이 올곧은, 정직한 사람입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티의 인생에서 그의 영혼을 꿰뚫어 본 사람은 라미 신부가 유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악원에서 쫓겨난 후, 사티가 다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 곳은 파리, 몽마르트에 위치한 카바레 ‘검은 고양이(르 샤 누아르)’였습니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낭만주의가 끝을 향하던 파리에서는 가벼운 카바레 음악이 유행했습니다. 간단한 선술집이나 카페-레스토랑을 뜻하는 카바레는 당대의 지식인, 젊은 예술가, 자칭 보헤미안들이 모여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낭송하는 사적인 문화 공간이었습니다. 그중 하나였던 ‘검은 고양이’에 처음 갔을 때, 사티는 자신을 ‘짐노페디스트’라고 소개했습니다.
‘짐노페디’는 고대 스파르타에서 젊은이(혹은 어린이)들이 나체로 무기 없이 추던 춤을 뜻합니다. 플라톤의 «법률»에 따르면 ‘짐노페디’를 추던 축제는 한 여름에 진행되어 폭염을 견디며 아폴론에게 경배를 드리는 일종의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환희와 고통이 공존하는 축제, 폴리스 중에서도 가장 엄격하고 금욕주의가 강했던 스파르타는 사티가 평생 추구했던 음악 세계와 멀지 않았습니다. 19세기 말, 프랑스 예술가 중에는 고대 그리스와 같은 먼 나라를 동경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물질주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완전히 다른 풍경이 전해주는 정취를 통해 자신이 사는 시대를 비판하고, 벗어나고 싶어 했죠. 금욕적 세상에서 나체로 춤추는 전사를 꿈꾸는 음악가, 사티가 자신을 소개한 단어, ‘짐노페디스트’는 ‘검은 고양이’에 있던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인물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그가 «세 곡의 짐노페디»를 작곡한 때는 1888년이었습니다. 친구였던 시인, JP 콩타민 드 라투르의 시, «고예술품, Les Antiques»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작품이었죠.
사선으로 예리하게 그림자를 자르며, 눈부신 급류가
윤이 나는 대리석 위를 황금 물결로 굽이치는 곳,
불타는 호박(보석) 속 반짝이는 티끌이
짐노페디에 사라방드를 섞어 춤을 추는 그곳.
바로크 시대 무용곡인 사라방드는 두 번째 박에 힘이 실리는, 3박자로 된 느린 춤곡입니다. 사티는 사라방드 특성을 따라 «세 곡의 짐노페디»를 작곡했습니다. 우울한 꿈처럼 고요하고, 신비롭고, 기화할 듯 가볍고 차분한 작품이죠. 일상에서 배경음악으로 틀어 두어도 무리가 없는, 있어도 없는 듯한 가구와 비슷하다 해서 ‘가구 음악(Musique d’ameublement)’이라고 불리는 장르를 시작할 정도로 독특한 음악이었습니다.
원초적이고 간결한 선과 색, 근대 사회와 문화 통념을 옷과 함께 벗어 버린 앙리 마티스의 «춤»은 사티가 상상했던 ‘짐노페디’와도 닮았습니다. 마티스는 생전에 «나는 균형 잡힌, 순수하고 고요한 예술을 꿈꾼다. 걱정, 근심 없고, 사업가도 예술가도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는 예술, 마음을 진정시키고, 두뇌를 쉬게 하는 육체적 피곤함을 풀어주는 좋은 소파 같은 예술»을 원한다고 말하곤 했거든요.
«세곡의 짐노페디»를 그냥 들으면 잔잔한 배경음악 같습니다. 편안한 소파에 앉은 것처럼 긴장이 풀립니다. 하지만, 편안함이 전부는 아닙니다. 간결하고, 깊고, 추상적이죠. 전통적 화성법을 거스르기 때문에 진행을 예상할 수 없고, 그 어떤 조성이나 구조로도 명확하게 장르를 정의할 수 없는, 견고한 조성 음악세계를 슬며시 벗어나는 조용한 혁명과도 같은 음악입니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작곡가인 라인버트 드 레우(Reinbert de Leeuw, 1938-2020)는 이 음악을 그저 아름다운 배경음악처럼 흘려보내듯 연주하지 않습니다.
I. 느리고 고통스럽게 Lent et douloureux 바로가기
II. 느리고 슬프게 Lent et triste 바로가기
III. 느리고 심각하게 Lent et grave 바로가기
비슷하게 느껴지는 세 곡은 제목처럼 섬세하게 서로 다른 느림(렌토)을 표현합니다. 레우는 «짐노페디»를 듣기 좋은 3박자의 춤곡으로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작곡가가 원했을, 미묘하게 색이 다른 느림을 찾아 금욕적이고 엄격한 리듬과 관능적인 선율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합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울림과 약음페달로 만든 먹먹한 색채는 마치 전장에 나가기 전 춤으로 날을 세우는 스파르타 전사의 숨 막히는 긴장감처럼, 우리의 심장을 꽉 쥐고 마지막까지 놓지 않습니다.
짧은 청소년기 이후, 나는 그럭저럭 평범한, 그 이상은 아닌, 젊은이가 되었다.
그때쯤, 작곡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슬픈 생각이었다!... 너무나 슬픈 생각!
실제로 나는 타인의 심기를 거스를 정도로 독특하고, 목적을 비켜난,
프랑스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은 작곡법을 거침없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삶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나만의 공간으로 숨어들어 상아탑, 혹은 철탑에서 며칠을 보내곤 했다.
인간혐오 성향, 심기증(건강염려증)이 생겼다. 사람들 중에 내가 가장 (심하게) 우울했다.
거의 앞을 볼 수 없었다 – 도수를 맞춘 안경이 있어도. 그랬다.
모두 음악 때문이었다. 음악 예술은 내게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을 더 많이 가져왔다.
수준 높은, 너무나 존경할 만한 특별한 사람들, 아주 « 훌륭한 » 사람들 사이에 나를 섞어 놓았다.
지나가자. 다시 말할 날이 있겠지.
에릭 사티, 낙서장 Les Feuilles libres, n° 35, 1월-2월 1924년
사티는 1899년에서 1911년까지, ‘검은 고양이’ 카바레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수많은 예술가(디아길레프, 말라르메, 콕토, 피카소, 뒤샹 등)를 만나 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음악 세계로 향하는 문을 조심스레 열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음악적 인상주의나 바그너 주의 같은 주류에서 튕겨 나온 사티, 하지만 다가올 미래를 먹여 살릴 다양한 미학 흐름이 교차하는 ‘검은 고양이’ 카바레에서 존재에 관한 끝없는 물음표를 던지며 자리를 잡았습니다. 가난한 피아니스트, 영원한 짐노페디스트로 말이죠.
추천 음반
라인버트 드 레우, «Satie, The early piano works including the three gymnopédies», Universal/Decca 2000
안느 케펠렉, «Eric Satie: 3 Gymnopedies, 6 Gnossiennes», Warner Classics / Erato,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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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혜
음악 선생. 한국, 미국, 프랑스에서 피아노, 오르간, 하프시코드, 반주, 음악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의 렌느 2대학, 렌느 시립 음악원에 재직 중이다. 음악 에세이 『음악의 언어』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