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의 하비상 수상 소식이 날아들자 『풀』은 ‘또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야?’에서 한국 그래픽노블의 이상적 현재가 됐다. 김금숙은 말한다. “반복적으로 말을 걸어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러면 저에게 절실함이 돼요. 이야기하지 않고는 다음 이야기로 건너갈 수 없어요.”
『풀』을 빼고 김금숙을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됐어요.
한편으로는 수상 소식들마다 ‘위안부’라는 소재에만 집중하는 게 아쉬웠어요. 마치 소재의 특이성이 수상 이유라는 듯이. 제가 생각하는 『풀』은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예요. 암울한 시대에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살아가면서 무수하고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살아 있기에 새로운 관계를 맺고 또 오늘을 살죠. 그걸 이옥선이라는 여성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번 수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흥미 위주로만 여겨지는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의 위상을 한 단계 격상시키는 데 기여한 것 같아 기쁘다.” 신문에 실린 수상 소감이에요. 덜 정제된 소감을 듣고 싶은데요. 어떠셨어요? ‘만화계의 오스카상’을 수상하신 기분이.
우선 하비상이 ‘만화계의 오스카상’인지 처음 알았고요, 하하. 그때 한 말은 제 솔직한 심정이기도 해요. 우리나라가 아직은 자기 세계를 명확히 구축한 그래픽노블 작가들에게 인색한 편이죠. 그런 작품들이 더 많은 독자를 만났으면 해요.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생겨난 장르잖아요. 사실 예전에는 그래픽노블이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기회가 닿으면 굳이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에 대해 말해요.
『풀』은 이미 출간을 마친 판본을 포함해 14개 나라와 계약했어요. 수상에 기여한 미국판 표지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철창 안에 갇힌 소녀들의 뒷모습인데, 쓸쓸하면서도 평화로워요.
제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거죠.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드셨지만 그분들 마음은 여전히 철창 안에 있어요. 드론 앤드 쿼털리가 제 그림에 채색을 더해 나온 결과물이에요. 1년에 몇 권 안 내놓는 출판사인데, 작품 선택과 편집에 정성을 많이 쏟아요. 번역도 굉장히 중요해요. 재닛 홍 선생님이 문학을 전공하셨어요. 온전한 영어 그래픽노블이 되기까지 큰 역할을 하셨죠.
『풀』도 『기다림』도 그 밖의 다른 작품들도 진입 장벽이 높은 이야기예요. 해외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독자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요. 『풀』을 예로 들면, 일제에 대한 미움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을 최대한 배제했거든요. ‘삶’에 집중하기 위해서요. 그걸 귀신처럼 알아요. 우리는 『기다림』에 덧붙은 ‘이산가족 이야기’라는 틀에 갇히지만, 해외 독자들은 오히려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바로 알아채고 감동을 느껴요.
상처와 폭력은 현재 진행형이니까요.
상처에 관심이 많아요. 행복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상처라는 주제는 김금숙의 주요작들이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를 살아간 여성의 삶을 말하는 것과 관련이 있겠죠? 제주 4·3항쟁을 다룬 『지슬』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은 여성이 만들어가요. 죽음의 순간에도 아들에게 줄 지슬(감자)을 움켜쥔 어머니, 죽음을 앞두고 동굴에서 홀로 아이를 출산하는 여성….
제가 한국이라는 독특한 현대사를 거친 나라에서 태어났잖아요. 저는 제 어머니에게서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어요. 어머니가 이옥선 할머니와 같은 세대예요. 그리고 언니들의 삶을 지켜보며 자랐고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원하지 않아도 어느새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작년에 서해문집에서 나온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의 원작은 남성 작가가 썼어요. 김금숙 작가는 이 여성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볼지 궁금해하며 읽었습니다.
예리하십니다! 원작을 읽고 또 정철운 작가와 인터뷰를 하면서 떠오른 질문들은 이런 거였어요. ‘이 여성은 두 아이를 두고 어떻게 혁명전선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 김알렉산드라가 죽을 당시 고작 서른세 살이었어요. 참 대단하죠? 러시아에서는 영웅으로 불렸어요. 저만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영웅적으로 내닫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했어요. 그러면 우리와 너무 먼 이야기 같잖아요.
상대적으로 그림에 대해 말하는 이는 적어요. 김금숙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역시 흑과 백뿐인 먹그림이겠죠?
먹그림을 고수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저는 제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림으로 할 뿐이죠. 둘째는 빛과 그림자만 있는 그림이 제 이야기들과 잘 맞아요. 마지막 이유는 초심인데요. 파리에 살던 시절, 창작은 하고 싶은데 재료 살 돈이 없어 만화를 시작했거든요. 그때 먹은 마음이 ‘최소한의 삶의 도구로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하겠다’였어요. 그 마음이 지금도 이어지는 거죠.
칸을 따라 읽다가 예고 없이 등장하는 강렬한 그림에 마음이 흔들려요.
이 그림이 이 사람이구나 싶었어요. 붓이 기본 도구지만 자연에서 얻은 도구도 즐겨 사용해요. 지나가다 주운 나뭇가지를 깎아서도 쓰고 분질러서도 쓰죠. 『풀』에 자주 등장하는 숲, 할머니의 흔들리는 모습들은 그런 도구로 그렸어요. 저는 작가의 제스처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먹물을 붓고 붓을 빨고 작품을 시작할 때는 두꺼웠던 붓이 가늘어지고. 그런 과정이 그림에 담기는 거죠. 그런 게 좋아요.
『풀』 (김금숙 지음 | 보리)
“만화로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문득 칸이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그럴 때면 지면 전체를 채우는 그림을 그리죠. 마음을 따라간 건데 특징이 됐어요.”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김금숙 지음 | 서해문집)
“캐릭터를 만들었을 때, 왜 주근깨가 있냐고,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나는 그녀가 평생 노동자의 딸임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마지막까지 노동자들의 혁명가였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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