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장식하는 음악, 생각의 틈을 파고드는 오페라 – 생상의 «삼손과 들릴라(1877)»
그런데도 우리는 오페라에 등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글ㆍ사진 송은혜
202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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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과 들릴라(1615)», 헤라트 반 혼토로스트

삼손과 들릴라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사랑과 전쟁 양극단을 오가는 대표적인 연인입니다. 이들의 관능적인 사랑과 배신 이야기는 민족주의, 전쟁과 같은 인류 공통의 서사에 섞여서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매력적인 소재가 되었습니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의 노여움을 산 이스라엘을 필리스틴(현 팔레스타인 지역 민족)이 침략해 40년간 지배합니다. 필리스틴의 압제하에 오랜 시간 고통당하던 이스라엘에 삼손이라는 영웅이 등장합니다. 무기력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새 영웅의 힘에 고무되어 필리스틴에 맞서기 시작합니다. 곤란해진 필리스틴 지도부는 들릴라라는 여인을 이용해 삼손을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 삼손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 들릴라는 그를 유혹해 머리카락에 힘이 있다는 비밀을 알아내고 결국 삼손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힘을 잃은 삼손은 포로로 잡혀 온갖 모욕을 당합니다. 필리스틴의 신전에 묶여 있던 그는 신께 회개하고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힘을 줄 것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회복한 힘으로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려 이스라엘 신을 모독하던 수많은 필리스틴인을 처단합니다.

생상(1835-1921)은 오래된 자료 속에서 장 필립 라모(1683-1764)와 볼테르(1694-1778)가 작업한 서정 비극(프랑스 바로크 오페라), «삼손»을 발견하고는 그동안 손대지 않았던 오페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작업을 시작한 후 완성하기까지 생상에게는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기반이 없는 생상을 믿고 오페라를 완성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프랑스 음악계에는 쉽고, 가벼운 오펜바흐의 코믹-오페라(오페라 부파)가 유행 중이었기 때문에 생상이 구상하는 성경 줄거리의 오페라는 인기를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막 시작한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의 전쟁으로 음악 시장은 더욱 냉랭한 상태였습니다. 잇따른 거절로 의기소침해진 생상이 작곡을 거의 포기할 무렵, 리스트를 만나게 됩니다. 리스트는 생상의 오페라를 단 한 소절도 듣지 않고 이렇게 말했죠.  

«어떤 작품인지 들을 필요 없습니다. 그저 당신의 작품을 마무리해요. 내가 무대에 올리겠습니다.»

리스트가 보여준 단단한 신뢰 덕에 생상은 «삼손과 들릴라»를 마쳤고 1877년 바이마르에서 첫 공연을 올렸습니다. 현재는 프랑스 오페라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품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대표적 오페라가 되었답니다.     

오페라는 극과 음악이 만나는 종합예술 장르입니다. 관현악과 합창, 여러 명의 독창자, 무대, 의상, 때에 따라서는 발레도 추가됩니다. 들을 것도 볼 것도 많은 장르가 바로 오페라이죠. 하지만, 길고 복잡한 까닭에 첫눈에 줄거리를 모두 파악하고 즐기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외국어로 된 가사는 감상자가 쉽게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부담스러운 요소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감각을 다양하고 화려한 방법으로 자극하는 오페라를 포기할 수는 없지요. 감상하기 전, 줄거리를 미리 파악하고 몇 가지 관전 포인트를 기억하는 등, 마음의 준비를 해 두면 작품을 이해하고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오페라에 한발 다가서는 방법이지요. 


언스플래쉬

«삼손과 들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리 기억해 두면 좋을 만한 네 장면을 소개합니다.


1.절망과 원망이 교차하는 합창 «신이여, 이스라엘의 신이여 ! Dieu, Dieu d’Israel » 듣기

«신이여, 이스라엘의 신이여!»는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느끼는 절망과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 신을 향해 쏟아내는 원망이 교차하는 합창곡입니다. 40년간 지속한 노예 생활로 굳어버린 절망을 합창할 때 어떤 색채로 표현하는지,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신을 향한 원망과 분노를 대위법(각 성부가 같은 주제 선율을 반복하는 기법)으로 노래할 때는 어떤 느낌을 주는지 자세히 들어 보세요. 생상이 가사를 넘어 표현하고 싶었던 군중의 심리 상태가 읽힐 겁니다.

2. 기쁘지 않은 «기쁨의 노래 Hymn de joie» 듣기

새롭게 등장한 영웅, 삼손은 무기력한 이스라엘 민족을 설득해 신을 다시 기억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필리스틴에 맞서기 시작했고, 약간의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피 묻은 승리였죠. 수많은 여인이 유린당했고, 아이와 노인이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잠들어 있던 용기가 조금씩 되살아나고, 신을 향한 신뢰가 회복되기 시작한 이스라엘을 기뻐하는 노래가 노인의 합창, «기쁨의 노래»입니다. 그레고리안 성가와 닮은 단선율 합창은 기쁨을 노래하는 제목과 달리 느리고 어둡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희생하며 얻은 불안정한 승리에 환호하며 기뻐하기보다 이스라엘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변화를 묵묵히 관조하듯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승리를 해석하는 생상만의 독특한 관점이 빛나는 곳이죠.

3.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들릴라의 치명적인 유혹 «당신의 음성에 나의 마음이 열리네 Mon cœur s’ouvre à ta voix» 듣기

수많은 오페라 아리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중창으로 꼽히는 들릴라와 삼손의 아리아입니다. 들릴라는 이스라엘의 정신을 깨우는 삼손을 제거하기 위해 필리스틴에서 파견한 일종의 스파이였습니다. 삼손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완전히 들릴라를 믿도록 만들어야 했어요. 완벽한 믿음에는 사랑만 한 것이 없죠. 들릴라가 삼손을 유혹하며 노래한 가사입니다. 

나의 마음이 당신의 음성에 열리네

석양의 입맞춤에 꽃이 피어나듯 !

하지만, 오 나의 사랑, 나의 눈물을 거두는 

당신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려요 !

말해주세요, 반드시 들릴라에게 돌아온다고 !

다시 말해주세요, 달콤하게 속삭였던 이전의 맹세를,

다시 없을 그 맹세를 !

아 ! 나의 사랑에 대답해 주세요, 

내게 부어 주세요, 당신의 취한 사랑을.  

신이 내린 임무와 여인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 삼손을 흔들어 유혹하는 들릴라의 노래를 실제로 들어 본 사람은 없습니다. 마치, 오르페우스의 연주를 들어 본 사람이 없고, 뱃사공을 죽음으로 유혹하는 세이렌의 노랫가락이 악보로 전해지지 않는 것처럼요. 생상은 상상 속 완벽한 사랑의 아리아를 재현해 냈습니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사랑의 노래를요. 우아하고, 절절한 들릴라의 노래와 숨결은 지금 들어도 누구나 사랑에 빠질 정도로, 아니 삼손이 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사랑을 따라 가버린 것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아리아의 마지막에 삼손은 결국 들릴라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그의 품으로 무너져 내리지요. 

4. 적들의 축제, «바카날 Bacchanale» 

관현악 연주(베를린 필하모닉 연주, 두다멜 지휘) 듣기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1983) 듣기

들릴라는 삼손을 유혹한 후 힘의 원천이었던 머리카락을 자르는 데 성공합니다. 힘을 빼앗긴 삼손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포로로 잡히고, 삼손은 두 눈을 뽑혀 필리스틴인에게 온갖 모욕과 수모를 당합니다. 승리에 취한 적들의 축제를 묘사하는 데 쓰인 관현악곡이 바로 ‘바카날’입니다. 바카날은 원래 술과 취함을 상징하는 바쿠스신 혹은 디오니소스를 위한 축제를 뜻합니다. 술에 취해 떠들썩하고 음탕한, 혼란스럽고 화려한 축제인 바카날은 오페라에 포함되는 전형적인 관현악 디베르티스망(유흥 음악)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마치, 액션 영화에 반드시 한 번쯤은 등장하는 전투 장면처럼요. «삼손과 들릴라»에 나오는 바카날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언스플래쉬

생상은 이국적인 느낌이 가득한 선율과 리듬을 사용해 독특한 색채를 풍기는 바카날을 완성했습니다. 1장에서 승리를 노래한 이스라엘 노인들이 불렀던 경건한 « 기쁨의 노래 »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분위기로 적군의 승리를 그려낸 것이죠. 곧 다가올 종말은 예상하지 못하고 기쁨에 취해 흥청거리는 축제, 생상의 바카날은 듣고 있는 우리 또한 축제의 한 가운데로 끌어들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에 취해 더는 방관자로 그저 구경하지 못하도록 말이죠. 적들의 축제임을 잊어버릴 정도로요. 

오페라를 감상하다 보면 항상 어딘가 모르게 불편합니다. 연출과 무대가 완벽하다 해도 노래를 충분히 표현해야 하는 성악가의 연기는 전문 연기자의 그것과는 다르게 어색해 보이고, 줄거리를 전개하기에는 클래식 음악이 너무나 진지하고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페라에 등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위대한 작곡가가 천재성을 끌어모아 최선을 다해 만들어 낸, 음악 자체로 완성된 세계가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이지요. 줄거리를 보조하기 위해 음악이 작곡된 것이 아니라, 음악을 표현하기 위해 이야기가 더해진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감정이 작곡가가 색채를 더해 해석해 낸 음악으로 승화해 표현되면서 오페라의 줄거리는 더욱 강력한 힘을 얻게 됩니다.

텍스트 사이로 파고들며 틈을 내는 음악의 힘 덕에 우리는 복잡다단한 인간의 마음을 충분히 상상하고 느낄 시간을 얻습니다. 뻔한 이야기에 나의 감정이 섞이는 그 순간, 이야기는 나만의 특별한 이야기로 변신합니다. 들려 오는 음악에 심장이 먼저 공명(共鳴)해 나도 모르게 등장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신비한 경험, 오페라의 마법에 한 번 빠져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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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혜

음악 선생. 한국, 미국, 프랑스에서 피아노, 오르간, 하프시코드, 반주, 음악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의 렌느 2대학, 렌느 시립 음악원에 재직 중이다. 음악 에세이 『음악의 언어』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