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사회학』과 『사회학적 파상력』으로 동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사회학의 시선으로 섬세히 들여다보며 그 풍경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온 김홍중의 첫 산문집 『은둔기계』가 출간됐다. 지금까지 그의 책들이 주로 학술적 글쓰기와 논리정연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이번 책은 문학적인 단상 형식으로 생각을 자유로이 풀어내어 한결 편히 읽을 수 있다. 한때 시인이기도 했던 저자의 생동감 있는 문체가 좀더 잘 드러났다. ‘단상’은 널리 쓰이는 글쓰기의 방법이지만, 막상 그중에 적절한 무게감을 갖춘 동시에 읽는 이의 흥미를 유발하는 글은 쉬이 찾기 힘들다. 그것은 단상이 자유로운 방식의 글쓰기인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독특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의 글쓰기 방식과 묘하게 닮았다. 짧고 끊김이 많은 글,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서 충분히 기능하며 활짝 열려 있는 글. 동시에 널리 퍼지기 쉬운 글. 『은둔기계』는 부러 그런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짧은 호흡의 문장들임에도 그 안에 담긴 의미가 깊이 있어 독자의 눈길을 자주 한곳에 묶어놓는다.
『은둔기계』는 어떤 책인가요?
그간 모아온 생각의 단편들을 묶어 펴낸 산문집입니다. 책에 제시된 문장들을 단상(斷想) 혹은 단장(斷章)이라고 합니다. 프래그먼트(fragment)나 아포리즘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 단상을 좋아했어요. 발레리, 시몬 베유, 롤랑 바르트, 이성복, 이런 분들의 글…… 단상은 짧고, 단순하고, 불완전해요. 제가 보기에, 단상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생산되는 ‘상황’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가령, 단상은 시간의 결핍 속에서 급박하고 절실하게 전해지는 말입니다. 상상해보세요. 여러분이 누군가와 지금 막 헤어져야 해요. 누군가를 비행기에 태워 어디론가 떠나보내고 있어요.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날 수가 없어요. 영영 이별이에요. 그때 과연 무슨 말을 해주시겠어요? 가장 중요한 말, 가장 절실한 말, 지금 하지 않으면 못하는 그런 말을 하겠지요? 거창한 말이 아니라 그냥 소박하지만 구체적인 말, 혹은 침묵. 이것이 단상이에요. 뼈만 남은 말.
이 책을 어떤 계기로 구상하고 쓰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단상 형태로 생각을 적어 모아둔 노트가 좀 있었어요. 책으로 낼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년 전쯤에 문학동네의 이경록 편집자가 산문집을 제안했어요. 수락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저에게 단상 메모 묶음이 있지 뭐예요. 그것을 꺼내 읽어보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작업이 축적되어 가는 과정에서, 저는 어떤 형상(figure)이 제 글 속에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것은 저 자신의 얼굴이기도 했고, 우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기도 했고, 동물이나 식물 같은 비인간 생명체의 모습이기도 했어요. 숨고, 도망치고, 견디면서도 기계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작동시켜가는 존재들. 아주 우연히 하나의 단어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은둔기계! 그래, 은둔기계! 21세기 지금, 우리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도 아니고, 프로이트의 ‘무의식’도 아니고,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도 아닌, 은둔기계가 아닌가? 거리와 간격을 만들면서, 은신처를 찾아 움직이면서 일하고, 사랑하고, 창조하고, 미지의 가능성을 탐색해가는 생명체, 그것이 은둔기계가 아닌가? 이 책은 은둔기계들에 대한 저의 ‘리스펙트’, 애정, 연대감을 품고 있습니다. 책을 쓰면서, 저 자신이 하나의 은둔기계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와 동시에 세상의 은둔기계들에게 잘 버티자고, 외롭지 않게 삶을 살아내자고 말을 건네기도 했던 것이죠.
은둔은 고상하고 귀족적인, 혹은 수동적인 삶의 태도가 아닌가요?
맞습니다. 은둔이라는 단어에는 그런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귀족이나 선비가 고고하게 청산(靑山)으로 물러나 사는 것, 혹은 종교적 수행이나 고행 같은 것. 그런데 데리다처럼 말하자면, 저는 은둔의 이런 전통적 이미지를 해체(deconstruct)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것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재조립해서, 거기 내재하고 있는 어떤 창조적 요소를 되살려내고 싶었어요. 제가 주목한 것은,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것과 단호하게 거리를 두고 단절할 수 있는, 평범하고 겁 많은 존재들의 용기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초(超)-연결시대를 살고 있어요. 숨을 곳이 없어요. 숨 막히는 네트워크 과잉의 시대입니다. 20세기 자본주의는 미친 듯 생산하고, 축적하고, 소비하는 삶을 이상화했어요. 저는 이 과잉 연결, 과잉 생산, 과잉 소비의 삶과 단절해가는 문명적 실험의 시대가 21세기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실천적 가능성의 기초에 은둔이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은둔은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곳이나 저 너머를 꿈꾸는 낭만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반대로,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수행해야 하는 미시정치적 실천입니다.
저는 청년들이 이미 ‘은둔기계’로 진화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로 끈끈하게 엉기거나 밀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공적 사안들에 대해서 독특한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고,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로컬’은 이미 ‘글로벌’이고, 더 나아가서 ‘플래니터리(planetary)’해요. 20세기의 거친 시선에는 잘 보이지 않는 중요한 변화들이 은둔기계의 삶에서 생성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니체가 말했듯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인의 발자국이 아니라 비둘기의 걸음처럼 고요하게 오는 것이니까요.
바이러스의 특징에 대해 적어주신 글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COVID-19 바이러스 이후 인간의 삶의 방식에 어떠한 변화가 생길지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너무 큰 주제여서 짧은 글에 생각을 온전히 담기가 어렵네요. 백신이 상용화되어 팬데믹을 통제하는 것이 가장 큰 급선무입니다만, 이 기회를 통해 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우리 시대의 문명적 문제들을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몇 달 전에 바이러스를 주제로 하는 이론 논문을 하나 썼습니다. 『한국사회학』이라는 잡지에 발표한 「코로나19와 사회이론」이라는 글인데요. 혹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 인간중심주의와 근대적 사회의 관념을 넘어서 이 재난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분은 이 논문을 직접 읽어보셔도 좋겠네요.
책에 언급된 뮤지션들과 영화들을 접하고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작가님의 사고에 음악이나 영화가 어떤 의미를 띠고 있나요?
영화는 특히 프랑스 유학 시절에 참 많이 봤어요. 시네마테크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문학, 예술 사회학을 하다보니 미학과 예술사를 탐구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고요. 박사학위를 받은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교수가 있었어요. 그의 영상인류학 수업을 몇 년간 들었는데 거기에서 아비 바르부르크를 배웠고, 벤야민을 다시 읽었고, 이미지에 대한 사고를 익혔습니다. 리얼리티의 복제가 아니라 시간을 뚫고 살아남는 힘으로서 이미지를 보는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은둔기계』에 나오는 단상들은 사실 이미지적 사고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몽타주 기법처럼, 파편들을 조립해서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 말입니다. 저에게 이미지는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 ‘방법’에 더 가깝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음악은 원래 다양한 장르를 두루 좋아하는 편입니다. 『은둔기계』에 제가 애호하는 뮤지션들을 적어 놓았는데요, 사실 그 외에도 많이 있어요^^ 조금 다른 의미이긴 한데, 제가 쓰는 글이 ‘음악적’이 되는 순간을 좋아합니다. 글을 쓸 때, 문장이 음악으로 변화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심을 합니다. 단상은 음악에 가장 가깝게 접근해간 언어 같아요. 제 글에 음악이 흐른다면, 그것을 노래처럼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인간은 서로에 대해 지쳤고, 인간이 인간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라는 말이 좀 슬프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인간이 포유류로서 ‘다른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진화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과잉, 왜곡, 변형이 문제인 것 같아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현명한 거리가 주어져야 오히려 서로를 잘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젖가슴을 통해 양분을 빨아 먹는 우리 포유류에게 엄격히 요구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밀착’이 아니라 ‘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도 청년 세대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양이들처럼 서로 사랑합니다. 고양이들처럼 서로에게 다가갑니다. 고양이의 방식 속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작가님의 은둔지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의 여러 은둔기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은둔지는 산책로입니다. 값싸고, 소박하지만, 변화무쌍한 은둔지입니다. 집 옆에 개울이 흘러요. 개울을 따라 오랫동안 걷습니다. 개울 옆으로 난 길을 통해 뒷산에 오르기도 합니다. 거의 매일, 산책 코스를 순례하듯 걸어갑니다. 변하지 않는 것들과 조금씩 달라지는 것들을, 계절의 순환 속에서, 즐겁고 경이롭게 바라봅니다. 『은둔기계』의 여러 단상들이 산책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은둔기계』에 나오는 한 문장으로 마치면 어떨까요? “고독은 (…) 욕망하지 않는 것과의 연결을 끊은 자가 확보한 자유다. 이 자유는 새로운 연결 가능성에 뿌리를 내린다. 우리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을 때 더 많이 연결될 수 있다.”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전공분야는 사회이론과 문화사회학이다. 계간 『사회비평』과 『문학동네』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마음의 사회학』 『사회학적 파상력』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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