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가 엠마뉘엘 카레르의 『콧수염』을 아주 재밌게 읽었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주요 스토리만 기억나고 세세한 내용은 잊고 있었다. 최근에 한 번 더 읽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과 생각이 든다. 세월이 많이 흘러 필자가 변한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사이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그런 것 같다. 지금 우리는 2000년대 초반과는 꽤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단연코 인터넷과 스마트 기기 기술로 온라인 세계가 활성화 되었다는 것이고 최근에는 코로나바이러스로 그 영향이 더욱 강력해지는 중이다.
『콧수염』은 제목처럼 주인공이 10여 년을 고수하던 콧수염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그렇게 오래 기른 콧수염을 깎아버렸는 데도 아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들이 그들이 기억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점점 깨달아간다. 주인공은 스스로가 정신병자라고 단언하기도 하고, 타인들이 모두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의심하기도 하면서 혼란스러워 한다. 하지만 타인들이 모두 공모하여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의심 자체가 현실에선 정신병적 망상이 될 수밖에 없고, 주인공은 한 사람인데 지인들은 다수이므로 주인공의 운명은 꼭 소설에서 선택된 장면처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불행하고 괴로운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어 보인다.
문제는 기억이다. 망각이나 왜곡된 기억. 사실 이런 것이 꼭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누구나 많은 것을 잊고, 또 때로는 잘못 기억한다. 하지만 보통은 별 것 아닌 것을 잊거나, 잊었다고 해도 이야기를 듣고 나면 기억이 돌아오곤 한다. 물론 너무 오래된 것들은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진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바로 지난주 목요일 저녁에 나는 친구 집에 초대받아 다녀왔는데 같이 간 사람은 함께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왔다고 기억하진 않는다.
자신이 경험했고, 그래서 기억하고 있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그런 일은 아예 없었다며 부인하며 새로운 현실을 내민다. 내게는 사람들이 내 현실을 파괴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현실이 아닌 것을 지어내는 것이 된다. 양쪽 모두에게 고통스럽거나 난감한 일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지낸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한다. 서로를 잘 안다, 의리가 있다, 믿을 수 있다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서로 나눌 추억이 있는 사이라는 것도 큰 몫을 한다. 내 삶을, 내 경험을 나 혼자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함께 기억해주는 것, 그것이 삶을 좀 더 가치 있고 단단하게 해준다고 느낀다. 내게만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다면 그 기억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소설 속 주인공은 현실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질문도 해보고 싶었다. 몇 분 전에 대답을 듣고 마음을 놓았던 질문들도 다시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 한 번 더 물어보면 그나마 손에 쥐고 있는 것들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작품을 썼던 1980년대나, 필자가 처음 작품을 읽었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런 갈등은 당연해 보였다. 그리고 어떻게든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누구의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를 증명하여 진위를 가려내야 했다. 그리고 그런 관점의 근거는 우선은 우리의 경험이 시간적, 공간적 제한이라는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은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은 우리가 현실의 경험을 반드시 몸을 통해 실현할 수밖에 없다는 제한과 맞물린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생각해보자.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같은 경험을 하고 있을까? 물론 여전히 우리는 그 조건 속에 살고 있지만 새로운 형식의 의미들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은 이전에는 없었던, 다른 차원의 경험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바로 온라인상의 현실, 가상현실. 실제 현실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거나, 그저 상상 속의 세계로만 존재할 것 같았던 이런 유사-현실들이 이제는 역으로 실제 현실에 영향을 주면서 변화시키는 길로 들어서고 있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 우리의 기억이 놓여 있다. 몸을 타고 들어오거나 나가지 않은 경험의 기억, 오직 이미지와 문자로만 이루어진 세계 속의 기억,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겪지 않고 만들어낸 경험의 기억. 그리고 무엇보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굳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 기억. 나의 실제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전혀 모른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간직(저장)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추억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에 접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콧수염』 속 주인공의 괴로운 상황, “그는 혼자서 모든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혼자만 콧수염과 아버지, 추억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이것들을 빼앗아 가고 있는데 말이다.”의 마지막 문장 ‘사람들은 그에게서 이것들을 빼앗아 가고 있는데 말이다’는 지금이라면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그들로부터 이것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중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 세계에 어떤 피난처 같은 곳이 하나 덧붙여진 형국처럼 보인다.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의 조건들이 온라인상의 사이버 세계에서는 극복 가능하고, 내가 상상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는데 제한이 별로 없다. 이는 특히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는 지금, 우리가 절실하게 경험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진짜 현실이라고 부르는, 내 몸이 동원되어 이루어내는 경험이 없어도 온라인 세계에서의 사유, 대화, 공감, 접촉으로 사람들(혹은 사람들의 아바타나 ai들)과 소통할 수 있고, 내가 좋아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장소, 물건들도 소유할 수 있다.
인생의 중반 무렵부터 이런 세계와 접속하게 된 사람들은 현실 세계의 기반 위에 이 세계를 세우거나 편입시키려고 노력하는 중인 듯하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사이버 세계에 노출된 세대와 현실 세계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다른 차원의 현실을 말 그대로 진짜 피난처로 삼아가고 있다. 높은 빌딩과 자동차가 점령한 도시에서 함께 모여 뛰어놀지 못하는 아이들은 가상 현실 속 캐릭터가 되어 실컷 뛰어다니기도 하고, 공터를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바쁜 일정과 먼 거리 때문에 친구나 연인과 자주 만나 즐기지 못하는 성인들은 온라인으로 대화하고, 사진이나 영상을 공유한다.
문제는 현실을 대신하는 그 세계에서 생겨나는 결과물이다. 가상 세계의 소통이나 놀이, 작업 등이 아무 반향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감정이나 기분, 그리고 생각들이 만들어내고, 그 세계에 접속해 있는 동안 무시하거나 잊고 있던 몸에 직접 영향을 준다. 과도한 기쁨이나 즐거움으로 흥분이 일어나기도 하고, 슬픔이나 절망,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기도 하면서 몸이 동요하는 것이다.
온라인 세계와 가상 현실은 몸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 인간이 마치 그 두 가지를 분리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듯한 환상을 심어주지만, 그 세계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바는 정신은 몸을 버릴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 세계가 몸이 끼친 영향은 그 세계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그곳은 몸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 몸을 해결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현실로 돌아올 때는 그 세계에서 내가 갖고 있던 것들을 같이 갖고 돌아올 수 없다. 그 안에 쌓여 있는 나의 이미지, 정체성, 관계, 명성, 내게 속해 있던 사이버 물질들. 그것들을 버려두고 나 홀로 돌아와야 한다. 내가 좋아하고, 원하고, 공들이던 것들을 손에서 놓아야 한다. 상실이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이동할 때 사람들은 상실감을 느낀다.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은 어떨까? 슬프고 우울하다.
우리는 『콧수염』의 주인공과 달리, 주변 사람들과 무관하게, 때로는 그들이 부인하더라도 혼자만의 경험과 혼자만의 기억을 가질 수 있고 그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줄 사람들도 만날 수 있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소설 속 결말 같은 장면을 선택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런 기억이 나를 지탱해주는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 주는 순간이 있다면, 그 값을 요구하는 순간도 뒤따라 온다는 것. 우리에게 기억은 어떤 것이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은 늘 소중하고, 나의 몸과 정신에 반드시 영향을 준다. 이제 우리는 그 영향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몸이 속하지 않은 세상에서 만들어진 기억이 몸에 주는 영향,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는 정신이 받는 영향을 말이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수련(정신분석학 박사)
한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에서 정신분석 임상을 실천하고 있다. 『잃어버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썼고, 『자크 라캉 세미나 11』, 『정신분석』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