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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나는 시간을 쓸모없이 쓰는 일에 일종의 강박을 갖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그런 류의 강박이 없었던 걸 생각해보면, 이것은 내가 타고난 것이라기보다는 살아오면서 언젠가 생겨난 습관 같은 것에 가까울 듯하다. 나는 그 시작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데, 아마도 청소년기 시절 수험생활을 하면서 '시간에 대한 강박'도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시간은 초 단위로 째깍째깍 흘러가면서 점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니 하는 게 다가오고, 고3이 다가오고, 어느덧 수능이나 입시가 다가오면서, 하루 한 시간도, 쉬는 시간도, 이동 시간도, 어느 자투리 시간도 함부로 내다버려서는 안 된다는 강박을 깊이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수험 생활은 끝났지만, 그런 강박만큼은 왠지 계속 이어져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나는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늘 고민했다. 아무 할 일 없이 하루가 주어지면, 그 하루를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시간을 적재적소에 써야한다는 강박이 너무 습관화되어 있었던 나머지, 늘 나의 시간들은 어느 목표를 향해 올곧게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지 못하면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내가 가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만, 이 불안을 덜 느끼고, 이 강박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지가 늘 고민이라면 고민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 첫 학기를 마치고, 어느 새벽 동기 및 선배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밝아오는 해를 보며 기숙사로 향하던 길을 오르던 중, 나는 갑자기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성인이 되고 난 뒤 첫해의 반년쯤을 어쩐지 허송세월한 느낌이었고, 앞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좋을지 몰랐고, 그렇게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졌고, 그 순간 당장 내일부터라도 사법고시라든지 행정고시라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충동이랄지 다짐이랄지 하는 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소설을 쓰는 걸 선택했다. 청소년기 때부터 나는 매일 새벽이면, 두어 시간씩 소설을 쓰곤 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고 돌아와서는, 나를 위한 시간을 두어 시간 정도는 준다고 생각하면서, 나만의 공상의 세계에 들어서서 글을 쓰는 글 즐겼던 것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대학에 와서는 그런 꿈조차 이상하게 잊어버리고, 무엇을 하며 사는지 모를 법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간을 온전히 쓰고자 마음먹고, 그해 여름부터는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청년 시절을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의 시간은 거의 10여 년 동안 '글 쓰는 사람'이 되는 일을 향해 있었다. 어느 시절에는 매년 강박적일 정도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썼다. 1년에 책을 100권 넘게 읽고, 영화를 100편 넘게 보고, 글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써야만 그 해를 '잘 보낸' 것이라고 믿곤 했다. 그만큼 많은 작품들을 흡수하고 매일같이 글을 써야만 소설가든 에세이스트든 뭐가 되었든 '글 쓰는' 직업인 같은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 삶은 시간에 대한 강박으로 채워졌고,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는 듯하다. 나의 하루하루는 무언가를 해내야만 하고, 쌓아야만 한다는 강박들로 가득 차 있다. 다만, 그것이 예전의 대학입시나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단 하나'의 목표로 움직이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여러 의무들에 배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또다시 여러 강박들을 느끼고, 시간을 잘 써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를테면 오늘 하루 아이의 사랑스러운 시절을 잘 기억하고 놓치지 않는 시간이 내게 꼭 한두 시간은 있어야 한다, 아내랑 아이와 같이 이번 주에도 하루는 함께 새로운 풍경을 보고 좋은 바람을 쐬어야 한다, 그래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글을 사흘에 한 편은 써야 한다, 내가 이 사회에 더 온전히 자리 잡기 위한 직업적인 노력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같은 의무들이 있다.
어쩌면 시간에 대한 강박은 달라진 게 없지만, 삶의 보다 많은 측면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충실하고자 하는 태도만큼은 길러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아무래도 쓸모없는 시간이란 영영 허락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쓸데없는 시간 같은 건 아마 나는 내버려두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 쓸 데 있는 시간들 속으로, 그만큼 더 풍요롭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들이 걸어들어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내가 시간의 소중함 못지않게 더 많은 것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다.
<정지우 작가의 말>
'그 쓸데없는'이라는 어구에 참으로 어울리는 어떤 글을 써내고 싶었는데, 그렇게 신선한 소재를 좀처럼 생각해내진 못했던 것 같아요. 대신 '쓸모'와 관련하여 저에게 가장 와닿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역시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하여 시간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네요. 구독자분들도 '그 쓸데없는' 이라는 묘한 수식어가 달릴 만한 어떤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보시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이상하게 사람12사람의 <캄캄한 밤>이 생각나는 새벽이군요. 글과 달리, 쓸모없어진 사랑에 대한 노래를 남겨봅니다.
<셸리의 말>
영국 체류 시절 시인 하나를 벗으로 두었소. (물론 나 셸리가 세상 어느 나라에 간들 글 쓰는 이를 벗하지 못하겠소?) 금일 내가 떠올리고 있는 시는 시간과 염정에 관한 것인데, 이렇게 시작하고 있소. 《Had we but world enough and time,/This coyness, lady, were no crime.》 말인즉 〈우리에게 단지 세상과 시간이 족히 있었더라면,/이 내숭은, 여인이여, 범죄함이 아닐 것이외다.〉라는 것이오. (솔직히 말하건대 《coyness》를 어찌 새길지는 언제나 이 고양이의 고민이오.) 그리고 시는 《But at my back I always hear/Time’s wingèd chariot hurrying near;》-〈그러나 나는 내 뒤편에서 항시 듣나니/시간의 날개 달린 마차가 가까이 달려오는 것을〉-로 이어지고, 《Thus, though we cannot make our sun/Stand still, yet we will make him run.》-〈고로 우리는 태양으로 하여금 가만 서 있게는/못 하지만, 여전히 그를 달리게 할 수는 있소이다.〉-로 끝을 맺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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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