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운세는 매일 ‘맑음’이라는데, 내 글의 진도는 매우 흐림이다. 매일같이 틀려서 믿지도 않지만 12시만 지나면 어김없이 오늘의 운세를 확인한다. 운세의 세상에서라도 내가 잘 되는 것을 보면 그나마 기분이 좀 낫기 때문이다. 올해 초에 어쩌다가 사주를 두 번 봤는데, 하나같이 글이 잘 써질 거라고 했다. 벌써 반년이 지나고 있고, 아직도 아무 것도 써지지 않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운명을 거스르는 나인가 아니면 사주인가. 자괴감은 암흑 같은 내 마음에 유일하게 빛나는 별이 되고, 그 별들이 모여 하나의 우주를 이루면 무대가 펼쳐진다. 그 무대에서 글 빼고 다 할 수 있는 모든 삽질이 시작된다.
일단 밥을 자주 먹는다.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아서 그런지 밥 먹을 때 유일하게 죄책감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면 사실 식사량 조절이 관건인데, 배가 고파도 안 되고, 불러도 안 된다. 적당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그나마 집중력을 만날 수가 있는데, 나는 꾸준히 실패한다. 글은 안 써지는데 입맛은 또 왜 이렇게 도는지. 그래서 밥을 먹고 소화를 위해 산책을 한다. 그렇게 식사와 산책으로 2시간을 홀랑 까먹는데, 하루에 식사를 두 번 하니까 기본 4시간은 말아 먹는 셈이다. 산책 하고는 좀 쉬어야 하니까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튼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것은 작업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뉴스도 보고 예능도 보며 채널을 돌리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20~30년 전 드라마 <전원일기>를 그 어떤 코미디 영화보다 재미있게 시청한다. 이때는 사실 <전원일기>가 아니라 EBS 수능 특강도 재미있다. 그러다 결국은 책상 앞에 앉아 검에 찔린 자객처럼 자책감에 괴로워한다. 빈 문서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다 10분도 못 견디고 눈알을 굴리다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시침핀을 발견한다. 그것으로 노트북 자판 사이에 낀 때를 빼내며 30분을 보낸다. 노트북 사고 시침핀으로 청소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이게 이렇게 재밌을 일인가.
아직도 처음 해보는 일도 많고, 재밌는 것도 많은데 왜 나는 이렇게 메말라서 글을 못 쓰고 있는 것일까. 그래. 이게 다 집에 재미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텔레비전, 남편, 빨래, 설거지 기타 등등. 빨래랑 설거지도 글쓰기보다 재밌기 때문에 집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립이 필요하다. 어디로 떠날지 사이버 지도를 펼쳐 놓고 파주에서부터 제주도까지 열 번은 왕복한다. 우리나라가 좁은 줄 알았는데, 되게 넓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온갖 지역의 호텔 가격을 검색하다 코로나로 서울을 벗어나는 것은 국가에 민폐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1박에 13만 원짜리인 홍은동에 위치한 고급 호텔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2~3시간이 지나 있다. 왠지 거기 가면 무조건 글이 써질 것 같은데, 아무래도 돈이 걸린다.
“너는 니 돈 몇 십만 원 쓰는 것도 벌벌 떨면서 5개월 전에 니한테 계약금 준 사람 돈은 안 아깝냐?”
나는 너무 논리적인 게 문제다. 반박불가의 논리에 읍참마속의 마음으로 일단 결재하려고 보니 이미 밤 12시가 지나 있다. 그럼 다시 방으로 돌아와 꺼진 모니터 화면을 마우스로 흔들어서 깨운 후, 깜빡이는 커서와 마주하며 다른 할 일을 찾고 지구 끝까지 글쓰기를 피하기를 반복하다 지쳐 쓰러져 잠이 든다. 삽질도 피곤한 법이다.
그렇게 갈 곳을 잃고 떠돌던 나의 자괴감은 최근에 뜻밖의 곳에 정착해 버리고 말았다. 오직 덕질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나에게 새로운 덕질이 시작된 것이다. 새로 이사한 동네가 고려대 인근인데, 거기 학생도 아닌 내가 그 학교에 대한 사랑을 키우기 시작했다. ‘아니, 내 소속감이 왜 고대에서 나와?’ 나도 어리둥절했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사랑이 진행되고 있었다. 밥 먹고 소화시킬 때 고대 캠퍼스를 거닐곤 했었는데, 그게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넓고 아름다운 캠퍼스와 지나간 이십 대에 대한 향수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나의 새로운 덕질. “자유, 정의, 진리” 교훈도 외우고, 이번 회장 선거 후보들이 누군가 벽보를 통해 훑어보고 마음속으로 투표도 했다. 자연계 과학도서관 앞에 서식하는 뚱냥이 궁디팡팡도 해주고, 고대생들이 가는 맛집 탐방도 열심히 한다. 그들의 학구열로 후끈한 커피숍에 매일 가서 모두가 짠 듯이 전부 아이스 음료를 마실 때 나만 뜨거운 음료를 마시며 유령처럼 끼어서 노트북을 켜놓고 그들을 관찰한다. 어떻게 하나 같이 아이스를 마실 수 있지 생각하며 무슨 책을 읽는지 훔쳐보는 이 시간이 유일하게 행복한 시간이다. 내가 이렇게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싶지만,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
이렇게 계속 수많은 삽질과 승자 없는 거울과 가위바위보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글을 쓰는 날이 오겠지? 9월 전까지는 반드시 글을 써서 호랑이 티 입고 고연전을 즐겨야 된다. ‘입실렌티’를 외치며 호랑이 기운으로 긍정적인 힘을 내본다. 컵에 물이 반밖에 남은 게 아니다. 반이나 남았다. 그리고 나는 아직 올해의 사주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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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고운(영화감독)
영화 <소공녀>, <페르소나>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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