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온다>의 한 장면
(* 영화의 내용이 상세하게 언급됩니다.)
<온다> 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고백>(2010) <갈증>(2014) 등을 연출한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신작이다. 제목은 영어로 ‘It Comes’, ‘그것이 온다’는 의미로, 일본 호러소설대상의 대상 수상작인 사와무라 이치의 <보기왕이 온다>를 원작으로 한다. 할리우드영화 <그것>(2017)에 관한 일본식의 변주이면서 한국 영화 <곡성>(2016)의 일본적 변용이라고 할까.
히데키(츠마부키 사토시)와 카나(쿠로키 하루)는 부부다. 선남선녀가 만났다고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하다. 딸도 낳고 뷰가 좋은 아파트로 이사도 했다. 부부의 행복이 영원할 것만 같다. 남들이 보기에 그렇다. 히데키가 좋은 남편, 좋은 아빠 같아도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에서만 그렇다. 카나는 히데키가 블로그 할 시간에 집안일이나 도왔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않아 불만이다. 저런 남편 죽어 없어졌으면! 딸도 필요 없어!
속으로만 그랬던 건데 정말 그런 일이 생겼다. ‘그것’이 와서 히데키를 죽이고 딸까지 데려가 버렸다. 그것을 막을 방법이 있다며 핑크색 헤어와 스모키 화장을 한 마코토(고마츠 나나)가 찾아온다. 한때 사랑했던 오컬트 작가 카즈히로(오카다 준이치)가 히데키와의 인연으로 알게 된 사연을 마코토에게 들려줘서다. 마코토는 언니이자 영매사인 코토코(마츠 다카코)에게서 어설프게 익힌 굿을 써먹다가 오히려 그것의 기운을 더욱 키운다.
그것의 정체가 뭐길래? 악마다. 그렇다면, 악마를 보았다? <온다> 에서 악마는 실체가 없다. 피로 물든 손바닥 자국을 유리에 남기고 깨진 거울을 싫어한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남의 몸 안에 들어가거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을 드러낸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입자처럼, 온라인의 디지털 신호처럼 형태는 없어도 실재하는 <온다> 의 그것은 인간의 약점을 귀신같이 알아내고 그 빈틈을 무지막지하게 공략한다.
히데키는 어린 시절 실종된 친구와의 사연이 악몽의 형태로 종종 찾아오고는 한다. 카나는 제 한 몸 건사 못하는 엄마에게서 받은 스트레스가 성인이 된 지금 우울한 낯빛으로 남아 있다. 카즈히로는 아이따위 필요 없다며 마코토와 갈등이 있었고 헤어진 뒤에도 그에 대한 앙금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다. 그것이 이를 눈치채고 카즈히로를 공격하면서 덩달아 마코토 또한 표적이 된다.
이를 막을 유일한 이는 코토코다. 코토코는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겠다고 정부 고위직의 협조하에 용하다는 영매사를 불러 모아 거대한 불제를 기획한다. 전자기기와 온라인까지 숨어드는 진화하는 그것에 맞서는 방법이라는 게 불제와 같은 전통적인 굿의 방식이라니! “무서우면서도 재미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는 나카시마 테츠야의 연출 의도가 드러나는 설정이다. 공포를 유희로 다루겠다는 감독의 태도는 한편으로는 분열적이다.
‘분열’은 나카시마 테츠야의 영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열쇳말이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이 우리 반에 있다고 밝힌 <고백>의 선생님은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돌변해 가해 학생을 향한 복수에 나선다. 천사 같은 딸이 실은 악마였음이 드러나는 <갈증>은 팬시한 이미지와 잔혹 묘사가 충돌해 관객을 혼란으로 이끈다. 평범한 일상이 공포로, 공포의 순간이 엔터테인먼트로 세포 분열하는 <온다> 는 공포, 오컬트를 떠나 나카시마 테츠야 장르다.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것이 뭘까 궁금하면서도 예상할 수 있는 건 인간의 악한 마음이 추상화된 존재라는 거다. 인간 내부에서 외부로 나왔기 때문에 인간의 연장선에 있는 존재를 두고 무서움에 떠는 인간이 감독 입장에서는 분열적으로 보였을 터. 그런 인간을 향해 영화로 굿판을 벌이는 <온다> 를 두고 나카시마 테츠야는 “흥미로운 라이브를 봤다고 느껴 주시길” 말을 전했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다뤘으니 있는 그대로 봐달라는 주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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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찻잎미경
2020.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