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전고운의 부귀영화] 나 하나 방 하나

‘전고운의 부귀영화’ 1화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영화감독 전고운의 창작자, 생활인, 여성으로 하고싶은 이야기. 격주 목요일 연재합니다. (2020. 03. 12)

1화 그림_나 하나 방 하나.jpg

일러스트_ 이홍민

 

 

어느 날, 집주인이 집을 나가라고 했다. 그 한마디는 다람쥐처럼 밥 먹고 기분이 좋아져 서촌을 돌아다니던 우리 부부를 한 순간에 길바닥에 앉혔다.


‘아, 내가 너무 노니까 꼴 보기 싫어서 신이 나를 내쫓는구나. 신이 내 팬이구나. 내 글을 너무 기다리는 거였구나. 이 사생팬 같으니라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둘이 같이 살 집을 구하고 <소공녀>라는 작품을 썼다. 아마 우리가 대출만 됐어도 그 작품을 안 썼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대출이 안 됐던 것은 행운이었다. <소공녀>를 쓰고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지금 살고 있는 두 번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 집에서 우리는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가장 큰 두 가지는 이사 후 싸움을 거의 안 했고, 둘 다 첫 장편 영화를 개봉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집에서 살 때, 우리는 정말 많이 싸웠다. 북촌에 있는 상가 주택의 투 룸이었는데, 동네도 좋았고, 집도 예뻤다. 하지만 엄마 눈에는 안 예뻤던지, 상견례를 하러 올라 왔을 때, 그 집을 보고 나서 들어간 커피숍에서 닭똥이 아니라 개똥만한 눈물을 쏟았다. 늘 밝고 명랑한 엄마가 내가 구한 귀여운 집을 보고 나처럼 좋아할 줄 알았는데, 펑펑 울다니.

 

엄마는 울진에서 나고 자랐고, 본인은 정말 단칸방에서 신혼집을 꾸려놓고서는 방이 버젓이 두 개나 되는 나의 신혼집을 보고 왜 그렇게 우는지 이해가 안 됐다. 물론 딸은 귀하게 키워야 팔자가 귀해진다는 철학으로 나를 항상 신축 오피스텔, 신축 아파트에 모셔두고 금이야 옥이야 키웠던 거 내가 모르는 바 아니고, 엄마가 그렇게 좋은 집에 나를 모셔둔 덕분에 쉬지 않고 신나게 연애를 많이 했으니,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를 키운 건 부모님과 연애다. 그 연애의 종잣돈도 부모님이 마련해준 셈이니까 부모님이 다 키운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엄마가 그런 데서 키웠으니, 그 이상의 집에서 결혼 생활을 바란 것도 합리적인 욕망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엄마를 울린 거다.

 

그 집에서 우리는 극심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는데, 말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속담을 눈으로 목격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가난이 대문으로 저벅저벅 들어오는 것도 봤고, 이가 다 빠진 사랑이 치사하게 창문으로 도망치는 것도 봤다. 그런 혹한기를 보내고 복층 구조의 방이 세 개인 이 집에 왔을 때,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싸우지 않고 서로를 위하고 아끼며 지냈다.

 

방. 이게 다 방 한 개의 차이인 것이다. 방 한 개가 있고 없고는 생활의 질 뿐만 아니라 이혼을 하냐 마냐의 문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모든 것은 종이 한 장의 차이가 아니라 방 하나의 차이란 말이다. 자신만의 방이 있는 자만이 자비로울 수 있고, 아마 멋있는 인간은 다 내 방이 있을 것이며, 더 멋있는 인간은 방이 엄청 많을 것이다.

 

엄마에게 갑작스러운 이사 소식을 전하며 ‘내가 얼마나 이 집을 사랑했는데’ 라고 말하니 엄마가 그랬다.


‘남의 집은 사랑하는 게 아니다’


엄마는 천재다. 천재 중에 최고는 연륜 천재인 것이다.


이제 사랑 타령 그만 하고, 집을 구해야지. 사생팬을 위해 시나리오도 써야지.


집도 글도 다 말아먹을 것 같지만, 내가 다 할 거다.

 

바람이 분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가 인기가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바람이 하도 불어대니까 인기가 있을 수밖에.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YES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5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전고운(영화감독)

영화 <소공녀>, <페르소나> 등을 만들었다.

오늘의 책

안녕달이 그린 마법 같은 겨울 이야기

한겨울을 포근하게 감싸는 마법 같은 상상! 『수박 수영장』 『당근 유치원』 작가 안녕달이 건네는 다정한 겨울 이야기. 따뜻하고 포근한 상상력으로 겨울의 정취와 빛나는 유년의 한때를 뭉클하게 그려냈다. 한겨울의 서정 속에 빛나는 따스한 우정 이야기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경계를 지우고 세계를 그리는 문장들

구병모 장편소설. 꿈과 현실, 너와 나의 구분을 지우는 문장들, 그 사이에서 불현듯 나타나고 사라지는 의미와 생각들이 경계 지을 수 없는 이 세계와 우리의 매 순간을 색다르게 그린다.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읽는 이 문장 뿐, 어떤 해석도 예측도 없이 여기에 사로잡힌 채 그저 한걸음 딛는다.

우리에게는 책이 필요하다

'책 읽어주는 남자' 전승환 저자는 다양한 곳에서 책과 좋은 글귀로 많은 독자와 만나왔다. 그가 소개한 책과 글은 외롭고 불안한 현대인을 위로해줬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은 철학, 예술, 문학, 심리학을 넘나 들며 나와 너 그리고 세계에 관해 이야기한 책이다.

뒤바뀐 세상 투자로 살아남는 법

남다른 통찰력과 끊임없는 분석으로 탄생한 『내일의 부』를 통해 자신만의 부자 매뉴얼을 공개한 조던 김장섭의 신간이다.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담고 있으며, 전작에 더해 보완한 새로운 투자 방식까지 담아 전2권으로 출간되었다.

.

주목! 투데이 포커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