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논어』 를 알지만 『논어』 를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어려운 한자와 그보다 더 어렵고 긴 해석과 주석에 질려 책을 덮어버리기에 십상이다. 고전문학 전공자로서 대학에서 30년 넘게 『논어』 를 가르쳐온 이강엽교수는 청춘의 책으로 만나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 준 『논어』 를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꼭 한번 소개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날 독자들이 공감할 만한 주제를 먼저 뽑고 거기에 맞는 논어 구절을 매칭하여 독자 스스로의 경험과 감성으로 고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으로 만들었다. 읽다 보면 철학인 듯 종교인 듯 문학인 듯 더 나아가 자기계발서의 면모까지 갖춘 논어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다. 더 궁금한 점을 저자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살면서 한번은 논어』 라는 제목이 『논어』 라는 유명한 고전을 한 번은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면서도, 한편으론 왜 이 시대에 『논어』 ? 하는 의문이 들게도 합니다. 『논어』 가 도대체 뭐길래 교수님은 『논어』 를 읽은 것을 살면서 가장 잘한 일로 꼽게 되셨나요?
대학에 입학해서는 공부를 꽤 열심히 한 편이었습니다. 현대시에 관한 이론이나 평론서들을 봤는데, 그리 수준 높은 책들이 아니었어요. 이 책을 보면 이렇고, 저 책을 보면 저래서 공허했습니다. 게다가 장학금을 받아 입학까지는 했지만 형편이 어려워서 다음 학기에도 학업을 이어나간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래, 그다음은 내 알 바 아니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대학의 방학을 한번 제대로 보내보자는 오기 내지는 치기 같은 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여름방학 내내 도서관에 틀어박혀 『논어』 를 읽었더니 제법 용기가 났어요.
나중에는 『논어』 를 비롯한 사서(四書)의 영인본을 구해 보면서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색연필로 표시해두었다가 틈이 날 때 다시 보곤 했습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곳은 또 다른 색깔로 표시해두곤 했는데, 놀랍게도 그런 부분이 쉽게 줄어들지 않았어요. 물론, 머리로야 스물에도 다 깨칠 수 있다 해도 서른이 되어야 이해될 부분도 있고, 쉰을 넘어서야 무릎을 칠 대목도 있었으니까요. 좋은 책이란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 성장하며 동행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때 방학 동안 읽은 『논어』가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으니 가장 잘한 일이지요.
30년 넘게 대학에서 『논어』 를 가르치고 계시는데, 요즘 대학생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학생들은 어떤 대목을 재밌어하는지, 그동안 배웠던 학생들 중 강의와 관련하여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남긴 경우를 소개해 주신다면요?
작년에 『논어』 의 네댓 구절 정도를 가르치고 난 후, 제일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학생들에게 외우게 한 일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구절들도 많았는데, 가장 많은 학생들이 고른 게 중궁과 관련된 것이었어요. “얼룩소 새끼라도 털이 붉은 데다 뿔까지 반듯하다면, 비록 제물로 쓰지 않으려 한들 산천이 그를 버리겠느냐?”고 공자께서 말한 그 대목이지요. 중궁은 신분이 미천한 데다 아버지의 행실이 좋지 않아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제자입니다. 중궁의 아버지는 얼룩소여서 제물로 쓸 수 없지만, 그 자식인 중궁은 아버지의 단점을 전혀 물려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점까지 갖추었으니 어찌 하늘이 버리겠느냐며 중궁을 격려해 준 것이죠. 학생들에게 그 구절을 고른 이유를 물었더니, 중궁의 처지가 많이 공감되고 나중에 교사가 되면 그런 제자들을 잘 보듬어야겠다는 겁니다.
요즘 금수저, 흙수저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지요. 흙수저로 태어났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라고 다그치기도 하고, 흙수저로 태어났으니 무얼 하든 소용없다며 비관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나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학생들이 중궁과 관련된 구절을 뽑은 것은 바로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갈구하기 때문일 겁니다. 비록 흙수저로 태어났더라도 세상에 제대로 쓰일 수 있는 자격을 잘 갖추고 있으면 인정받을 길이 있다는 희망 같은 걸 포착해서 스스로를 다독였겠지요. 공자께서 중궁의 등을 토닥여 준 것처럼 앞세대가 후배 세대를 독려하고 끌어주면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책에 보면 공자님이 길을 가시다가 길가에서 똥을 누는 사람에게 질책을 하시는데, 길 한가운데서 똥을 누는 사람은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얼핏 보기엔 도로 한가운데서 똥을 누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경우로 보이는데 공자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혹시라도 이런 이야기를 실제로 받아들이는 독자들이 있을까 걱정입니다. 이 이야기의 매력은 전복성(顚覆性)입니다. 천하의 큰 스승인 공자라면 못 가르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통념을 뒤집은 거지요. 공자는 어떤 자리에서든 쓴소리를 쏟아냈을 것 같지만, 『논어』 의 여러 대목에서 말을 삼가고 정제해서 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는 난세를 살다간 사람들이 남기는 처세의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공자의 경우 제 한 몸이나 편히 지키려는 얕은수가 아니었습니다. 상대와 신뢰를 쌓아서 자기 말이 제대로 먹힐 수 있을 때에야 말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를 더 나은 상황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퍼뜨린 사람들은 신뢰는커녕 적개심으로 달려들 사람까지 선도할 수는 없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길가로 피한 사람은 부득이해서 똥을 누긴 했지만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 말이 먹힐 수 있지만, 뻔뻔하게 길 한 가운데서 똥을 누는 사람이라면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의미이죠.
자기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믿는 청춘의 시절에는 제힘을 한껏 키워두어야 성장하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이 옳으니 그 방향으로 세상을 개선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그것으로 세상만사를 쉽게 재단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그동안의 성장을 자양분 삼아 다른 사람들을 성장시켜야 하는 성숙의 단계에서는 고려해야 할 사항이 훨씬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공자 또한 인생의 후반부에서는 유연함이 커졌는데 그런 내용이 이 이야기로 전해졌을 겁니다.
『논어』 는 공자님의 말씀을 여러 제자들이 기록한 책이어서, 공자님의 언행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공자님의 수행 기사였던 번지의 이야기도 재미있고, 찢어지게 가난한 선비로 살다 요절한 안회의 생애는 가슴 아프기도 합니다. 교수님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제자를 한두 명 소개해 주신다면 누구인가요?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주요 인물을 꼽으라면 안회, 자로, 자공일 겁니다. 셋 모두 개성 만점이고, 그 들을 합쳐놓으면 공자라는 거인의 전모가 얼추 드러날 법도 하지요. 좋아한다면 어폐가 있겠지만, 이 셋 중 가장 마음이 쓰이는 제자는 자로입니다. 자로는 호걸 스타일인데 공자를 처음 보고는 납작 엎드린 인물입니다. 공자의 키가 얼추 2m나 되었다고 하니 그럴 법도 합니다. 공자가 공부만 하는 선비풍의 인물이었다면 자로가 스승으로 모시지도 않았겠지만, 공자 역시 자로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랐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갖춘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는 법이니까요. 자로가 공자를 가장 많이 걱정하며 공자를 위해 몸을 던져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걱정을 많이 산 까닭은, 어쩌면 공자 내면에 자로가 겹쳐져 있지나 않았을지 조심스레 짐작해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실현 가능성을 떠나 옳다 싶은 일에는 적극 나서다 결국은 참변을 당하고 만 자로가 스승의 가르침을 좇아 진력하다 요절한 안회만큼이나 아픈 손가락이었을 겁니다.
또, 세 제자들에 비해 뛰어난 면은 적지만 번지는 운 좋은 인물로 관심이 갑니다. 지금도 한창 연구에 열중하는 스승 밑에 가면 숨쉬기 어려울 만큼의 압박감을 느낍니다. 자기 연구에 열심인 까닭에 다른 일을 돌 볼 틈도 없고, 제자들이 자기보다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으면 이유를 살필 틈도 없이 채근하니까요. 그러나 그러던 분들도 정년에 임박해서는 여유를 가지고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도리어 제자들을 더 애틋하게 챙기기도 합니다. 번지는 그런 때에 공자를 만나 매우 친절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저만 해도 애송이 시절, 대가로 불리는 원로 교수님들께 도리어 동네 할아버지 같은 편한 인상을 받곤 했습니다. 번지는 또 그런 자리에서 스승 복을 누리면서 스스럼없이 질문하여 세세한 내용을 알아내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공자님은 자신의 몸 전체를 감싸고도 남을 만큼 큰 잠옷을 입고 잠들기를 좋아하셨다죠?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님이시라 주무실 때도 격식에 맞추셨을 것 같은데 의외의 모습이 인간적으로 느껴집니다. 인간적인 공자의 이야기를 더 소개해 주세요.
이 책의 편집 과정에서 분량을 줄이느라 빠진 대목이 있습니다. 공자께서 노나라의 무성을 지날 때 현악기 연주가 퍼져 나오는 걸 듣고는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느냐?”고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무성은 공자의 제자 자유가 다스리던 작은 고을이었는데, 조정이나 큰 고을쯤에서 할 법한 음악을 연주하여 너무 과하다고 여겼던 겁니다. 자유는 전에 공자에게 배운 바로는 군자든 소인이든 예악을 배우면 각각에 맞게 쓸모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작은 고을이라고 예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공자는 곧바로 앞에서 말한 것은 농담이었다며 물러섰습니다. 그것도 “여보게들, 언(자유의 이름)의 말이 맞네. 앞서 말한 것은 농담이네.”라는 식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과하는 방식을 택하지요. 가볍게 한 말이었지만 제자가 이치를 갖추어 따지고 들면, 무시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즉각 수정했습니다. 또 하나,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 안회가 죽었을 때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라며 통탄하였는데, 좀처럼 격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공자로서는 매우 인간적인 대목으로 다가옵니다.
『논어』 에는 누구나 한번은 들어봤을 유명한 사자성어가 많이 나옵니다. 이 인터뷰를 보는 독자들에게 주고 싶은 사자성어를 하나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유교무류(有敎無類)’를 꼽고 싶습니다. 주자의 해석에 의하면 “유교면 무류니라.”라고 하여, 가르침이 베풀어지면 차이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모든 인간을 선하게 계도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린 해석이지요. 제 책에서는 “가르침에 있어서는 부류가 따로 없다.”고 풀었습니다. 두 해석 모두 지향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저는 출신이나 신분, 지위 등등에 따라 차별하지 말고 교육의 기회를 똑같이 준다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인데, 공자가 실제로 그런 교육을 몸소 실천해 보인 사람입니다.
춘추시대의 사정을 보면 참 어지럽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주(周)나라가 천자국의 지위에 있었지만, 제후국들은 각기 세력화하여 분쟁과 병합이 계속되었으며 패권을 쥔 강국이 사실상 중국 전체를 호령했습니다. 나라 안에서는 세력을 지닌 대부가 제후를 좌지우지하기도 했고요. 이렇게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이 가장 큰 희망이고, 인재가 가장 큰 자산입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출산율 저하와 인구 고령화로 큰 곤경에 처해있습니다. 출신 배경이나 스펙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귀한 인재로 키워내야 합니다. 현재의 차별 없는 교육이 미래의 최고 복지임을 인식하고 누구나 양질의 교육을 통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미국에서 모든 아동들을 뒤처지지 않게 가르쳐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낙오아동방지법(No Child Left Behind)’을 중국에서 ‘유교무류법안(有敎無類法安)’으로 번역하는 데서 유교무류가 왜 절실한 문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논어』 를 쓰셨는데, 뒤이어 『살면서 한번은 OO』를 기다리는 독자가 생겨날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고전을 소개하고 싶으신가요?
『살면서 한 번은 삼국유사』 정도라면 나서보고 싶습니다. 제 전공이 한국 고전문학, 그중에서도 서사문학입니다. 그동안 해온 대부분의 연구와 집필이 옛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었고, 이번 책에서도 그런 점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논어』 는 스토리로 엮어내기에 너무 파편적인 담론이어서 몇 구절을 한데 엮어내는 과정에서 본의를 손상시키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삼국유사』 는 처음부터 스토리를 지닌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데다, 그간 논문도 여러 편 써왔고 여러 버전의 읽을거리로 만들어본 경험도 있어서 제가 다루기에 훨씬 더 적절한 고전입니다.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속의 비밀을 파헤치는 가운데 『삼국유사』 가 왜 꼭 한번 읽고 넘어가야 할 고전인지를 알 수 있게 말이지요.
* 이강엽
한문을 익히기 위해 처음 『논어』를 읽었던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이후 30여 년 넘게 『논어』를 읽고 가르쳐 오고 있다. 지금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가장 먼저 찾는 책이 『논어』이다. 청춘의 시기, 마음속에 불평불만이 이글댈 때 “不怨天, 不尤人(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이라는 『논어』 문구로 마음을 다독였고, 어렵사리 학위 과정을 밟아 나가던 시기도 “行有餘力, 則以學文(행하고도 남는 힘이 있으면 글을 공부하라)”이라는 구절을 버팀목 삼아 견뎌 낼 수 있었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하였으며 동대학원에서 한국고전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 중이다. 그동안 쓴 책으로 『토의문학의 전통과 우리문학』, 『신화전통과 우리문학』, 『둘이면서 하나』, 『강의실 밖 고전여행』, 『삼국유사 어디까지 읽어 봤니?』, 『열하일기로 떠나는 세상 구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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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번은 논어이강엽 저 | 나무를심는사람들
『논어』의 매력에 빠질 수 있도록 핵심 내용을 담으면서도 지금껏 잘 알지 못했던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들까지 엿볼 수 있도록 다채롭게 풀어놓고 있다. 또한 적재적소에 한자의 연원과 뜻풀이를 이야기 속에 녹여 내어 ‘인仁’과 ‘습習’ 같은 논어 속의 주요 개념을 인상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