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1인치 남짓한 자막의 장벽만 뛰어 넘으면 더 많은 훌륭한 영화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시네마’ 하나입니다.” 온 나라가 <기생충>의 제77회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소식과 봉준호 감독의 수상소감으로 한참 뜨거웠던 순간, 어떤 이들은 조금 더 기다려 TV부문 평생공로상 ‘캐롤 버넷 어워드’ 수상 장면을 지켜봤을 것이다. 국경과 언어의 차이를 넘어 오로지 ‘이야기’ 자체로 공감하고 교류할 수 있지 않느냐는 봉준호의 말을 실천으로 옮겨온 사람, 코미디언 엘렌 드제네러스가 올해의 수상자였기 때문이다.
1997년, 자신의 이름을 딴 시트콤 <엘렌>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드제네러스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백했다. 비슷한 시기, 시트콤 속 등장인물 엘렌 또한 극 중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고는 자신이 좋아하는 수잔(로라 던)에게 제 감정을 털어놓았다. 미국 대중문화사에서 주변부 조연이 아닌 주연 캐릭터가 시즌 중에 제 성 정체성을 고백하는 시트콤은 <엘렌>이 최초였는데, 해당 에피소드가 높은 시청률와 평단의 지지를 거두었음에도 <엘렌>과 드제네러스는 수많은 공격에 직면해야 했다. 지금이야 제 정체성을 밝히고 활동하는 셀러브리티들이 많아졌지만, 그 시절만 하더라도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지금보다 훨씬 더 극심했다. 공격에 시달리던 방송사 ABC는 <엘렌>의 다음 시즌 제작을 취소했고, 커리어의 정상에 서 있던 드제네러스는 갑자기 일이 뚝 끊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로라 던은 이성애자 배우임에도 극 중 엘렌이 좋아하는 여자 수잔으로 출연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일이 끊기는 역풍을 경험해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돌아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커밍아웃이 자신의 커리어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걸 정말 몰랐을까? 그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드제네러스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수많은 성소수자들은 드제네러스가 그 모든 과정을 거쳐서 다시 TV의 정상에 올라서는 모습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 시상자로 출연한 코미디언 케이트 맥키넌은 드제네러스에게 바치는 헌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제 정체성을 깨닫는 건 무서운 일입니다. 유전자 검사 결과지에서 외계인 DNA를 발견한 것만큼 두렵죠. TV 속 엘렌을 보는 것만이 그 공포를 덜어주었습니다. 그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커리어와 인생을 걸었고, 그래서 굉장한 고통을 겪었죠. 물론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긴 했지만, 그건 엘렌처럼 용감한 사람들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그 태도를 바꿨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그 때 엘렌을 TV에서 보지 못했다면, 전 TV는 성소수자를 출연시키지 않으니 내가 출연할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을 거예요. 그리고 생각했겠죠. 나는 외계인이고, 여기에 존재할 권리가 없다고.”
인류가 국경과 언어, 문화와 인종, 성별과 성 정체성의 차이를 완전히 극복하고 오롯이 이야기 자체로만 소통할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엘렌처럼 장벽을 넘기 위해 먼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이들이 있는 한, 우리는 한 발씩 그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
찻잎미경
2020.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