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맨해튼 비치』를 번역하며 - 최세희
『맨해튼 비치』를 끝낸 후, 돌이켜보니 바다를 세 번은 찾았던 것 같다. 덕분에 일상이 새롭게 환기되었다……라고 썼다가 엄청난 거짓말이라 지운다.
글ㆍ사진 최세희(번역가)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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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의 어느 바다에서 처음 숨대롱을 입에 문 채 물속으로 들어갔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주위는 온통 노란색 파란색 검은색 물고기들이 팔랑거리는데, 파랗게 일렁이는 저류 너머엔 환할 만큼 흰 모랫바닥이 펼쳐져 있고 마치 항공사진 속 산맥처럼 구불구불한 산호초가 내 몸 저 아래 놓여 있었다. 생경하고 두려운데 결국 황홀했다. 그러는 동안은 물 밖을 잊었다. 물속이 세상의 전망과 시야가 순식간에 바뀌는 새로운 감각의 차원이라면 물 밖은 지리멸렬한 관성의 무게가 내려앉은 곳인 것만 같았다. 물속에서 난 혼자 위대해졌다. 파란 젤에 박힌 파리 비슷한 꼴이면서 내 딴엔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초월이라 여겼다.

 

돌아가면 다이빙을 배우리라는 호기로운 결심은 여행이 끝날 때마다 ‘똑바로 살리라’는 뜬금없고도 굳센 작정의 리스트에 추가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만난  『맨해튼 비치』 에서 바다를 영접한 주인공들이 일상에선 누릴 수 없는 희열에 눈뜨는 대목과 마주한 순간, 나는 이십 년은 묵었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얘들아! 나도 그 느낌 알아! 그렇게 쾌재도 불렀던 것 같다. 고작 서너 번의 잠수 체험에 기대어 공감을 표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하지만 그 매개가 제니퍼 이건의 언어라면, 경험의 유무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마치 촉수 같은 언어로 내 무딘 감각을 자극해 상상적 체험의 세계로 접붙여준 것은  『맨해튼 비치』  가 처음이 아니니까.

 

제니퍼 이건은 구조조정이 불가능해진 것 같은 소설이라는 장르를 놀라운 실험정신으로 돌파하는 작가다. 2011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깡패단의 방문』  이 준 충격은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 를 읽었을 때의 충격에 비할 만했다. 가령,  가까운 미래를 사는 한 여자아이의 일기를 파워포인트로 쓴 장(章)은 그림 없는 만화, 텍스트의 재발명이었다. 정식 출간되진 않았지만 2012년 <뉴요커>의 트위터 계정으로 연재한 SF 스파이 스릴러 「블랙박스」 역시 실험성 면에서  『깡패단의 방문』  에 뒤지지 않는다. 트위터 1회 분량에 맞춰 회당 140자로 연재했던 「블랙박스」는 언뜻 집중력이 저하된 디지털세대의 구미에 맞춤한 기획 같았지만, 실은 1950년대 미국 SF 잡지 연재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깡패단의 방문』  이후 7년 만에 정식으로 출간한 장편소설  『맨해튼 비치』  에서 제니퍼 이건이 (유물이 되다시피 한) 해양소설에 도전했으며 주인공은 관습과 금기에 도전하는 (그래서 새삼 놀랄 것 없는) 소녀라는 뉴스를 접했을 때 맨 처음 든 생각은 ‘그녀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잊고 있었다. 이건은 2006년의  『킵』  에서 이미 고딕 판타지의 전통을 참신하게 쇄신한 작가 아니었나. 고색창연한 괴담으로 에워싸인 유럽의 고성을 디즈니랜드식 RPG 게임장으로 리모델링한 후 와이파이 중독자의 빈한한 내면을 상상력이라는 자양분으로 채워주지 않았던가.

 

노파심이 기대로 바뀌면서 가장 궁금했던 건 다분히 미국적인 이 작가가 이번엔 어떤 ‘미국의 초상’을 보여줄까 하는 것이었다.  『킵』  은 뉴욕의 병든 힙스터의 갱생 판타지였다.  『인비저블 서커스』  는 히피세대와 X세대의 길항과 방황의 병록이었고,  『깡패단의 방문』  은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펑크세대에서 9?11 이후 미래세대까지 아우르며 회고와 회복의 희망을 담은 이야기였다. 제니퍼 이건을 읽는 것은 미국 문화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된 시기를 자성적으로, 대안적으로 조망하는 경험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리고 결과적으로  『맨해튼 비치』  는 제니퍼 이건이 이제까지 쓴 미국 이야기의 정점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언제나처럼 과거의 미국이 남긴 어떤 궤적에 미루어 현재의 미국을 진단하는 작품이다. 세 명의 주인공 애너 케리건, 에디 케리건, 덱스터 스타일스는 대공황과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 역사의 ‘주변부’에 선 인물들이다. 셋 모두 이민자 계층이며, 당시의 지배논리에 맞서 각자의 삶을 개척해나가며 잔존하거나 끝내 사라진다는 점에서 미국이 잊거나 의도해 지운 역사의 진실을 대변하는 이들이다.

 

에디는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 2세대로 태어나 주식 중개인으로 잠시나마 성공의 가능성을 꿈꾸지만 대공황과 전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둘째 딸 때문에 세상과 불화하는 인물이다. 정직한 품성까지 저버리며 삶의 밑바닥에서 버둥대던 그는 세상(뭍)과 연을 끊고 스스로 바다로 유배를 떠나며 자신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된다. 작품 첫 페이지부터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에 헌사를 바친 이건은 항해, 해전, 조난에 이르는 뱃사람의 생태를 실감나게 그려내는 것으로 해양소설 장르의 스펙터클한 재미를 살리면서 극한 상황에 몰려서도 인간성을 지켜내는 에디를 참으로 인자하게 구원해낸다.

 

덱스터는 이탈리아 이민 2세대로 아버지를 괴롭히던 조폭의 왕 밑으로 들어간다. 폭력이 권력을 규정하는 이른바 ‘그림자 세계’로. 성공을 위해 아버지와 연을 끊고 이름마저 버릴 뿐만 아니라 협잡과 불법행위를 밥먹듯 저지르는 그는 피카레스크소설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그런데 1할도 안 될 천진무구한 면이 이 악당에게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부여한다. 전쟁이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바꿀 거라는 전망을 마주하면서 그는 하필이면 ‘순정한’ 재건을 꿈꾼다. 그리고 그 개심의 배경엔 역시나 바다가 펼쳐져 있다. (더이상은 스포일러라 함구하겠다.) 제니퍼 이건은 스타일스의 이야기에서 마리오 푸조의 『대부』가 세운 누아르 스릴러의 익숙한 플롯을 거쳐 당시 미국의 정치와 경제 전반을 장악했던 숨은 세력의 민낯을 우아하고도 비정하게 극화한다. 그 속에서 애먼 꿈을 꾸다 좌절하는 덱스터는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선 미국의 발판엔 총과 돈세탁 장부가 쌓여 있었음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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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희 번역가

 

 

한편 ‘우리의’ 애너는, 이 남자들이 주변과 자의식에 고통받으며 방황하는 동안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삶의 근원이자 과정이며 이상향인 바다가 키워낸 자랑스러운 딸이다. 더불어 제니퍼 이건의 문학적 성취를 담보하는 쾌거이기도 하다. 여성에게 예속과 유폐를 종용하던 시절, 애너는 바다에서 해방구를 발견하고 끝내 자기 것으로 만든다. 다이버의 길을 걸으면서 가부장제에 길든 습속을 차례차례 벗어나간다. 매번 홀로 절망하고 철저히 분열하면서도 끝끝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나간다. 한편으론 실제 미국 육군 최초의 여성 다이버의 삶에 영감을 받아서, 한편으론 톨스토이가 성적 분방함을 이유로 단죄한 ‘안나 카레니나’를 복권하기 위해 탄생시킨 그녀는 (작가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기 센 언니tough babe’의 면면이 어떤지 제대로 보여준다. 자신의 충동과 욕망에 근거해 경직된 세상과 일당백으로 싸우는 그녀의 길을 따라가는 문장들은 촉수처럼 감각적이다. 분석과 판단이 아니라 정념을 원동력 삼아 매 순간을 결정하는 그녀의 성정에 맞춤한 글쓰기라는 점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문을 연 여성문학의 전통을 계승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맨해튼 비치』  를 끝낸 후, 돌이켜보니 바다를 세 번은 찾았던 것 같다. 덕분에 일상이 새롭게 환기되었다……라고 썼다가 엄청난 거짓말이라 지운다. 말로 하기 힘들지만, 그 바다 위로 전엔 없었던 이미지와 함께 어쩐지 상흔에 가까운 상념들이 일순 겹쳐 보였던 것 같다. 무슨 조짐인지 알 길은 없지만 그 순간 그 바다는 살짝 달라 보였다.  『맨해튼 비치』  의 후유증이라 생각했다. 무릇 좋은 책이 주는 감동은 상처에 가깝다는 점에서. 매일 그게 그것인 풍경에 없던 균열을 낸다는 점에서.


 

 

맨해튼 비치제니퍼 이건 저/최세희 역 | 문학동네
미 육군 최초 여성 심해 다이버와의 인터뷰, 당시 브루클린 해군공창 노동자의 일기와 서간 검토를 통해 생생하게 복원된 공기는 애너가 감당해야 했던 물리적, 상징적 무게를 고스란히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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