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생각나는 친구들이 있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건만 어떤 장면으로 두고두고 기억되는 얼굴들. 그 장면은 대개 내가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어린 우리’에 대한 연민으로 버물려 있는데, 이를 테면 이런 거다. 쓰레기를 버리러 가던 길, 소각장 옆에서 마주친 같은 반 친구 A의 눈. 그 친구는 이른바 ‘노는’ 동급생에게 뺨을 맞고 있었고 이유는 없었다. 있었다면 아마도 A가 말을 더듬는다는 점이었겠지. 나는 가던 길 따라 소각장에 쓰레기를 버리고 교실로 돌아왔다. 폭력에 가담한 기억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는 걸 이때 알았다.
A의 뺨을 때리던 ‘노는’ 친구 중에는 출석율이 낮은 B가 있었다. 한 반의 4분의 1 정도가 학교를 나오다 말다 하였으니 그리 특수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벼르던 선생님은 하루 날 잡아 B를 교실 앞쪽으로 불러낸 후 교탁에 출석부를 내리치며 다그쳤다. B는 바락바락 대답했다. 어차피 커서도 횟집에서 일할 거 미리 일하는 건데 뭐가 나쁘냐고. 학교 나온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바닷가 소도시로 이사 왔지만 다시 상경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대학 또한 어느 대학이냐의 문제이지 갈지 말지를 고민한 적 없던 내게 B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횟집에서의 일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B가 다른 선택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론 그 어떤 사실도 B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좀더 자라서는 어떤 아이들의 현실이 다른 누구에게는 충격이라는 분절 자체가 아파왔고, 좀더 지나서는 B가 그때 자신의 삶을 선택한 걸까 생계로 밀려난 걸까 알 수 없어졌다. 가끔 4분의 1에 가까울 친구들은 무얼 하고 살까 떠올린다.
언스플래시
도시에서의 얼굴도 있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후,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말을 잘한다는 이유로 학교 대표로 토론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C는 나와 한 팀이었던 친구였는데, 또래 남자 아이들과 달리 입이 걸지 않은 데다 나를 여자 아이가 아닌 능력 있는 친구로 봐주어 몰래 마음에 들어 했었다. 토론 준비를 위해 평소 C의 부모님이 이용한다는 오피스텔에 방문한 날이었다. 큰 테이블 하나와 작은 주방만으로 꽉 찬 오피스텔의 벽에는 ‘백혈병 환자 부모 모임’이라는 단체(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으나 비슷한 이름의 단체였다.)가 주최한 행사와 모임에 관한 포스터가 여럿 붙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C가 초등학생 때 C의 누나가 백혈병으로 일찍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C를 제멋대로 박제해버린 장면은 따로 있다. 마찬가지로 토론 준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외국어고등학교와 과학고등학교 같은 특수목적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던 우리 세 명은 서로의 고충을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니 굉장히 격조 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학원 가기 싫다’가 대부분이었다. 그 말은 지금도 ‘출근하기 싫다’로 반복되고 있으니 인간 평생의 실존적 문제임이 분명하다.) 내가 말했다. “나는 사실 가기 싫은데 엄마가 너무 원하셔서 공부하는 거야. 솔직히 이 영어 실력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C가 답했다. “난 너무 가고 싶은데. 난 실패할 수 없거든. 누나 몫까지 해내고 싶어.” 우리는 학교 앞 새로 생긴 독서실에서 피톤치드가 나온다더라 어제 야구 시합에서 투수가 잘 던지더라 따위의 시시콜콜한 말을 하다가 헤어졌다. 손 흔들고 뒤돌아 자전거를 끌고 가던 C. 내가 잊지 못하는 등. 이 날 C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깨달은 것 역시 어른이 된 후였다. ‘C야, 누나의 죽음이 네 잘못이 아니듯, 누나가 미처 다 못 산 삶이 네 책임은 아니야.’
그러고 보면 청소년기 나를 이끈 동력도 내 잘못이 아닌 어떤 일에 대한 책임감 또는 청소년기의 무력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동력에 대한 결과물은 언제나 나중 일이었고. 매일 밤 큰소리 나는 집에서 자라면서 엄마 속 썩이지 말자고 결심하며 착한 아이가 되어갔고, 좀더 자라서는 집으로부터 빨리 독립하고 싶어 공부에 매달렸다. 청소년이 당장 독립할 방법은 없으니까. 사실 B도 횟집일을 싫어했다. 횟집이 B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B를 비롯해 B와 무리 지어 다니는 친구들의 보호자는 대부분 바닷가에서 작은 횟집을 운영하고 계셨다.) 그러나 B는 나처럼 탈출을 꿈꾸지 않았다. 또는 못했다. 어디까지가 자의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청소년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적었고, 따라서 질 수 있는 책임도 없었으며, B는 현실 인식이 빨랐다.
영화 <땐뽀걸즈>
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를 봤다. 영화는 조선소가 하나 둘 문 닫는 때에 조선소 취업을 준비하는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들, 그 중에서도 댄스스포츠 동아리 학생들을 조명한다. 동아리경진대회 수상을 목표로 연습하는 아이들. 얼핏 스포츠 청춘 영화가 떠오르는 시놉시스와 달리 영화는 현실을 겨냥한다. 조선소에서 일하다 버티지 못하고 새로운 업(業)을 찾으러 떠나는 시영의 아버지, 아르바이트로 월세를 감당하는 현빈이의 시간난 등: 지방, 취업난, 미성년, (허울 같은) 꿈. 하지만 동아리를 이끄는 이규호 선생님과 아이들의 관계를 통해 영화는 동화적인 아우라를 얻는다. 술 마신 다음 날 학교를 빠진 학생에게 숙취해소제를 사다주는 중년의 선생님. 환승 몇 번하냐고 물어보며 교통비로 천 원짜리 지폐를 나누어 주는 선생님. 그러면서도 개인사는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에만 먼저 물어오는 어른. 이규호 선생님은 청소년을 술로부터, 노동으로부터, 무엇으로부터 ‘보호’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서 친하게 지낸다.
그런 이규호 선생님도 딱 한 번 화를 낸다. 대회가 코 앞인데도 연습이 부족하다고 느꼈을 때, 현빈이가 술을 마셨을 때에도 내지 않던 화를 낸다. 선생님의 꾸짖음은 아이들에게 번진다. 시영이는 현빈이에게 중요한 시기에 아르바이트를 꼭 가야겠느냐고 따지다가, 아버지가 집을 나서는데 연습 때문에 배웅을 포기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울음이 터진다. 아이들은 서로 싸운다. 그리고 해결법을 찾아나간다. 어느 새 선생님은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청소년-아이들은 타인과의 사회 속에서 자기 일에 책임지는 방법을 배운다. 책임질 수 있음을 누린다. 화면 속 아이들은 미숙하지만 미완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냥 우리 사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성년 중 어느 누구도 완성형은 아니니까. 다시 B를 떠올린다. B도 일상에서 자기 자신의 책임과 몫으로 살아가는 경험을 보다 자주 했더라면 다른 삶도 꿈꿨을까.
영화 <땐뽀걸즈>
영화를 다 본 후 이규호 선생님과 이승문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감독의 ‘좋은 어른’에 대한 답변이 오래 남았다.
“촬영기간 동안 저도 땐뽀반 친구들에게 삼촌으로 불리면서 ‘이 사람들과 나는 어떤 관계지? 어떻게 해야 되지?’라는 생각을 처음 했습니다. ‘좋은 어른’이라는 단어는 ‘인권 변호사’란 단어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법은 인권을 위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사실 모든 변호사가 인권 변호사죠. 좋은 어른이라는 의미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어른이란 무엇인지 계속 고민할 때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땐뽀걸즈> 이승문 감독 “사랑은 평등한 거니까요”, 맥스무비, 2017.10.27) http://news.maxmoivie.com/346702
어른이라면 좋은 어른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좋은 사람이기 위해 꼭 어른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성인, 비청소년은 어떻게 청소년에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규호 선생님은 격의 없는 말을 예의 없음이 아니라 친근함으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했고, <땐뽀걸즈>의 이승문 감독은 그런 이규호 선생님과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댄스스포츠 동아리 학생들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사랑은 평등하니까. 그냥 그게 자꾸 너무 좋아서, A와 B와 C를 떠올린다. 영화를 부쳐주고 싶은 얼굴들. 너무 늦었겠지만.
이정연(도서MD)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