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하고 따뜻한, 그래서 더 낭만적인 소설가 강병융이 책과 함께 떠난 유럽 도시 산책.” 『도시를 걷는 문장들』 을 설명하는 카피를 읽고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떠나고 싶어졌다. 1975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2013년부터 슬로베니아에서 살고 있는 강병융. 그는 “여행의 행복은 장소가 아닌 내가 만드는 것”이라 여기고, “’떠나서 읽음’,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는” 소설가다. 이같은 믿음 덕분에 나온 에세이를 앞에 두고, 작가와 독자의 만남을 주선해보고자 이메일을 보냈다.
당신의 후속작을 꽤나 기다렸다. 어떻게 쓰게 된 에세이인가?
어느 날, 한 웹진 담당자로부터 페이스북 메시지가 왔다. 그러니까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슬로베니아는 새벽, 한국은 한참 일을 할 시간이었다. “유럽과 책에 관한 이야기를 써달라”는 메시지였는데, 여행은 좋아하고 책은 항상 읽고 있으니 쓰겠다고 했다. 연재가 2년 넘게 이어졌고 그 글들이 『도시를 걷는 문장들』 의 뼈대가 됐다. 연재가 끝난 뒤 한겨레출판사의 한 편집자가 그 ‘뼈대’로 같이 건물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고 책으로 만들어졌다. 두 사람의 제안이 없었다면 내 문장들은 지금쯤 도시가 걷는 대신, 방구석에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을 것이다.
집필 기간은 얼마나 걸렸나?
총 집필 기간은 물론 44년이다. 그건 내가 세상을 살아온 세월이기도 하다. 모든 작품은 살아온 만큼의 집필 기간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이 모든 작품에, 모든 글에 투영된다. 심지어 이 재미있는 인터뷰에도 44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앗! 획기적인 답변이다.
아님, 말고! 사실, 집필에 정해진 시간이 없다. 마치 페이스북을 하는 시간이 정해진 것이 없고, 인스타그램에 사진 올리는 시간이 특정된 것이 아닌 것처럼. 내가 하고 싶을 때 쓴다. 하지만 여기선, “숨 쉬는 시간을 특정할 수 없는 것처럼 쓰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굳이 말하자면, 내가 살아 있는 시간이 바로 쓰는 시간이다”라고 대답할 생각이다.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고 당장 여행이 떠나고 싶어졌다. 유럽은 못 가도 동남아라도! 아니 제주라도 제발!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보니 꼭 멀리 가야만 여행이 아니지, 싶더라. 일상 속에서도 책 한 권으로도 여행은 할 수 있으니까.
동의한다. 결국 이 책은 ‘떠나서 읽으며 깨달은 나에 관한 글들’이다. 질문한 것처럼 그것이 ‘일상’과 , ‘비일상’을 오간다. 사실, 내용은 ‘책’에 관한 것이라도 괜찮고, ‘여행’에 대해 혹은 그렇지 않아도 문제없다. 중요한 것은 ‘나’다. 나를 좀 더 생각하자, 더 나아가 나‘만’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내 경우에 그것이 여행과 독서를 통해 발현되는 것이고, 여행과 독서는 일상이 될 수 없으니, 비일상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썼다. 정말, 사람들이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겠다. 자기만 생각하는 풍토가 만연했으면 좋겠다. 그냥 ‘내’가 좋은 것을 팍팍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내가 좋아서 팍팍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행복의 시작이고, 그렇기 위해서 ‘일상과 비일상을 오가며 나를 찾아보자’는 것이 이번 에세이에서 하고 싶은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일상과 비일상이 완벽히 구분되는 인생은 없는 것 같다.
예전에는 성스러운 시간과 속된 시간, 즉 세속적인 시간이 구분되어야 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주중은 일을 해야 하는 ‘성스러운 시간’, 주말은 ‘쉬거나 즐길 수 있는 속된 시간’. 두 시간을 갈라놓을 수 있었다. 놀 때는 놀고, 일할 때는 일하자는 생각이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개념이, 두 시간의 경계가 사라졌다. 예를 들어, 속된 시간을 즐기기 위해 클럽에 있는 주말에도 스마트폰은 계속 성스러운 업무 지시를 내리지 않는가? 성스럽게 일해야 하는 업무 시간에도 짬짬이 속된 페북질이 가능한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속된 짓이 성스러운 업무 이상의 가치를 창출하기도 한다. 그래서 성과 속, 일상과 비일상을 함께 누릴 줄 알아야 한다. 그 안에서 나를 찾고,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여행지 중에 다시 한 번 가고 싶은 곳과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책 속에 “베네치아라는 지구다움”이라는 글이 있는데, 베네치아에 가서 앤디 위어의 『마션』 을 읽으면서 느낀 이야기다. 베네치아에 가서 『마션』 을 읽고 있자니, 그곳이 마치 지구처럼 느껴지고, 내가 살고 있는 류블랴나가 화성처럼 느껴졌다는 이야기인데. 혹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베네치아도 좋지만, 진짜 화성에 한 번 가보고 싶다. 화성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이 뭐냐고 묻는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도시를 걷는 문장들』 을 읽고 싶다고. 솔직히 지금은 그렇다.
당신의 본업은 소설가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 출판시장은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인기 있지 않나? 소설이 더 인기 있었던 과거가 다시 찾아올까?
긍정적인 소설가에게 왜 소설이 덜 팔리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곧 잘 팔릴 것이다, 기다려라!”이다. 어린 시절 나는 한국 영화를 좋아했는데,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했다. 왜 세상에 재미있는 것도 많은데 굳이 한국 영화를 보냐고. 지금은 어떤가? 문학도 그런 시기가 올 것이다. 소설에게도 다시 그런 시기가 올 것이다. 나는 그 무엇보다도 서사의 힘을 믿는다. 문학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에세이도 지금보다 더 흥할 것이고, 소설은 더 흥할 것이다. 지금을 소설의 침체기라고 부른다면, 그것 일시적인 것일 뿐이고, 그래야만 한다.
세 번째 에세이다. 당신은 소설을 쓰면서, 에세이를 함께 작업하는 작가인데. 소설을 쓸 때와 에세이를 쓸 때의 정체성이 좀 다른가?
그건, 일종의 ‘로버트 브루스 배너(Robert Bruce Banner)’와 ‘헐크(Hulk)’의 관계 같다고 보면 된다. 아시다시피, 브루스 배너의 성격은 대부분의 경우 나긋나긋하고, 되도록 점잖은 척하려고 하지 않나? 헐크는 그냥 ‘헐크’ 아닌가? 폭주의 아이콘, 분노의 대명사 같은 존재 아닌가? 나의 경우, 수필은 브루스 배너처럼, 소설은 헐크처럼 쓰려고 노력한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브루스 배너를 만났다고 상상해보자. 어떨까? 오, 젠틀한 박사님 아닌가? 매력있는 중년남이다. 누구에게 소개해도 크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 내 수필이 그랬으면 좋겠다. 반면, 헐크는 어떤가? 외모부터 거부감이 생긴다.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그건 숨겨진 헐크의 분노의 파워를 보지 않더라도 그렇다. 읽지 않고, 그냥 내용만 들어도,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소설, 이런 거 써도 괜찮나 싶은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본다면?
사회를 향한 어떤 강력한 분노가 담긴 소설, 그것이 헐크처럼 파워풀하면 더 좋겠고. 수필을 쓰는 동안 나는 의식적으로 중얼중얼 반복한다. 난 브루스 배너야, 난 부르스 배너야. 하지만 누군가 내게 누구냐고 물으면 ‘헐크’라고 대답하고 싶다. 세상을 향한 분노를 토해내는 사람, 그래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 그런 사회를 향한 분노(와 조롱)가 담긴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 그 방식이 조금 거칠더라도, 말이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류블랴나는 어떤 곳인가?
내 아내 같은 도시다. 그래서 심지어 『아내를 닮은 도시: 류블랴나』 라는 책까지 쓰지 않았나! 그럼, 다시 묻고 싶겠지. “아내 같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 바로 “사랑스럽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고? 작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우면서 인간에 대한 배려가 있다.
이번 책에서 유독 에스프레소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에스프레소 더블샷’을 좋아한다. 집에서 일리 커피를 내려 마시거나, 단골 카페에 가서 자바 블루를 마신다. 류블랴나에 오기 전에 커피를 전혀 마시지 않았는데, 여기 와서 하루에 두 잔씩 마신다. 이유가 뭐냐고? 너무 싸서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커피의 노예가 되었다. 6년 전에, 처음 왔을 때. 에스프레소 한 잔이 1유로도 하지 않았으니. 지금은 평균 1.2유로 정도 한다.
『도시를 걷는 문장들』 을 특히 좋아할 독자층을 상상해본다면?
어려운 질문인데. 일단 1971년생들에게 사랑받는 책이었으면 좋겠다. 2017년 말 기준으로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민등록인구는 5,177만 8,544명이다. 그 중 가장 인구가 많은 연령은 당시 46세(1971년)로 94만 4,179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1971년생이 좋아하는 책이 가장 많이 팔릴 확률이 높다나 뭐라나. 한마디로 보통사람들이게 사랑 받는 책이면 좋겠다.
이 책을 읽어줄 독자들에게 자유롭게 한 마디를 한다면?
사랑한다! 진심이다! 가족, 친구들, 제자들 다음으로 당신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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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 문장들강병융 저 | 한겨레출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에 대해 살며시 속삭인다. 어쩌면 저자만의 유럽 산책이, 그의 독서가 우리에게도 행복 바이러스를 전할지도 모를 일이니, 귀를 기울여 그의 목소리를 들어볼 차례다.
프랑소와 엄
알고 보면 전혀 시크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