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기 “법은 언제나 옳은가”
집필을 하는 내내, 혹시 주변 판사들에게 누를 끼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어요. 『합리적 의심』은 사건의 판결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게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법의 원리와 대중과의 괴리를 생각해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에요.
글ㆍ사진 성소영
2019.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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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출신 추리소설가, 도진기 작가가 신작  『합리적 의심』 으로 돌아왔다. “공직을 떠난 뒤에야 출간할 수 있었던 작품”이라는 이번 소설은 그동안 도진기 작가가 써온 추리물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법정물로,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다. 2010년 단편소설 『선택』을 통해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도진기 작가는 평일에는 판사, 주말에는 작가로 활동하며 그동안 8편의 장편소설을 펴낸 바 있다.


지난 3월 13일, 망원동 ‘카페홈즈’에서  『합리적 의심』  출간기념 북토크가 열렸다. 도진기 작가의 첫 북토크였던 이번 행사는 법정물을 구상하게 된 계기부터 판사로서의 경험, 앞으로의 작품 계획까지 그간 독자들이 궁금했던 모든 것을 해소하는 대화의 시간이었다.


소설 『합리적 의심』 은 주인공 부장판사 ‘현민우’가 재판을 담당한 젤리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재판이 일어나는 법정물이다. 한 남녀가 모텔에 투숙한 지 얼마 후, 여자가 프론트로 다급하게 달려와 남자의 사고 소식을 알린다. 남자친구가 젤리를 먹다가 목에 걸려 숨을 쉬지 못한다는 것. 급히 병원으로 옮겨진 남자는 숨을 거두고, 놀랍게도 거액의 보험금이 여자에게 지급된다. 검찰은 보험금을 노린 계획적 살인이라고 판단해 여자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부장판사 현민우는 여자의 범행을 확신한다. 하지만 배석 판사들이 “그게 정말 합리적 의심을 거친 판결이냐”고 물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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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였기에 쓸 수 있었던 이야기


지난 2010년, 1심과 2심의 엇갈린 판결로 세간을 들썩이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인천의 한 모텔에서 여성이 낙지를 먹다가 사망한 뒤, 남자친구가 거액의 보험금을 수령했던 ‘낙지살인사건’이다. 검찰은 피해자가 평소 낙지를 싫어했고, 몸부림 친 흔적이 없었던 점, 누워있던 곳이 술상과 거리가 먼 출입구 쪽인 점, 별다른 소득이 없는 피의자에게 거액의 생명보험금이 입금된 점 등을 토대로 피의자가 여성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피고인은 무죄를 판결 받았다. 벌어진 일은 하나인데, 결론은 둘인 이 사건을 보며 도진기 작가는 판사를 넘어 한 시민으로서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꼈고 이를 소설로 풀어냈다고 밝혔다. 

 

“이 소설은 낙지살인사건을 모티프로 썼습니다. 작중 현민우 판사가 느꼈던 감정은 곧 제 감정이기도 했죠.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피고인이 2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저는 무척 충격적이고 화가 났습니다. 판결이 이해가 가지 않아 추후에 판결문을 찾아보기도 했었죠. 개인적으로는 피고인이 분명 범인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피해자 측을 돕고 싶었을 만큼 안타까웠습니다. 그 마음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만큼, 도진기 작가는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음을 토로했다. 자신이 판사의 신분으로 20여 년을 살았던 것도, 그 고민의 한 몫을 담당했다. 혹여 다른 판사가 내린 판결에 비난을 가하는 것처럼 보일까 우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담당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린다는 게 조심스럽기도 했다. 결국 소설의 구성을 더욱 촘촘하게 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합리적 의심』 이 완성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책을 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의심스럽다’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며 규탄하는 식으로 소설을 썼어요. 하지만 어느 정도 집필이 진행되면서 분풀이로 소설을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저히 작품이자 메시지로 승화시켜야 했죠. 그래서 사건 자체와 지나치게 동일시 될 것을 우려해 낙지를 젤리로 바꾸고(웃음)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 픽션을 만들었죠. 시작은 진범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응징이었지만, 어쨌든 제게는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사실 『합리적 의심』 을 완성한 지는 4년 가까이 되었는데 고민이 많아 출간이 늦어졌어요. 법원이라는 조직이 워낙 예민한 곳이기 때문이죠. 판사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행해지는 금기 중 하나가 다른 판사의 재판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설을 쓴다는 게 오해 받기 딱 좋은 일처럼 느껴졌죠. 그래서 한참 가지고 있다가 이제야 출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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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기사에서 시작된 소설은 단순히 피의자를 향한 분노에 의해 집필된 것은 아니었다. 법의 심판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 판사를 떠나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싶은 한 시민으로서 느낀 안타까움이  『합리적 의심』 을 완성하게 했다. 이 작품은 오랜 기간 판사로 살아온 도진기 작가가, 판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첫 번째 소설이다. 그만큼 법정의 생생한 묘사와 판사라는 직업인의 고뇌가 잘 묻어나는 작품이다.


“1심 선고 기사를 뒤늦게 찾아보았는데, ‘피고인이 법정 밖으로 나가면서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는 문장이 있었어요. 그걸 보고, 과연 이 사람이 정말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린 상황이라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나 의심이 들었습니다. 판고를 받는 순간은 결코 연기를 할 수 없는 순간이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살인 사건의 경우, 그 죄가 더욱 무겁기에 법정에서 피고인의 욕망과 공포가 그대로 발현됩니다. 그런데 이토록 태연하게 인사를 하고 나갈 수 있을지, 이게 과연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려 시달리다가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인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소설은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죠. 사실 집필을 하는 내내, 혹시 주변 판사들에게 누를 끼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어요.  『합리적 의심』 은 사건의 판결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게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법의 원리와 대중과의 괴리를 생각해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에요. 나름대로의 자부심이라면 판사를 주인공으로 그려, 판사들의 생생한 삶을 나타낸 작품은 아마 처음이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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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와의 Q&A


도진기 작가는 “작품을 처음 출간한 초창기는 ‘작가로서 독자들에게 알려지고 싶다’는 마음과 ‘조직에서 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충돌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판사의 신분으로, 그가 독자들과 활발히 소통하지 못했던 이유다. 이번 자리는 도진기 작가의 첫 북토크인 만큼 오랜 팬들과의 자유로운 대화 시간으로 가득 채워졌다.

 

무척 바쁘실 것 같은데, 글은 언제 쓰시나요?


판사일 때는 오히려 여유가 있었습니다. 생활이 규칙적이니까요. 특히 주말에는 시간을 낼 수가 있으니 거의 주말에 정기적으로 글을 썼었어요. 그런데 변호사가 되고 나니 오히려 글을 쓸 시간이 부족하네요. 낮에는 재판에 출석하거나 의뢰인과 상담을 해야 하기 때문에 차분히 앉아서 서류를 읽을 시간이 없어 개인 시간이 나면, 재판에 관련된 서류를 보게 되거든요. 그래서 변호사가 된 후에는 소설을 거의 못 썼습니다. 그래도 주말에 짬을 내려 노력하고 있어요. 

 

다음에도 판사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실 계획이 있나요?


사실  『합리적 의심』 을 쓸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요. 이번 소설의 반응이 좋아서 고민이 됩니다.(웃음) 그리고 제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나니, 판사가 달리 보이는 면이 있더라고요. 판사에 대한 배신감이랄까요? 이건 결코 겸손이 아니라, 저는 법원에 있을 때 제가 제일 실력이 떨어지는 판사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판사들이 나보다 훨씬 낫다’는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판결에 대한 비난을 받으면 판사를 옹호하는 입장이었거든요. 그런데 변호사로 법정에 서서 판사를 보니, 동료로 볼 때와 다른 느낌이 있는 거예요.(웃음)굉장히 젠틀하고 합리적인 것 같았던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좀 있었죠. 이런 경험을 하면서 소설에 녹여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합리적 의심』 에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심판하느냐”는 동료 판사의 말에 주인공은 “나는 그저 사회 안에서 판사가 맡은 역할일 뿐인데 뭘 그리 거창하게 이름 붙이느냐고 넘겼다.”고 대답합니다.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작가님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이건 실제로 동료와 나눴던 대화를 차용한 거예요. 한 동료가 그런 말을 하기에, 제가 “뭘 그리 거창하게 생각하느냐”고 넘겼던 적이 있거든요. 지금은 조금 더 냉소적인 입장이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법의 판결에 기대하는 건 정의, 억울한 이들의 구제 같은 부분이지만, 사실 법의 관심은 ‘질서 유지’입니다.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함이라기 보다, 그저 사회에서 필요한 장치일 뿐인 거죠. 그래서 법이 정의나 도덕을 찾아줄 것이라 생각하는 건 환상에 가깝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배트맨은 정의의 사도이지만 법적으로는 기물을 파손하고 폭행을 저지른 범죄자에 불과하죠.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와 법은 개념이 달라요. 법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슈를 살펴봐도, 층간소음으로 고통 받던 피해자가 스피커를 달아서 윗집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경찰에 소환이 되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피해를 준 사람은 그냥 두고, 왜 피해를 입은 사람을 처벌하냐고 말하는데요. 법에는 사적 보복이 금지돼있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법은 정의실현보다는 질서유지를 위해 존재합니다.

 

작가님의 작품 『붉은 집 살인사건』 ,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 를 읽은 뒤 『합리적 의심』 을 읽었는데, 두 전작보다 지금의 작품이 훨씬 문장도 좋고 더 잘 읽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개인적인 수련 과정이나 노력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초기 작품들을 쓸 때는 제게 문학 작가로서의 마음가짐이 좀 부족했던 게 사실입니다. 소설은 그저 재미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가 소설에서 기억에 남는 건, 딱 떨어지는 문장이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여겼기 때문에 문장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문장에 대한 지적을 받고 좀 부끄럽더라고요. 또 글은 쓰면 쓸수록 느는 것 같아요. 꼭 누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짧은 시간에 여러 권의 책을 쓰다 보니 스스로 글 실력이 늘었는지, 전작들을 보면 부끄럽고 다시 쓰고 싶은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의 변화가 작품을 좀 더 나아지게 했던 것 같아요. 또 다른 계기가 있다면, 저는 비판을 열린 태도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가 저를 판사에서 작가로 거듭나게 해주었다고 생각해요. 판사들은 사실 비판에 익숙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작가가 되고 나니 아무리 듣기 싫다고 해도 엄청난 비판을 듣게 됩니다.(웃음) 그때 건전하고 합리적인 비판들을 스스로 수용했던 게 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작가님처럼 추리 소설을 잘 쓰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하면 좋을지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추리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어떤 준비를 해본 적은 없어요. 자연스럽게 독에 물이 차서 넘친 과정을 거쳤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추리소설은 속칭 마이너하고, 장르적인 소설로 취급받곤 하는데 저는 오래 전부터 이 분야에 큰 애정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포, 무협지, 만화, 추리소설 등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그게 아마 바탕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고, 상상하는 것을 즐기는 점도 제가 추리소설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예컨대  『정신자살』 의 경우, 결말로 인해 독자분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는데요.(웃음) 일반적인 소설가들의 상상력과 다른 부분이잖아요. 이렇게 엉뚱하고 색다른 상상을 하는 버릇이 쌓여온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그 결말을 쓸 때 굉장히 신선하다고 생각해서 기대를 많이 했거든요. 정말 큰 문제는 아직도 왜 그 결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웃음)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사고를 치지 않을까 싶어요.

 

작가님 작품에 등장하는 변호사 ‘고진’과 탐정 ‘진구’는 다른 듯 비슷한 느낌이 드는 인물입니다. 혹시 작가님의 페르소나인 것인가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생생한 주인공을 그려내려면 제 안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지 않고는 힘든 것 같거든요. 작품 속에 ‘호연정’이라는 여성 캐릭터도 등장하는데, 매력적인 캐릭터이지만 길게 이어질 수 없었던 것이 여성의 심리 묘사를 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고진과 진구는 다른 인물이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일부 면면들은 제 속에서 나온 게 맞습니다.

 

『합리적 의심』 의 사건을 실제로 담당하는 판사였다면, 작품과 같은 판결을 낼 수 있으신가요? 혹은 이 사건의 피고인을 변호해야 할 상황이 생긴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나요?


사실 이건 저도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에요. 그래서 책을 통해 독자분들에게 판단을 맡긴 것입니다. 결론을 ‘이렇다!’라고 내리지 못하고, ‘이러이러한데, 여러분 어떻습니까?’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죠. 어쨌든 제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이 사건을 담당한 판사였다면 아마 처벌하는 쪽으로 판결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변호사라면, 무작정 피고인을 변호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양심도 양심이지만 제가 무죄라는 걸 믿지 않으면서 진정한 변론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사건의 당사자가 와서 제게 변호를 의뢰했는데, 명백히 유죄라고 보여진다면 무죄 변론은 포기하고 정상참작을 제안해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의뢰인이라면 변호를 하지 않겠죠.

 


 

 

합리적 의심도진기 저 | 비채
권말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 자체가 아닌 이야기가 전하려는 것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당부한다. 인간성의 밑바닥을 처절히 드러내는 심리묘사와 이어지는 반전은 장르소설의 매력 또한 유감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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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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