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일제의 심각한 조선인 차별과 수탈에 부글부글 끓던 사람들이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조선인들은 여기서 희망을 본 것이다. 학생들, 노동자들, 어린이와 교사들… 무명의 사람들이 조선독립의 희망을 품고 만세를 불렀다. 거기에 사람들이 있었다. 역사학자이자 조한성은 저서 『만세열전』 에 바로 이 이름들을 호명했다. 이들은 역사에 이름 한 줄 새기지 못했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3.1운동의 ‘실행자들’이었다.
“희망을 건 사람들은 행동하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강조하는 조한성이 『만세열전』 을 집필하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2016년 촛불 시국 즈음이었다. 광장에 나가는 보통의 사람들을 보면서 100년 전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불렀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친구의 손을 잡고 거리에 나왔던 사람들. “그저 당연한 일일 뿐”이라고 말한 사람들. 그는 이들을 통해 3.1운동을 “현재와 떼어놓고는 볼 수 없는 역사”라고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다.
운동이 시작되자마자 발행된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의 제작과 배포를 위험을 무릅쓰고 9호까지 맡아 했던 경성서적조합 서기 장종건, 3월 1일과 5일 시위에 학생들을 참가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 대표 장채극, <각성호회보>를 만들어 배포시킨 경성공업전문학교 학생 양재순과 노끈장수 김호준, 덕수궁파출소에 근무하던 순사보 정호석과 그의 열 살 딸 등 『만세열전』 속 사람들이 이제야 제 모습을 찾았다.
100년 전 3.1운동과 2016년 촛불
꼭 100년 전 오늘의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남달랐어요. 쓰는 기분은 더 그러셨을 것 같은데요. 어땠나요?
준비를 오랫동안 했어요. 첫 번째 책 『한국의 레지스탕스』 (2013)와 두 번째 책 『해방 후 3년』 (2015)을 같은 시기에 집필했거든요. 그걸 쓴 후 어떤 것을 쓸지 고민했죠. 그때 큰 사건들에 관심이 갔어요. 거대한 물결에 원치 않게 휘말렸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거리에 나왔고, 싸웠을까 궁금하더라고요. 3.1운동을 전부터 생각하던 터라 자료를 찾다 보니 심문 자료들이 나왔는데요. 거기에는 역사책에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거나 이름 정도만 언급되었던 사람들이 훨씬 많았어요. 그 가운데에는 훈장도 못 받은 사람도 많았고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얼핏 보기에도 고된 작업이었을 것 같거든요. 교차 검증도 많이 해야 했죠?
자료량이 굉장히 많았는데요. 계속 봤어요. 특이한 말을 한 사람, 특이한 행동을 한 사람, 그런 식으로 메모해서 쓰고 싶은 사람을 정리했는데요. 문제는 이 자료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느냐, 였어요. 가령 심문 기록도 왔다 갔다 하거든요. 3월 5일 학생들 시위 때 학생대표인 강기덕과 김원벽이 인력거를 탔다고 하는 내용이 역사책에 나오는데요. 심문 기록으로 보면 불명확해요. 인력거를 탄 사람이 다 다르게 나오죠. 의도적으로 속인 경우도 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안 잡혔으면 하는 바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숨겨주고 싶은 마음도 있던 거고요. 그런 심문 기록을 기존 역사서와 비교해가면서 정리하는 작업이었어요.
역사 속에 숨어 있던 보통 사람들을 발견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는데요. 이들에게 시선이 갔던 이유, 이들을 기록하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가 궁금해요.
심문 조서를 읽는데 동질감을 느꼈어요. 자료를 한창 보던 때가 촛불 시기였거든요. 저도 거리에 나갔죠. 또 제가 일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국정교과서 문제로 집회도 많이 해서요. 그 시기에는 매번 나갔는데요. 보면 다양한 사람이 있잖아요. 준비를 많이 해서 시위에 나가겠다, 라는 생각보다는 그냥 시위가 있다더라, 가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나오기도 하고요. 또 그 과정에서 아이들과 같이 가고 싶다는 생각도 하죠. 그런데 자료를 읽다 보니까 비슷한 사람들이 막 나타나는 거예요. 가령 정호석이라는 순사보는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거리에 나오는데요. 광목을 사서 자신의 피로 ‘대한국 독립만세’라고 적은 후 자신의 딸이 있는 학교로 가요. 그 딸이 10살이었는데요. 같이 나가서 독립만세를 외친 거죠. 그게 촛불의 마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1운동은 2016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시위와 닮았다”(8쪽)고도 하셨죠.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200-300명이 모여서 만세를 부르러 갔어요. 그 학교 위치가 현재의 정독도서관 자리여서 거기서 파고다공원까지 쭉 내려가는데요. 그 중에는 선배가 가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따라갔다가 현장에서 생각이 바뀌는 거죠. 시위에 참가하면서, 또 심문을 받으면서 더 그런 마음이 생기는 거고요. 감옥에 갇혀 얘기를 나누면서 또 마음이 강화됐을 거예요. 가령 심훈(심대섭)이 그랬어요.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있거든요. 당시 감옥은 똑바로 누울 수도 없이 사람이 많아서 3교대, 4교대로 쪽잠을 잤다는 자료도 있을 정도예요.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 감옥 안에 있는 화장실에 수많은 사람들의 변이 넘쳐나는 상황, 벌레 등에 관한 얘기가 심훈의 편지에 적혀 있는데요. 그렇게 고통스럽지만 아무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런 일을 겪으면서 큰 힘을 느낀 거예요.
심대섭은 감옥살이의 힘겨움을 담담히 털어놓는다. 그런데 글이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글은 아픔과 슬픔에 그치지 않고, 그 너머의 어딘가에 가닿는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그려!”(243쪽)
이 책을 통해 그런 점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처음부터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는 것. 심훈도 여러 단계가 있어요. 19살밖에 안 된 나이에 갑자기 그런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혼란 속에서 심문을 받았으니까 진술이 왔다 갔다 하고요. 한편으로는 진술이 거듭될수록 단련되어가는 모습도 보여요. 동시에 젊으니까 숨겨야 하는 진실도 가끔은 확 내지르기도 하죠. 그건 나중에 일기장에 후회했다고 적기도 했는데요.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구체적인 이야기들
역사책이나 문학작품 등을 보면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많은 사람들의 자각과 각성의 계기가 3.1운동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가 많아요. “민주주의를 위한 모든 투쟁의 앞에 3.1운동이 있다”(8쪽)고 하신 이유도 그런 것이겠죠?
우리 민주주의의 시작은 동학농민운동(1894~1895)이라고 얘기를 하는데요. 거기에는 집회가 있어요. 그보다 먼저 임술민란(1862)도 그러했는데요.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농촌 중심이었죠. 도시 시위가 본격화된 건 3.1운동이 처음이고요. 이후는 점점 도시화가 되니까 시위가 도시에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어요. 그런 면에서도 3.1운동이 중요하고요. 무엇보다 이런 큰일이 한 번 생기면 세대가 생겨요. 3.1운동세대, 4.19세대, 이런 게 생기는 거죠. 당시 일제도 이것을 되게 두려워해요. 이 만세 시위를 경험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생각했을 것이며 얼마나 오랫동안 독립을 생각할 것인지, 이들이 주동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를 두려워하는 거죠. 그런 일제 기록이 있어요. 이게 중요해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잖아요. 3.1운동을 계기로 많은 독립운동가가 양산되었고, 민중들의 태도도 바뀌었어요.
3.1운동의 성과를 대부분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수렴해요. 그것도 맞는데요. 그것만 강조하면 다양한 것을 잃어버려요. 3.1운동을 계기로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거든요. 3.1운동세대 일부는 만주로 나가서 독립운동을 하고요. 그 중 일부가 의열단이 돼요. 김원봉이 대표적인 인물이죠. 또 박열 같은 아나키스트, 박헌영 같은 공산주의자가 등장하고요. 책에도 나오는 김사국이라는 걸출한 인물은 바로 두각을 나타내며 활동을 하죠. 이 사람이 서울파 공산당의 대부가 되거든요. 이런 사람들이 다 3.1운동을 통해 나온 거예요. 이런 다양한 운동은 3.1운동이 있지 않았다면 나오기 힘들었다고 봐요. 이런 점을 기억해야 하죠. 또 만만치 않은 조선인들이 생겨나거든요.(웃음) 한 번 뭉쳐서 힘을 느낀 사람들은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기 힘든 거죠.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민족을 실감한 거예요.
많은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랄까, 3.1운동의 의미를 재조명할 필요성이 그 점에서 더 높아지는데요. 이전까지는 민족대표 33인처럼 특정 인물들을 중심으로만 이해해왔으니까요.
일단 3.1운동을 교과서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죠.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고요. 연구도 많이 진행이 돼서 그간 연구 성과도 쌓인 게 많죠. 하지만 그에 비하면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규명은 미흡한 부분이 있어요. 200만이나 참여한, 워낙 큰 사건이다보니 이를 다 아우르는 전체 모습을 그리려는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요. 구체적인 개인에 대한 연구는 얼마 안 된 것 같아요. 자발성 같은 부분도 비교적 최근 연구에서 조명된 것 같은데요. 한계는 있어요. 심문 자료에 개인들의 이야기가 많은데 이걸 어디까지 믿고, 써야 하는지 판단해야 하는 문제도 있고요. 그러니까 보조적으로만 사용을 했죠. 3월 5일 시위에 대한 것도 실은 별로 없어요. 논문도 찾으려면 1960년대 논문 같은 걸 찾아야 해요. 다만 최근 들어 그런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올해도 많이 쏟아질 거예요. 여러 역사가 분들이 필요성을 느끼시고 구체적인 내용을 채우기 위한 작업을 하고 계시는 단계니까요.
이번 책 작업을 하시면서는 어떠셨어요? 자료와 자료 사이의 빈 공간 또는 자료의 신빙성에 대한 고민을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앞서 잠깐 말씀드렸지만 심문 자료가 갖는 한계가 있어요. 피의자 입장에서는 한 것도 안 했다고 하고요. 경찰이나 검사 입장에서는 덮어씌우기 위해 안 한 것도 했다고 써야 하죠. 결국 기록은 일본 쪽에서 했으니까 피고가 안 했던 말을 더 써넣을 수도 있어요. 그 모든 걸 다 생각하면서 읽어야 하는 거죠. 기존에는 그게 어려우니까 최종 판결문만 봤는데요. 그러면 거기까지 온 구체적인 이야기가 빠지는 거예요. 저는 한 사람을 가지고 그 앞부분부터 계속 읽었어요. 중요한 인물은 두 번, 세 번도 보고요. 떠오를 때까지 계속 읽었어요. 계속 보면 이 사람의 말이 어떻게 바뀌는지 보여요. 또 진실이겠다 싶은 말도 보이죠.
나중에는 이게 사실이면 어떻고 거짓이면 어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사실 규명에 대한 판단을 미루고 그 자체를 그대로 기록하기도 했죠. 혼란스럽더라도 그런 기록으로 남았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죠. 그렇게 판단한 경우도 있어요.
그 수많은 자료 가운데 책에는 다 적지 못했지만 기억에 남는 이야기도 많겠어요.
책에 적지 못한 기록이 훨씬 많아요. 한편 ‘실행자들’부분에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이야기는 최대한 넣으려고 했어요. 짧게라도 최대한 넣으려고 했는데요. 그럼에도 빠진 분들이 훨씬 많죠. 고문이 느껴지는 심문 기록들이 있어요. 앞에서는 계속 부인을 하는데 갑자기 전부 시인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러면 그 직전에 고문이 있었다는 게 보이죠. 정신적인 이상이 보이는 진술도 있고요. 예를 들어 김호준이라는 인물이 있어요. 양재순과 함께 <각성호회보>라는 지하신문을 찍어 배포한 인물인데요. 이들 심문 기록을 보면 경찰과 검찰이 둘을 죄수의 딜레마에 둬요. 막 유도를 하니까 김호준이 배신감을 느끼고 양재순을 나쁘게 말하죠. 그러니까 양재순이 “김호준이 원래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고 말하는데요. 사진을 보면 그랬다는 걸 조금은 예측할 수 있어요.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또 정신이 붕괴됐음을 엿볼 수 있는 진술도 있어요. 그런 분들은 정말 다 인정해버려요. 자기가 안 했음직한 것도 물어볼 때마다 인정을 하는 거죠. 그런 분들은 고문을 엄청나게 당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죠. 심문 방식이 그랬거든요. 붙잡은 다음 아무 얘기도 없이 계속 구타를 하고, 혼이 빠진 상태에서 심문에 들어가요. 다 인정하도록 말이에요. 그러니까 고문을 염두에 두고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책에 다 넣을 수는 없었어요.
“인심은 물이요, 한강이오”
그 중에서도 여성들이 당했던 폭력은 더욱 문제적이에요. 신체적인 폭력뿐 아니라 성폭력까지 당했죠.
계속 피의자에게 월경 주기를 물었던 ‘호리 나오요시’라는 판사는 저도 너무 화가 나서 꼭 넣어야 했어요. 그 부분을 읽어보시면 제가 너무 흥분해서(웃음) 과하게 쓴 걸 느끼실 텐데요. 정말 욕을 하면서 썼어요. 의도적으로 월경 주기를 물어서 굴욕감을 주고, 이들이 별 것 아닌 일을 한 것처럼 폄하했던 거죠. 또 3월 5일 시위에 나갔다가 검거된 학생의 진술이 있어요. 그 진술이 선교사의 기록에 남아 있는데요. 재판도 안 받고 풀려날 정도로 단순 가담이었는데도 이 학생이 며칠 동안 당한 폭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해요. 더구나 이 기록 자체가 선교사들이 믿지 못할 기록은 빼고 한 기록이거든요. 그런데도 그 내용이 너무 적나라해요.
“나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대답할 때마다 얼굴을 한 대씩 얻어맞았다. 그들은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며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 ‘이 더러운 창녀야, 너 애 뱄지?’하며 욕했고, 가슴을 드러내 보이라는 명령을 듣지 않자 윗옷을 찢어버리고 몸서리쳐지는 온갖 못된 말을 했다.”(235-236쪽)
그 선교사 기록 중 책에 다루지 않은 것이 있어요. 강계 지방의 소년 11명이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왔대요. 그 중 두 명이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고 나와요. 나머지도 상태가 심각한데 한 명은 벌써 엉덩이 괴사가 진행되고 있고요. 다들 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로 태형을 받은 학생들인 거예요. 이들에게 물었더니 3일에 걸쳐 90대를 맞았대요. ‘조선태형령’에 하루 30대 이상을 때리면 안 되고, 최대 3일 동안 90대를 때릴 수 있다고 나와 있거든요. 그런데 이런 규정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어요. 3.1운동 기록을 보면 태형을 받고 불구가 되신 분들이 많아요. 만세 현장에 나간 사람들 중 재판을 받은 사람은 사실 소수고요. 대부분은 태형을 받았던 거예요.
또한 인종익이라는 인물이 참 마음에 많이 남아요.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인물이라 더 그렇기도 하고요.
이분은 다 겪은 거예요. 당시 나이가 49살 정도고, 동학농민운동에도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거기서 시작해 천도교까지 오면서 천도교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던 분인 거죠. 믿을 만한 인물이니까 선언서 배포의 책임을 진 건데요. 인종익은 특히 놀라운 인물이에요. 전주와 익산을 거쳐 청주로 갔고, 거기서 붙잡히는데요. 처음에는 전주와 익산 얘기를 안 하고, 2-3일 버틴 후에 얘기를 해요. 선언서가 배포되는 시간을 계산한 거죠. 진술 과정에서도 대단한 말을 많이 하는데요. “인심은 물이요, 한강이오. 아무리 막아도 물은 새어나오게 되지 않겠소?”라거나 “만인이 죽어 백만 인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죽음도 불사할 것이오.”라는 말에서 그 대단한 신념이 느껴지잖아요. 인종익과 김동혁이라는 인물은 책 작업에서 제일 먼저 쓴, 책의 모델이 되는 인물이었어요.
앞서 학생들은 최대한 책에 넣으려 했다고 하셨는데요. 3.1운동 당시 이 시위를 1회로 끝내지 않으려고 기획했던 학생들에 대해 “향후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110쪽)고도 하셨잖아요. 이들의 자발성이 아주 중요할 것 같거든요.
이 학생분들이 현명하셨던 게 처음 세운 계획에서 독립선언서 발표만 포기를 하고 나머지는 지키신 거예요. 민족대표들이 대부분 종교인들이니까 이들이 시위까지 책임지지는 못할 거란 판단이 있었겠죠. 믿었던 부분도 있었을 거고요. 그러니까 이후 시위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하려면 여러 차례 해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간부를 나눴고요. 3월 5일 시위에 모든 역량을 쏟기 위해 3월 1일 시위에는 중등학생들이 나갈 수 있도록 배치를 했죠. 3차 시위, 4차 시위까지 고려해서 1선 간부는 3월 5일 시위에 간 거고, 2선 간부는 3차, 4차를 하겠다고 계획했던 거죠. 하지만 3월 5일 시위를 학생들이 계획했다는 걸 경찰이 알아서 하숙집을 다 뒤져요. 그때 학생들 대부분이 검거가 되고요. 그러나 이 모든 걸 계획했다는 게 대단한 거예요.
친일 인물에 대해서는 각주를 꼼꼼하게 달았어요. 작가님의 의도도 분명히 있었을 텐데요.
왜냐하면 알고 있잖아요. 3.1운동 한 사람들 중 친일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이걸 같이 안 써놓으면 좋은 인물로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제 책에서만큼은 그런 착각을 하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대표적인 인물이 최린이죠. 3.1운동 당시 멋진 말도 많이 하거든요. 비중이 컸던 인물이고요. 그런데 그만큼 1급 친일을 했단 말이죠. 그때는 중요한 인물이었으나 이후에는 아주 기회주의적이었다, 라는 사실을 다 봐야 하는 거예요.
3.1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지만 결국 친일을 한 최린 같은 사람도, 큰 뜻이 없었다가 3.1운동을 거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심훈 같은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해요.
그런데요. 친일하기도 되게 힘들다는 얘기를 하곤 해요. 저희 민족문제연구소가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작년 8월에 열었어요. 거기 길목 하나를 한쪽은 친일파, 한쪽은 독립운동가 자료를 구성해놓고 관람객이 그 길에 들어설 때 당시를 살았다면 어느 쪽을 택했을 것 같은지 질문을 하거든요. 독립운동가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차라리 친일을 하지 않았을까, 라고 말하는 분들이 꽤 많은데요. 사실은 친일이 더 힘든 거예요. 조선인으로서 갖고 있는 정체성을 버리고 자신을 속이며 살아야 하잖아요. 최린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매순간 후회와 갈등을 하면서 점점 깊숙이 친일을 했겠죠.
민주주의 운동의 첫 시작에
탁월하고, 기록으로 남은 몇 명의 인물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대중의 관심도 많이 확장되고 있는 것 같아요. 이건 또한 지금의 시대정신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어떻게 보세요?
세밀하게 가면 그것이 주는 재미가 또 있어요. 저도 그런 사람들에 관심이 쏠리니까 점점 더 그 연구를 하는 거고요. 말씀처럼 사회적 흐름도 있는 것 같아요. 3월 1일이나 3월 5일 시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대해 연구하시는 분들이 있고, 조만간 그 연구결과들이 나온다고 알고 있어요.
이 책도 3.1운동 전체를 다룬 건 아니에요. 서울 중심이라는 한계도 있고요. 처음에는 다 다루고 싶기도 했지만 보통 사람들을 다루겠다고 결심한 후 지금의 책이 됐어요. 200만 명이 참여한 3.1운동 중에 이 책은 극히 일부만을 다룰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3.1운동 과정에서 제일 아쉬운 장면을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소설적 상상이긴 하지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싶은 장면이 있을 것 같거든요.
민족대표 33인이 선언서 발표 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명월관지점으로 변경하는 순간이죠. 그곳에서 강기덕이 가서 크게 항의도 하는데요.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에요. 3.1운동 전까지 있었던 대중운동을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만민공동회(1898)와 1907년 대한자강회가 했던 시위 등에 정치적 세력이 개입해서 이용했던 경험이 있으니까 3.1운동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했을 수 있어요. 학생들이 모이면 과격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던 건데요. 너무 불안감이 앞섰던 거죠. 믿지 못했다는 것, 그 안타까움이 참 큰 것 같아요. 급히 장소를 변경해서 파생되는 문제도 있거든요. 당연히 민족대표 33인이 읽을 거라 생각해서 낭독자를 안 정해놨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읽었는지 지금도 명확하게 모르는 거예요. 해방 후에 정재용이라는 분이 자신이 읽었다고 증언을 하셔서 대체적으로는 그분이 낭독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데요. 정확한 자료로 남아 있지는 않죠.
이 책으로 3.1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분들이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을 몇 권 추천해주세요.
정병욱 선생님의 『식민지 불온열전』 , 임경석 선생님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같은 책들은 3.1운동 시기를 다룬 책은 아니지만, 세밀한 개인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함께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100년 전 오늘, 3.1운동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에 대해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3.1운동은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의미가 커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자발성을 발휘해서 전국 각지에서 시위를 했고요. 일제의 통치가 흔들릴 정도로 영향이 컸던 최초의 민주주의 운동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로부터 이 운동이 반복되었죠.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45년 건국운동, 1960년 4.19혁명,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말이에요. 3.1운동은 민주주의를 획득하려는 운동이었고요. 이후 운동은 민주주의가 훼손될 때마다 다시 세우는 운동이었어요. 촛불을 포함에 이 모든 민주주의 운동의 첫 시작에 3.1운동이 있는 거예요. 3.1운동을 통해 100년 전 우리가 지키려고 했던 가치, 획득하려던 가치가 사실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요. 이것은 현재와 떼어놓고는 볼 수 없는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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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열전조한성 저 | 생각정원
판사의 심문 과정 등이 생생하게 전개되며,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생동감과 몰입감은, 독자로 하여금 시계를 100년 전으로 돌려 ‘그날’, ‘그곳’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