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실마리를 정말 찾지 못하겠다면
누구나 알 만한 어휘를 사용하고, 하나의 문장에 한 가지의 정보만을 담는 짧은 문장이라면 지금 당장 써볼 만하지 않은가.
글ㆍ사진 김주미(작가)
2018.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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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일을 시작한 때는 스물셋 늦가을이었다. 아직 대학 4학년으로 방송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는 상태였지만 마음이 다급했던 기억이 난다. 혼자 준비할 때는 몰랐는데 아카데미라는 곳에 입성하고 보니, 나보다 재능과 능력이 넘치는 예비 글쟁이들이 도처에 숨어 있었다. 문득 이들이 다 같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그날이 오면, 나에게 돌아올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무작정 저지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먹은 바를 행동으로 옮겼다.

 

열 곳이 넘는 방송국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방송 프로그램 관련 포트폴리오를 보냈다. 기적처럼 단 한 곳, 그것도 원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연락이 왔다. 재미있는 점은 방송 일을 작가가 아닌 리포터로 먼저 시작했다는 것이다. 부산과 경상도 일부 지역에 송출되는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부산 아가씨의 잡동사니’ 쯤으로 기억되는 한 코너를 맡았다. 생활정보들을 모아 원고를 직접 작성하고, 마이크 앞에 앉아 걸쭉한 부산 사투리를 과장되게 쓰면서 내 방송 인생의 출발을 알렸다.

 

강의실에서 만난 후배나 제자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 몇 있다. 공통적으로 작가로서 자질에 관한 것이다. 작가가 되기 위해 어떤 능력을 갈고닦아야 하는지 묻는 이가 많다. 짐작하겠지만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써야만 실력이 는다. 그리고 ‘일상의 관찰력’을 키워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냥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특정 대상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며 보았을 때 우리는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 ‘이해’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평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신발을 관찰하곤 한다. 라디오작가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생긴 버릇이다. 신발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신발이야말로 그 사람만이 가진 특성을 잘 보여주는 매개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매일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사람은 많지만, 일주일 내내 다른 신발을 신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발이 불편해 느끼는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평소에 즐겨 신는 신발을 무의식 중에 자주 찾기 마련이다. 신발을 보고 그 사람의 하루를, 그리고 인생을 그려보는 나만의 상상놀이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중년 부인이 걷기 편하지만 우아한 하이힐을 신었다면, 보험설계사로서 그녀가 오늘 하루 만날 사람들과의 대화를 상상해 볼 수 있다. 70대가 훌쩍 넘은 어르신이 옷차림과 어울리진 않지만 새 것으로 보이는 운동화를 신은 모습에서는, 지난 가족모임에서 자녀들이 사 온 운동화를 소중히 아꼈다가 친구들과의 모임에 신고 나온 아버지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 이렇게 신발을 관찰하면서 신발 속에 담긴 각자의 사연을 떠올려 본다.

 

작가들은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글감들을 모으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의 사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소머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밝은 귀를 가진 나는 남들보다 글감 수집하기가 수월했다. 라디오 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했을 때, 매일 다른 주제로 오프닝을 써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 가장 큰 숙제였다. 오늘의 화제나 이슈로 오프닝 멘트를 쓰면 무난하겠지만 앞서 방송된 프로그램에서 이미 그 소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도 나의 프로그램에서만 얘기할 수 있는 오프닝 소재는 뭐가 있을까 늘 고민했다. 고민을 거듭해도 글감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을 땐 역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가 힌트다. 지하철이나 카페 등 그곳에 가서 가만히 앉아 눈은 책을 보는 척하면서 귀로는 타인의 대화 소리나 전화 통화를 듣는다.

 

지하철 저편에 앉은 중학생이 학원을 빼먹고 친구와 놀러 가겠다며 엄마에게 허락을 구하는 이야기도 듣고, 카페에서 산후조리원 동기들끼리 모여 갓난아기를 돌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토로하는 푸념도 들어본다. 이런 사연들은 멋진 스토리텔링 소재가 된다. ‘허락’을 주제로 라디오 오프닝을 써서 청취자들이 저마다 ‘허락’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고, 출산 장려를 권장하면서도 아직은 미숙하고 두려운 아기 엄마들에게 진짜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정부나 제도를 꼬집는 멘트를 쓸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작가의 능력치를 높여주는 무기는 청력이 아니라 ‘호기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귀가 밝아도 타인의 삶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 대화 소리가 들릴 리 없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고민을 하고, 무엇에 흥미를 가지며, 어떤 욕망으로 살아가는지 끊임없이 궁금하니 귀가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닐까?

 

방송을 위해 쓴 글들은 누가 읽어도, 누가 들어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 한다. 실제로 방송 대본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는 이들에게 원고를 보여주면 “너무 쉽다”며 실망하는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 문학 작품처럼 작가만의 개성 있는 문체를 찾아보기는 조금 어렵고, 다양한 기법으로 수놓은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글솜씨를 뽐낸다고 다른 이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어휘를 쓰거나 문장에 기교를 부린다면 방송 글로서는 낙제점을 받기 일쑤다. 방송작가들에게 쉬운 언어 사용하기, 간결한 문장 쓰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글쓰기 지침이다.

 

누구나 작가처럼 글을 잘 쓸 수 있다.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누구나 알 만한 어휘를 사용하고, 하나의 문장에 한 가지의 정보만을 담는 짧은 문장이라면 지금 당장 써볼 만하지 않은가. 방송 글이 이런 특징을 가지게 된 이유는 더 많은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한 번에 완성하지 못해도 한 줄, 한 줄 이어나갈 힘이 있다면 글을 완성할 수 있다. 생소하던 풍경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도 자주 보면 정이 들기 마련이다. 글쓰기도 그렇다. 조금은 낯설고 막막하던 글쓰기도 거듭하다 보면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고, 호흡하듯 자연스러운 일과로 삼을 수 있다.

 

SNS나 블로그, 책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망설이는 이들이라면 방송작가가 글을 쓰는 과정을 따라가며 실마리를 찾아보자. 더 이상 ‘망한 글’은 없다. 방송작가가 알려주는 상황별 글쓰기 기법을 찬찬히 따라 해보며 한 줄이라도 쉽게, 제대로 써보자.


 

 

망한 글 심폐소생술김주미 저 | 영진미디어
짧은 문장부터 한 편의 글까지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팁을 비롯해, 어떻게 하면 글쓰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쓸 수 있는지 등 글쓰기 기법과 ‘작가’로서의 태도를 모두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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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미(작가)

방송국에서 라디오작가와 TV 구성작가로 20년 일했다. 이후 신문방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을 비롯해 공공도서관, 문화원에서 글쓰기와 드라마 인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방송작가 시절부터 겪어온 글쓰기의 시행착오를 기록, 공유하고자 카카오 브런치 매거진 『방송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연재했고 브런치북 프로젝트 금상을 받았다. 현재 미디어 비평가이자 작가로 살며, 읽고 쓰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