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래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권태로운 자들, 소파 씨의 아파트에 모이다』 (이하 『권태』)는 참 거대한 규모의 소설이라는 것이 첫인상입니다. 상호텍스트적으로 참조하고 따라서 연결되어 생성되는 소설 속 세계의 규모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실 읽어보고 아찔했습니다. 내가 과연 이 소설의 깊이와 넓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참조/인용되고 있는 텍스트 전체를 내가 과연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접속시키고 있는 것일까라는 두려움과 불안에 계속해서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독자이면서 비평가로서의 불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한 안내서를 작성해야 하는 의무를 무겁게 여깁니다. 저는 한 사람의 비평가일 뿐 인터뷰 전문가가 아니라 다소 의례적인 질문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재출간에 즈음하여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특히 『권태』 는 이치은 선생님을 소설가가 되도록 한 소설이라 더욱 그럴 것 같습니다.
이치은 이번에 다시 읽고 또 당시의 심사평을 읽다 보니 『권태』 로 인해 공식적인 작가가 된 것이 대단히 운이 좋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전에도 소설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완결시킨 것은 이 소설이 처음이었거든요. 사실상 첫 완성작으로 소설가가 된 셈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 개인적인 이유로 인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는 없었지만, 이 소설이 아니었더라면 과연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었을까 생각해 봤을 때, 비록 많은 독자분들께서 읽어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정말 다행이다, 운이 좋았구나, 감사한 일이었구나라고 여기고 있어요.
조형래 『권태』 가 세상에 나온 지 정확히 20년이 흘렀습니다. 지금 여기의 독자들에게 새삼스럽게 도착하는 일과 관련하여 선생님의 생각과 느낌은 어떠신지요?
이치은 대학에 다닐 때 박재동 화백의 시사만화책이 출간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무척 재미있으면서도 강렬한 분노에 사로잡혀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몇 년 후에 읽어봤더니 그때의 느낌과 많이 달랐어요. 기억과 문맥이 달라지니 그렇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시대를 넘어선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때 실감했죠. 제가 좋아하는 것은 카프카나 보르헤스처럼 시대를 넘어서 읽히는 책입니다. 제 소설이 과연 그런 글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죠.
조형래 처음에 소설을 어떻게 쓰게 되신 건가요?
이치은 고등학교 때 글, 시를 쓰고 싶어했죠. 이과여서 주변에서 의외라고 여겼죠. 저는 오래 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쓰다 죽는 거지라고 그냥 생각했어요. 그렇게 시를 읽고 쓰다가 대학에 들어와 제임스 조이스, 귄터 그라스 등의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더 거대한 세계를 구축해 보고 싶다는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로서 유명해지거나 성공해야겠다는 야망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쓰고 싶은 거대한 세계를 마음대로 쓰고 만들어봐야겠다, 그래서 긴 소설을 혼자 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후에 보르헤스를 읽으면서 짧은 분량의 글에 대한 관심도 생기기 시작했지만요.
권태에서 욕망으로
조형래 이제 본격적으로 『권태』 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죠. 먼저 ‘권태’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몇 년 전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에 나타난 그야말로 권태로운 상황을 청년 세대의 좌절과 관련하여 시대에 대한 저항으로 읽고자 하는 지배적인 담론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치은 권태는 시대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이나 반동이라기보다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 비자발적으로 내쳐진 자들이 수동적으로 처해 있는 상황 내지는 정신 상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권태로운 자들의 연대에 의해 어떤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저는 좀 회의적입니다.
조형래 이 소설에는 권태로운 자들이 등장하잖아요. K와 무슈, 아담 폴로 등. 그런데 이들 간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난상토론을 벌이고 장광설을 늘어놓는 권태로운 인물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명료하게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겹쳐지기도 하고요.
이치은 그래서 초판에 각 작품을 인용하는 대목의 각주에 “죄송합니다”라는 문장을 덧붙인 거예요. 어떤 소설에서 가져온 인물들은 원작에 비추어 잘 형상화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소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거든요. 원작에서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살아 있었던 인물들을 굳이 제 소설로 가져와 평범하게, 서로 차별화시키지 못한 것이 아닌가, 제가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항상 하고 있었어요.
조형래 “죄송합니다”라는 문장은 원작들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생님 스스로의 안타까움에 대한 것이기도 하네요.
이치은 네, 더 잘 쓰고 더 잘 살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죠.
조형래 한편 그러한 인물들을 말살하려 드는 기사 역시 「날개」의 주인공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에게 잠시 매료된다든가, 답지 않게 계획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실수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러한 상태에 전이됩니다. 그 결과 소파 씨는 영화 즉 창조, 정확히 말하면 글쓰기에 관한 망상을 품게 됩니다. 물론 어이없이 좌절되지만.
이치은 먼저 소파 씨의 아파트에 모여든 권태로운 자들은 90년대 후반 당시 소비와 생산에 매몰되어 있었던 개인들을 그리고자 한 것은 맞아요. 하지만 욕망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권태는 하나의 징후이고 상징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도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조형래 그렇다면 소파 씨의 변화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다소 비판적으로 보신 건가요?
이치은 일종의 애증이죠. 권태는 하나의 징후고 누구나 처할 수 있는 상태지만, 제 주변의 인물이 그러한 상태에 한없이 빠져 있다면 몹시 고통스럽고 안타까울 것 같아요. 누구나 그러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쉽게 확정할 수 없다는 복잡한 마음에서 그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조형래 그런데 왜 하필 소파 씨는 글쓰기를 선택하게 된 것일까요?
이치은 원래 글 쓰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조형래 실패가 예정되어 있어서 다시금 권태의 상태로 회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글쓰기가 본래 체제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거나 생산적인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한없이 자기를 소진시키는 탕진의 지난한 과정이라는 점에서 저는 소파 씨의 최종적인 선택이 제게는 전혀 (비록 미망에 지나지 않지만) 의미가 없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글쓰기는 본래 작가 자신을 가리킨다는 측면에서 소파 씨의 마지막 선택은 텍스트 내외의 경계를 넘어서 어떤 재귀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고 보는데요.
이치은 정확하게 보셨어요. 글쓰기가 파멸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저 자신의 불안을 재귀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탕진이라는 단어를 말씀하셨는데요. 데뷔 직후에 소설가 백민석 씨와 통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많이 쓰지 말고 천천히 쓰라”는 충고를 들었죠. 글쓰기에 있어서 탕진은 크게 두 가지 현상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품을 써서 자기 세계를 창출해 내는 일을 거듭할수록 탕진되어 간다는 것. 그것은 보르헤스가 얘기했던 것처럼 누구나 작가가 써내는 모든 작품은 초기작의 아류일 수밖에 없다는 근본적인 딜레마와 관계될 수밖에 없는 것일 테죠. 반면 독자 또는 시대의 구미에 부합하는, 쉽고 재미있는 작품을 적극적으로 많이 다양하게 써내고자 하는 욕망과도 관계될 터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도 엄청난 능력이긴 하죠. 하지만 그것에 대한 섣부른 욕망을 품는 것 자체가 자기 글쓰기의 파멸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저는 이렇게 세상을 만들어 봤습니다
자유롭게 생각해 주세요
조형래 솔직히 읽기 쉽지는 않았습니다. 20세기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여러 탁월한 소설들의 주요 인물들이 소파 씨의 아파트에 집결하는 일종의 권태로운 인물들의 어벤져스라 할 만한 이름들이 모이고 난상토론하는 설정 자체가 몹시 두근거렸고 흥미로웠으나 몰입이 어려웠습니다. 저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의 작가상> 심사평에서 심사위원들도 유사한 부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선생님께서 심사평을 보셨을 당시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 같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소설은 시간의 지연과 단절, 장광설과 독백, 다양한 텍스트의 돌연한 끼어듦과 브리콜라주적 교착 등의 소위 모더니즘 소설의 주요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독자를 어떤 정연한 서사 속에 포섭하여 시각-내면에 비치는 리얼리즘적 환상에 몰입시키기보다 부단히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고 그로부터 일어나는 독서/인지의 단절을 통해 독자를 어떻게든 더 지루하게 만들려는, 그렇게 하여 주요 인물들이 사로잡혀 있는 권태의 상태를 독자에게까지 전이시키는 의도로 쓰인 것 같다고 감히 짐작해 봅니다. 참조되고 있는 문학의 정전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역시 그러한 대표주자들이니까요.
이치은 이 소설을 썼던 당시, 한 대목만 봐도 모든 이야기가 파악되는 드라마 같은 걸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이 보지도 못했지만요. 그러나 이 사람은 나쁜 사람, 저 사람은 착한 사람이 한눈에 구별되는 식의 쉽고 뻔한 이야기를 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독자들이 추리소설 자체가 아니라 잘 짜이고 다음에 무엇이 이어지는가에 관한 장치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구조에 의해 놀라게 된다고 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구조 같은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보르헤스는 책이 세상의 재현이 아니라 세상에 덧붙여지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한 미학적 관점을 오래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드라마를 짜고 싶다는 생각은 종종 들었지만, 시대가 요구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문법 같은 것을 따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강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제게 있어서 소외효과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쓸 당시 글쓰기의 전략으로서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설을 통해 제시되는, 그럴듯한 현실이라는 환영에 몰입하는 방식에 애초부터 익숙하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옳겠죠.
조형래 씨의 평론을 읽었을 때 들었던 느낌인데요. 비평의 정신분석은 현실의 작가가 아니라 화자를 분석하는 것이 아닐까, 현실이 아니라 구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원래 후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구조나 형식 자체 그리고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낼까 같은 문제 말입니다. 처음과 끝이 있고, 인간의 희로애락 등의 감정을 따라 움직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문학에 대한 이야기 또는 권태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이죠. 물론 지금은 전자를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만, 『권태』 를 쓸 당시에는 문학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특별히 소외효과를 의식했던 것은 아니었지만요.
조형래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종류의 소설을 워낙 좋아하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데요.
이치은 좋아하는 소설의 좋아하는 구절을 가져온 거죠. 다만 제가 좋아했던 이유를 지금 조형래 씨가 분석해 주신 것 같네요.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전략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조형래 원래부터 체화되어 있으셨던 것 같은데요? 사실 『권태』 에서도 오마주되고 있는 하일지의 소설을 비롯하여 90년대 초중반에 이런 종류의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서 단순히 통칭되었던) 글쓰기적 실험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던 것도 사실이구요. 많이 좋아하고 읽으셨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야기가 나온 김에 화제를 전환하자면 이 점에서 98년의 『권태』 는 다소 뒤늦게 도착했던 소설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글쓰기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시기에 발표되어 그러한 맥락 속에 포함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동시에 너무 일찍 도착한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카프카적 구도에 입각해 설정된 ‘성(城)’은 그리고 그의 지시에 따라 권태로운 자들을 살해하는 기사의 독백은 출간 당시 인터뷰에서 제기하신 “조직화된 자본주의”의 문제와 관련하여 흥미롭습니다. 알다시피 IMF 구제금융 사태로 인해 한국은 국가 주도의 개발경제 체제에서 신자유주의-세계화 체제로 급격히 이행합니다. 그런데 권태로운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살해하고자 하는 성과 기사는 어쩐지 관료제로 대표되는 전자의 시스템을 연상하게 합니다. 도리어 제 생각에 고도로 발전한 후기 자본주의 체제는 어차피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잉여로운 인간들을 방임하거나 심지어 용인하는 방식으로 치워버리죠. 그게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방식이니까요. 그런데 소파 씨를 둘러싸고 있는 권태로운 자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권태의 전이는 사실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의 경로에서 낙오한 이들이 스스로를 용납하고 보존하는 전유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사실 지금의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치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권태』 를 쓸 당시에 저는 이미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되어 있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고 특히 소비지상주의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20세기 초 그러니까 1930년대에 이미 이상 같은 작가에 의해 권태의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된 적이 있었죠. 한편으로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이데올로기라든지 구체제를 변혁하려는 운동이 발생했다가 좌절했을 때나 극적으로 다이내믹하게 발전한 시대의 끄트머리에 나타난 징후로서 권태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시대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자본주의와 기사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사는 자본주의 내지는 그것의 폐해를 빌런으로서 형식화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자본주의의 통제 방식은 상상 이상으로 다양할 뿐만 아니라 서로서로 알아서, 구성원들의 자율적 관계에 입각하여 방임적으로 이루어지죠. 하지만 기사는 자본주의의 악한 면모나 억압 방식을 비유한 것이 아니라 제가 쓰고 싶었던 인물이었을 뿐입니다.
또한 한편으로 아까 말씀하셨던 소외효과와 관련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제가 읽으면서 좋아했던 방식이 아니라 그런 책을 읽었을 리 없는 일반인이 읽었을 때 느끼는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저 자신과 전적으로 무관하게 말이죠. 제가 읽는 방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상 같은 소설을 읽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호기심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사에 관한 조형래 씨의 말씀을 듣고 보니 역시 다른 사람들은 저처럼 읽지는 않는구나, 너는 이렇게 읽었지?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읽을 수도 있어, 라는 문제를 의식하면서 썼던 것 같습니다.
조형래 그렇다면 소설을 쓰실 때 중요하게 염두에 두는 점은 있으신가요?
이치은 특별히 일부러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는 가령 하일지나 들뢰즈의 『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같은 책을 통해 소설의 다양한 형식적 요소에 대해서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읽기는 하지만요.
조형래 쓰실 때는 굉장히 신나게 몰입해서 쓰실 것 같아요. 독자들도 즐겁게 읽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이치은 읽기 어렵다, 가독성이 떨어진다, 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가 독자들을 그렇게 고려하지 않고 쓰는구나, 라고 생각하죠.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세상이 만들어지고 제시되는 것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편입니다. 구태여 독자로서 작가를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죠. 소설을 쓸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저는 이렇게 세상을 만들어봤습니다. 자유롭게 생각해 주세요”라는 태도인 것이죠. 독자들에게 이렇게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해석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도 안 될 말이고요. 오히려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 상황에 더 재미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소설이 더 흥미롭구요. 그 점에서 본다면 독자와의 소통을 중시하는 편은 아니죠. 하지만 모리스 블랑쇼 같은 이들이 말했듯이 책이 완성되는 순간 작가는 내쳐지는 것이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으며 모든 독서는 오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소설에 의도를 숨겨두고 독자로 하여금 따라와서 해석하도록 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불성설일 테죠.
조형래 말씀하셨다시피 선생님께서 『권태』 를 쓰시면서 참조하고 오마주한 모든 소설들이 그런 고유한 단독성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죠. 하지만 『권태』 는 일견 대단히 복잡해 보이지만 제가 보기에 서사 자체는 의외로 심플해요. 무엇보다 기사와 소파 씨의 관점에서 모든 사건은 거의 선형적으로 시간 순으로 진행되죠. 심지어 이 소설의 설정에 대해 소파 씨가 K에게 설명하는 친절한 자기 지시적 대목까지 발견됩니다. 독법을 달리 하여 디테일을 다소 간과하면 오히려 굉장히 빨리 읽히기까지 합니다.
이치은 언제나 제 소설을 읽고 의견을 말해 주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에 따르면 제 소설은 지나치게 친절하다고 합니다. 모든 사항을 설명하려고 한다고 지적해요. 그런 측면에 대해 이따금씩 고민해 본 적은 있지만, 단일한 구심점을 가지고 수미일관한 플롯에 입각하여 정리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소설은 저 외에 다른 많은 작가들이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지 않은 소설도 많고 각기 나름의 의의와 가치가 있는 것이겠구요. 물론 『권태』 의 경우는 제가 쓰고 싶고 쓸 수 있는 소설을 썼던 것이고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가 다양한 원전과 관계되는 일종의 원심력에 의해 분산된다는 점에서 그러한 중심 지향의 소설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요. 이 소설이 심플한 서사구조에도 불구하고 잘 읽히지 않는다고 한다면 묘사가 길고, 원전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설명을 많이 덧붙이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형래 저는 앞서 드린 말씀을 통해 『권태』 의 독자들에게 심플한 서사구조에 입각하여 읽으시라는 일종의 주제넘은 권유를 제안한 것인데 선생님의 생각은 조금 다르신 것 같아요.
이치은 이 텍스트를 이렇게 해석해야 된다든가 명확한 의미로 치환할 수 있다든가 하는 관념에 구애되지 말고 소설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그 자체로 내버려두고, 소설이라는 미지의 미로 속에서 기꺼이 길을 잃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 안에 들어가 길 잃는 것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물론 제 소설이 그렇게 길을 잃을 만한 텍스트인가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새로운 텍스트가 나왔을 때 그것을 기성의 관념이나 범주에 끼워 맞추거나 정답을 찾으려고 하기보다 그러한 낯설고 새로운 미지의 책이 출현했을 때 그 속에서 길 잃기 자체를 즐기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길 잃기의 문화가 더욱 저변을 확대했으면 좋겠습니다.
2018년 여름에 만나 이야기하고, 가을날 정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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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로운 자들, 소파 씨의 아파트에 모이다이치은 저 | 알렙
권태는 징후이고 누구나 처할 수 있는 상태이지만,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럼에도 어떻게 해야 될지 쉽게 확정할 수 없다는 복잡한 마음이 작품에 나타났다고 말한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