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아 작가에게는 두 가지 면이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다수 번역한 러시아 문학 전문가로서의 면모와, 운명처럼 마주친 패션계에서 종횡무진 일하는 독보적인 패션 MD의 얼굴. 『죄와 벌 천줄읽기』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천줄읽기』 , 『악령』 , 『패션 MD』 시리즈 등 대표작만 봐도 그의 넓은 관심을 짐작케 한다.
‘도스토옙스키 전문가’ 김정아는 “앞으로 100년을 갈 완역”을 목표로 도스토옙스키의 전집을 번역할 예정이다. ‘자기가 공부해 쌓은 지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인문학이라면, 『패션 MD』 시리즈의 집필과 도스토옙스키 전집 번역은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최근 『온순한 여인/우스운 사람의 꿈』 을 번역한 역자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번 책에는 「온순한 여인」과 「우스운 사람의 꿈」이 실렸습니다. 작품을 간단히 소개해 주신다면요?
『죄와 벌』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장편 작가로만 알려진 도스토옙스키가 남긴 10여 편의 단편 작품 중 백미로 꼽히는 두 작품입니다. 그의 4대 장편 중 죄와 벌, 백치, 악령 등 세 권이 다 출간된 후, 마지막 대작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 나오기 전에 쓴 작품이지요. 한마디로, 미숙한 작가의 습작이 아니라 성숙한 대 문호의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사상가이자 철학가이며 예언가라고도 불리는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적 엑기스가 다 들어있으면서도, 무겁지 않고, 한 편의 재미난 이야기로 읽기에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 두 작품은 기간을 두고 볼 때, 연작처럼 연이어 쓰였으며, 두 작품 모두 “환상적인 이야기”라는 똑같은 부제를 달고 있고, 작품의 화자들 역시 “지하 생활자”의 후예들이란 공통점을 지닙니다. 두 작품 다 자살이라는 공통의 소재를 다루면서도, 도스토옙스키의 주된 테마 중 하나인 오만의 테마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 시학에서 매우 중요한 테마 중 하나인 오만의 테마는 그의 대립점인 겸허의 테마와 연관되어 다루어집니다. 또 이는 주인공의 파멸과 구원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으로도 작용합니다. ‘오만’ 이 바로 이 두 작품의 출발점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스운 사람의 꿈」은 오만을 버림으로써 구원받는 이야기이고, 「온순한 여인」은 오만 때문에 받게 되는 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작품은 마치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반대되는 이미지인 데칼코마니 같은 쌍을 이룹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작품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인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온순한 여인」에서 남편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하거나 남편의 냉대에 지쳐 ‘그녀’가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살했다는 해석을 내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녀는 처음부터 사랑에 목말랐고, 그들의 결혼 초기 시절을 보면, 남편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남편의 차갑고 지배적인 태도에 지쳐 가다 화를 내고 결국 남편의 원수인 그의 전 동창과의 랑데부를 시도하기도 하고 급기야 남편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등 극하게 반항하는 단계까지 자신을 몰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극렬한 반항 후, 그녀는 심한 병이 듭니다. 그녀가 아픈 동안, 그리고 그녀가 깨어난 후, 남편의 태도는 180도 달라집니다. 남편은 이제 “엄격함,엄격함,엄격함”이라는 원칙 때문에 차가운 태도를 취했던 자신의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그녀의 발밑에 몸을 던지며 뜨거운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녀는 이제 자신에 대한 그의 사랑에 더 이상 아무런 의심도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차고도 넘칠 듯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을 받기에는, 자신이 그에게 한 일련의 행동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일은 현실에서도, 또 현실을 모방하는 영화에서도 왕왕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포레스트 검프에서 방탕한 생활에 지쳐 돌아온 제니가 포레스트에게 청혼을 받고, 그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자 그를 떠나는 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자신을 ‘더럽고 방탕한’ 여인이라 규정한 제니는 포레스트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과거 때문에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작품인 『백치』 의 여주인공 나스타샤 필리포브나도 너무 사랑해서 상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비운의 캐릭터입니다. 토츠키의 정부였다는 자신의 과거 때문에, 미시킨 공작을 미치도록 사랑함에도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의 짝이 되기에는 너무 못났다고 보는 것이지요. 원래 사랑을 하면, 그 대상은 ‘태양’처럼 눈부시고 완벽한 존재처럼 보이잖아요. 그래서 “그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나”라는 노래 가사도 있잖아요. 사랑에 빠지면 이런 말들이 구구절절 현실로 다가옵니다. 그렇지 않나요? (웃음)
「온순한 여인」의 그녀 역시 남편의 사랑 고백에 대해 그를 존경할 것이고, 사랑할 것이고, 정숙한 아내가 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 고백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지, 체념이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이 한 행동 때문에, 그가 자신을 ‘다른 방, 싸구려 철제 침대’ 위에 평생을 두리라 생각했어도, 그것을 자신이 한 짓에 대한 응당한 벌로 생각하며 달게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쪽이 속죄의 길이라 생각하고 편안했던 겁니다. 무의식중에 노래를 읊조릴 정도로 편안해진 거지요. 벌을 받으며 죗값을 치르니 오히려 속은 편안한 거지요. 그런데, 그런 벌을 받아도 마땅한 자신에게, 바로 그 남편이 용서를 넘어서, 인간으로서, 여인으로서,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이 평생을 갈구해 왔던 맹목적일 만큼 뜨겁고 진정한 사랑의 고백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했던 것이지요. 자살하기 전에 하녀 루케리야와 이별을 나누며 보여 준 그녀의 행복한 미소에는, 그 어떤 시니시즘도 자포자기의 한숨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받는 자의 진정으로 행복한 미소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한 일을 이미 끝나 버린 과거로 잊고 꼭꼭 봉인해 묻어 버리고, 충실하고 정직한 아내, 사랑받는 여인이 되고자 했으나, 화자가 자신의 감정에 겨워, 꺼내서는 안 되었던 그 화제-남편의 적과의 랑데부-를 꺼내자, 그녀는 다시금 너무 심한 고통과 후회에 휩싸이며, 자신이 한 짓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된 것입니다. 남편의 그 말은 그녀가 꼭꼭 묻어 버린 과거에 대한 봉인을 풀어 버린 거지요.
오만한 자는 자신을 용서하기가 가장 힘듭니다. 그녀는 남편의 차가웠던 이전의 행동들을 용서했고,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용서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한 행동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받고 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 행복한 미소를 입가에 담은 채 창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만에 대한 매우 도스토옙스키적인 벌입니다. 『백치』 의 아름다운 비극의 여주인공 나스타샤 필리포브나가 로고진의 칼날에 자신을 갖다 바친 것처럼!
「우스운 사람의 꿈」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제안한 ‘사랑’이 현대에도 의미를 가진다면, 어떤 의미일까요?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예수의 말이자, 도스토옙스키가 평생 전하고자 한 메지지입니다. 인간의 본성으로 당연히 저절로 되는 것이라면, 성경에서도, 도스토옙스키도 그토록 강하게 계속적으로 말하지 않았겠지요. 예를 들어 하루 세 끼를 먹어라, 라거나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라 같은 인간 본성에 맞는 것들은 설파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것들이나, 도스토옙스키가 설파하는 메시지들은 ‘우스운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십억 번은 더 반복되고 읽혔던 오래된 진리”지만 “우리의 삶에 친숙하지는 않았던” 겁니다.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니까요, 왜냐하면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동물이므로! 그 이기적인 동물이 자신을 사랑하듯, 그 똑같은 사랑을 남에게 베풀면 지상에 당장이라도 낙원이 이루어진다고 우스운 사람은 설파합니다. 그것이 그가 꿈을 통해 깨달은 진리입니다. 또한 그것이 평생을 인류와 인간의 문제를 성찰하고 고민했던 도스토옙스키가 독자에게, 또 인류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진리이기도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유일한 사랑은 동정하는 사랑, 연민하는 사랑, 실천하는 이타적 사랑입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 나오는 이반이 상징하는, 머리로 하는 추상적 인류에 대한 이성적인 사랑은 그에게는 가짜 사랑입니다. 알료샤의 이타적이고 희생적이고 일상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랑이 바로 진짜 사랑인 겁니다. 이런 희생적 사랑의 상징적 존재가 예수인 거고요.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진리가 그리스도 밖에 존재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남겠다’고 한 겁니다. 그에게는 희생적이고 실천하는 사랑이 일반적인 진리를 뛰어넘는 궁극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색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아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사랑이 존재할 겁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로 숭고하고 아픈 일입니다. 그것은 나의 행복에 앞서 사랑하는 존재의 행복을 두는 것입니다. 자신보다도 사랑의 대상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 그것은 인종, 나이, 성별, 계급을 초월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사랑의 최고 감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를 희생하더라도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 이기적인 인간에게 자발적으로 저절로 생겨나는 이런 이타적 마음은 아마도 신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사랑은 불완전한 인간을 완벽하게 해 줍니다. 그것은 삶의 고통, 외로움을 이기게 해 주고, 창조주가 도처에 숨겨 놓은 행복과 미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또한 그것은 마음에서 계속해서 감탄이 솟아나게 해 마음의 근육을 키워 줍니다. 든든하고 탄탄하게 길러진 마음의 근육으로 우리는 타인의 결점을 사랑하고 감싸 주며,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에도 미소 지을 수 있게 되는 거지요. 한마디로 겸허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 도스토옙스키가 원하는 모습의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스토옙스키적인 사랑은 19세기뿐 아니라 시공을 초월해, 현대적인, 미래적인 시간에도 유효할 것입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우주적인 중요성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도스토옙스키는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이 책 외에도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여럿 번역하셨습니다. 전집 번역에 도전하신다고 들었는데, 전집을 한 사람이 번역한다는 것의 의의가 궁금합니다.
제 역서 총 16권 중 11권이 도스토옙스키 작품입니다. 제게 도스토옙스키 번역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작가와 벌이는 최고의 놀이요, 위대한 작가에게 보내는 신성한 오마주입니다. 인류를 위해 그가 남긴 아름다운 유산을 원래의 모습에 가장 가깝게 복원해, 한국 독자를 위해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제 당찬 바람입니다. 고고학자들이 작은 유물 조각 하나라도 보석처럼 다루듯, 그의 단어 하나하나가 다 제겐 보물입니다. 그것을 원 보석의 빛깔과 광채에 가장 가깝게 복원해 내는 성실한 발굴의 과정과, 한국어 속에 잘 녹아나게 하는 재창작의 과정은 보석 세공사의 세공 과정인 셈이지요. 엄청나게 재미있고, 엄청나게 힘든 작업입니다. 책 읽고(중증 활자 중독자이자 엄청난 독서광입니다!) 번역하고 책 쓰는 제 새벽 시간은 저의 아이돌 도스토옙스키와의 놀이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매일 새벽 일어나 그 많은 일을 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고 물으면, 노는데 뭐가 힘드냐고 답합니다. 남들이 쉬는 이른 밤, 저는 잠을 자고, 남들이 자는 새벽 시간 저는 노는 거지요. 책과, 번역과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10시간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잖아요?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시간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현실화하는 순간이 피부로 와닿을 겁니다. 1-2시부터 시작하는 저의 새벽은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얼마나 좋은 연인인지 제 번역을 통해 알아 가는 독자가 하나둘 늘고 있다고 하니, 역자로서 인문학자로서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원래 전집 번역은 은퇴하고 하려고 남겨 둔 저의 은퇴 후 플랜 중 하나였습니다. 4-5년 전 출판사에서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완역을 해 달라고 두툼한 계약서를 들고 왔을 때도, 천천히 하겠다, 데드라인은 줄 수 없다는 것에 합의해서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 브랜드를 상대해 온 패션 회사 CEO에 세 아이의 엄마로서의 경험을 각각 ‘민족성에 따른 국가별 협상법(가제)’과 ‘아이와 함께 자라는 엄마(가제)’라는 교육서로 각각 다른 출판사를 위해 써야 했거든요. 이런 시의성을 갖는 작은 프로젝트들을 먼저 하고, 아주 시간적 여유가 많을 때 완역을 하려 한 거지요. 도스토옙스키 장편 완역이란 한 권에 적어도 2년은 걸리는 작업이니까요. 그것도 아주아주 성실하고 힘든 2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4대 장편이면 거의 10년 프로젝트라 할 수 있습니다. 역자로서 꼭 해 보고 싶었지요. 전 세계에 도스토옙스키 전집은 많지만, 각 작품의 역자가 다 다릅니다. 한 사람이 일관성 있는 목소리로 4대 장편을 다 한 적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작업이지만, 그렇다고 경제적인 보답이나 명예가 따르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작가에 대한 사랑과 사명 의식으로 불타는 저 같은 사람이 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요.(웃음)
그런데 얼마 전 저와 10년간 11권의 역서를 낸 커뮤니케이션북스 출판사의 대표이신 박영률 님께서 직접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지요. 보통 작가들은 팀장과 일을 하기에 출판사 대표님을 뵐 일이 없는 데다, 출판사 대표들은 작가를 잘 안 만나기로, 오히려 피해 다니기로 유명하거든요. 박영률 님 왈, 4-5년 전 제 역서를 처음 읽고 너무 감동해서 제 걸 다 찾아 읽으셨다는 겁니다. 바로 그때가 팀장이 완역 출간 계약서를 들고 왔던 때였던 거지요. 한시적인 실용서, 인스타그래머나 파워 블로거의 인기를 등에 업은 생명력 짧은 책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수십 년을 정통 인문학을 고수하고 있는 심지 있는 출판사여서, 원래 일면식도 없던 분이지만, 인문학자로서 이 시대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매우 큰 존경심을 느끼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 분이, 제 번역 속에서 “저와 도스토옙스키와의 정신적인 스파크”를 느끼셨다고 하시더군요. 완전한 감동이었습니다. 역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또 하나는, 현재 한국 번역서의 수준이 너무도 심각하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고 하시더군요. 영미문학회와 불문학회가 우리나라의 번역서 실태를 조사했는데, 원서에서 번역했다고 추정되는 역서들이 놀랄 정도로 낮은 비율이고, 그 낮은 비율의 역서 중, 문학성이 있다고 평가되는 것은 거의 없을 정도라고. 물론 번역을 하며 단어 몇 개, 오역 몇 개 등은 있을 수 있겠지만, 도가 지나쳤던 거지요. 하긴, 모 출판사에서 나온 도스토옙스키 전집 중 몇 권은 교수들의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심지어 감수조차 하지 않은 듯한 책도 있습니다. 그런 책을 손에 들고 부들부들 떨었던 적이 제게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서도, 모나리자에 대해서도 일말의 애정도 없으며, 그 가치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붓과 페인트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떡칠을 하고, 그 떡칠 된 그림을 원본을 모르는 관객에게 보여 주고, “이것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요”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역서들이 버젓이 큰 출판사의 이름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비극이지요.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제게, 그것은 도스토옙스키 살해나 마찬가지입니다.
박영률 님 역시 조사 결과에 충격을 받고, 번역 시장에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 역서가 시급하다고 판단했고, 저에게 100년을 갈 완역을 꼭 해 달라고 부탁하러 오신 겁니다. 그래서 다른 출판사들의 원고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 큰 프로젝트를 먼저 시작하게 된 겁니다. 매일 새벽 작업을 하고 있는데, 더디고 힘들지만, 도스토옙스키를 위해, 또 우리나라 독자들을 위해, 매우 유의미한 작업이 되리라 봅니다.
어려운 질문이지만, 도스토옙스키의 매력을 한마디로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제겐 오히려 가장 간단한 질문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사랑이 많은 작가입니다. 그의 긍정적 인물들은 어린애들의 눈물을 어루만져 주고, 함께 아파하는 반면, 이성적 인물들은 학대받는 어린애들의 눈물 때문에, 세상을 그런 식으로 만든 신이라면 신도 아니라고 하며 등을 돌리고 무신론자가 되는 거지요. 표면에 드러나는 행동 방식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이성적 인물이건, 긍정적 인물이건 모두 학대받는 자들, 어리고 여린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작가의 분신들입니다. 그의 인물뿐 아니라, 작가 역시 여리고 부서질 듯한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대 문호, 대 사상가, 위대한 철학자의 타이틀을 벗겨 내면,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 경탄하는 소년 같은 도스토옙스키, 세상의 모든 아픔 때문에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는 사랑 많은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도스토옙스키! 작가로, 남자로, 영원히 제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가 있어 삶이 풍요롭습니다.
소비에트 문학과 소비에트 여성의 문제, 유토피아 문학에 관심을 둔다고 쓰셨습니다. 소비에트 여성의 문제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유토피아 문학에 관심을 두는 이유도 궁금합니다.
제정 러시아가 혁명에 의해 몰락하고 소비에트 연방이 되며, 러시아인들의 삶과 가치가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혁명은 혁명적이어서, 여성의 동지화, 여성 해방 운동도 함께 일어났지요.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 여성 해방이라는 것이 절대 여성들의 삶에 플러스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집 안에서 원래 여성들의 영역이던 부엌은 고스란히 여성들의 몫으로 남았으며, 사회에서는 남녀가 다 타바리시치(동지)이므로, 똑같이 일해야 했습니다. 여성에게는 노동의 몫이 두 배가 된 거지요. 뿐만 아니라, 여성 해방은 늘 그렇듯, 성적인 자유, 성의 해방과도 함께 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낙태와 성병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낳게 되는데, 그 또한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짊어져야 할 짐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해방, 성의 평등, 성적인 자유가 도래하며 룸살롱이 많이 문을 닫았다고 하잖아요. 돈을 주고 여자를 살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된 거지요. 과연 누구를 위한 성의 해방이고, 무엇을 위한 여성 운동인지, 소비에트 여성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문제들을 돌아보며, 오늘의 페미니즘을 보다 현명하게 조명해 보고 싶습니다. 물론 포용하고 화합하는 현명한 페미니즘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잠시 나타나는 현상이리라 보지만, 혐오와 폭력은 더 큰 혐오와 폭력을 낳을 뿐, 어떤 경우에도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1차, 2차, 3차 페미니즘의 물결이 가고 있습니다. 다음의 4차 페미니즘은 포용과 화합하는 아름다운 페미니즘의 물결이 오리라 기대합니다. 결국,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사랑, 그것이 답입니다.
유토피아 문학에 관심이 많은 것은 제 인생관과도 연결됩니다. 전 아이들에게 행복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 어떤 분야에 최고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장 넓은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풀빵을 팔아도, 행복하고 열심히 노력하며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는 풀빵 장사가 되라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어려운 선택의 상황이 오면, 절대 아이 대신 선택해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무엇이 네게 더 큰 행복을 줄지가 선택 기준이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유토피아 문학이란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유토피아 문학인,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나, 오웰의 『1984』 , 자먀틴의 『우리들』 같은 것은 엄밀히 말해 유토피아 문학이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 문학입니다. 획일적으로 강요된 행복은 행복이 아닌 거지요. 진정으로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저의 인생관이 아마도 유토피아 문학에 대한 큰 관심으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봅니다.
최근 도스토옙스키 작품 외에도 『패션 MD』 세 번째 시리즈를 내셨습니다. 시리즈 완결의 소회가 궁금합니다.
저는 운명론자입니다. 저의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뼛속 깊이 인문학자인 제가 패션계로 들어온 데는 운명이 부여한 어떤 의미 또는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 돌아보면, 『패션 MD』 시리즈가 그 의무의 큰 한 부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기가 연구하고 고민한 것의 엑기스들만을 모아 책을 내고 논문을 내어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인문학자들이 하는 일인데, 지금도 그렇고 11년 전 처음 패션계에 발을 들였을 때도, 패션계는 전화번호 하나조차 나누지 않는 세상이었습니다. 평생을 학계에 있던 저에게는 큰 충격에 가까운 이상한 세상이었지요. 미리 걸어간 선배들의 실수와 실패, 그리고 성공에서 배워야 뒤에 오는 사람들이 덜 실수하고, 덜 실패하고, 그럼으로써 패션계 전체가 더 나아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비밀주의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 패션계뿐만이 아닌지, 『패션MD』 편집팀장의 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에 『패션 MD』 의 경쟁 도서가 없다는 겁니다. 시즌 바잉의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전반적인 것을 1권 바잉 편에서, 무슨 브랜드를 살 것인가를 2권 브랜드 편에서, 어디서 살 것인가를 3권 쇼룸 편에서 설명했습니다. 2015년 8월에 시작한 프로젝트가 2018년 9월에 끝났으니, 3년에 걸친 작업이었네요. 『패션 MD』 시리즈를 책상 위에 두고 바이블처럼 보고 있다는 말씀을 독자들에게서 들을 때마다 저 자신도 무척 기쁘고 뿌듯합니다. 패션계에 들어온 인문학자라 해낼 수 있었던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운명이 저를 패션계로 이끈 이유의 반이라면, 나머지는 제가 11년간 키워 온 여러 개의 브랜드를 저보다 더 잘 키울 수 있는 파트너들을 잘 찾아 주는 것이 그 반이 될 것입니다. 현재 여러 대기업에서 M&A와 브랜드 인수 등의 제안을 받고 있으니, 각 브랜드를 가장 잘 맞는 회사와 짝지어 주고, 제대로 잘 커 가는지 살펴본 후, 전 다시 100% 인문학자로 돌아가야지요. 11년간의 마켓 테스트를 통해, 시행착오가 거의 없이 안착할 수 있는 너무도 예쁜 브랜드를, 저의 노하우와 함께 온전히 다 넘기고 다시 공부하는 것이 운명이 제게 부여한 임무의 완수이자, 패션계에서의 제 인생의 마침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패션 MD 시리즈의 완간으로 예쁜 쉼표를 찍었으니, 조만간 예쁜 마침표도 찍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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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순한 여인 / 우스운 사람의 꿈도스토예프스키 저/김정아 역 | 지만지
두 이야기는 공통적인 주제와 화자의 유사함 등과 전개와 결말의 상이함이 동전의 양면을 보듯 하나의 쌍을 이룬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구원의 힘이다.
정의정
uijungchung@ye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