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첫 장편소설 『당신의 파라다이스』 로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작가 임재희가 새 책을 들고 찾아왔다. 한국인 이주민들의 신산한 삶을 묘사한 임재희의 세 번째 작품이자 첫 번째 소설집이다. 강원 철원에서 군인의 딸로 태어나 21세 때인 1985년에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에서 ‘미국으로 간 이민자’, ‘한국으로 돌아온 귀환자’, 그리고 ‘한국에서 사는 한국인’이라는 세 부류의 인간형을 통해 ‘경계인’ 또는 ‘주변인’의 개념을,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운명에 처한 사람들까지로 확대하고 있다.
작가는 이 경계인 또는 주변인에 대하여,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거나 배제된 자들에 국한하지 않는다. 어느 한곳에 정주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떠도는 그들을 통해 구획된 장소 너머의 공간에 대해 사유하는 힘을 지닌 존재로 그려냄으로써, “한국도 미국도 아닌 현재 서 있는 곳”이 결국 내가 존재하고 있는 곳이라는 실존적 자각으로 이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소설 속에 이민 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쓰시게 되셨나요.
부유하는 사람들-공간이든 의식이든-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이 소설집은 소재와 주제를 미리 생각하고 썼던 것들이라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혹은 화자가) 살던 곳을 떠나 타국에 살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얘기로 채워졌네요. 여기에서 ‘타국’은 미국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제가 그곳으로 이민 갔던 경험이 녹아들었던 것 같아요. 스스로 이민자들의 속내를 좀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쓰면서 그들의 삶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해하는 기회가 되어서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어요. 소설을 쓸 때 소재를 멀리에서 찾는 편이 아니라, 제 주변에서 듣고 보고 느낀 것들을 나름대로 ‘짜깁기’해서 소설의 옷을 입히는 창작 방법을 따르고 있어요. 제 삶의 한 자락이라도 묻어 있는 얘기가 아니면 써지지 않더라고요. 쓰면서 ‘나’를 이해하고 ‘우리’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서의 소설이기 때문이겠죠.
처음 접하는 독자분들을 위해 간단히 작품 소개 부탁드려요.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과, 다시 되돌아온(역이민이라는 말도 있지요) 사람들, 그리고 한 번도 떠나보지 않고 한국에 사는 사람들 얘기를 담았어요. 이국적인 낯선 삶의 공간보다는 내면의 불균형을 이루는 사건이나 감정들을 형상화한 얘기들이죠. 내면의 ‘타국’에 사는 이들의 얘기라고 불러도 좋겠군요. 사실 그런 경험은 평생 한국에 살아도 있잖아요. 저 바깥에 있는 기분 같은 거요. 멀리서 안(중심)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집단 내에서의 소외감. 그 안에는 오랜 기억도 있고 소통되지 않는 언어도 있어요. 기억은 공간을 초월하지만, 언어는 특정 공간에서만 소통되기도 하고 공간의 이동과 동시에 단절감을 느끼게 만드는 양면성이 있지요. 자신의 근원을 찾고 싶거나, 버려진 자아를 스스로 일으키는 얘기들, 물질적인 풍요를 이루었지만 더 피폐해진 인물들도 있죠. 등장인물들은 모두 ‘경계인’, ‘주변인’이라는 말로 대변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들은 경계에 섰기 때문에 실존을 깨닫는 인물들이기도 하죠. ‘바깥’에 사는 사람들 얘기지만 그건 동시에 ‘안’에 살면서 느끼는 위태로움과 다르지 않은 얘기들을 담은 소설집이라고나 할까요.
속한다는 것과, 속하지 않는다는 것. 그 경계의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확실한 정의를 누가 내릴 수 있을까요. 한 개인의 국적이나 인종, 종교나 언어가 표면적인 구분의 기준은 되겠지요. 어떤 이유든지 자신을 소수자라고 규정한다면 ‘속하지 않는’것에 가깝고 반대로 다수자의 영역에 든다고 느낀다면 ‘속한다’는 것이겠지만 그 기준들도 ‘중심’이나 ‘권력’, ‘힘’이 정한 것들이니 여전히 모호하죠. 그래서 ‘속한다’는 것과 ‘속하지 않는’다는 감정을 소외감의 정도로 이해하게 돼요. 소외감은 상대방이 의도하지 않아도 스스로 느끼게 되는 감정의 스크래치지요. 그 스크래치가 커지면 피가 나고 피가 흐른 뒤 굳으면 그 자리가 감정의 경계가 되겠지요.
책을 읽어본 독자들의 ‘공감한다.’는 평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마도 소설 속 인물들의 심리적 핍진성이 아닐까 싶어요. 그들의 심리가, 소설의 공간과 상관없이, 독자들로 하여금 ‘지금, 나, 여기’를 떠올리기에 충분하잖아요. 중심부에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감정은 어디에 살든 다 똑같지요. 중심이라는 것이 늘 작고 멀고 특정되어있으니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나름 소외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요. 심지어 가족 내에서도 그런 감정이 있잖아요. 아마도 그런 부분들을 소설이 건드려준 것 같아요.
소설에는 떠나는 자, 돌아온 자, 머무는 자 등 다양한 상황에 놓인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작가님이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과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아마도 돌아온 자의 혼돈을 담은 「히어 앤 데어」에 나오는 동희 같아요. 두 번의 실패나 두 번의 좌절로 비춰지는 인물이죠. 새로운 곳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돌아온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이 동희 같아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에 그런 인물들이 좀 있지요. 동국은 유일하게 한국에 정주하는 인물이지만 그녀의 스산한 삶도 그들의 내면과 다르지는 않지요. 그러니 모든 인물들에게 애착이 간다고 한다면, 제가 제 소설 속 인물들에게 너무 애정이 많은 작가일까요.
현시대에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보통의 사람들’도 많다고 느껴지는데요. 그들을 위해서 한 말씀 해주신다면?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을 때 인간은 외롭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실존적인 질문에 맞닥뜨리는 귀중한 순간이기도 하지요. 나와 만나는 시간들이죠.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말에 고개를 자주 끄덕이는 요즘입니다. 억지로 소속감을 느끼기보다는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도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겠죠.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중심’도 ‘주변’도 없어지겠지요. 우리는 결국 그냥 ‘보통’을 추구하는 보통의 사람들이잖아요. ‘보통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균형 잡힌 시선들이 더욱 절실한 요즘이죠.
앞으로도 이방인들에 대한 글을 쓰실 계획인지, 차기작에 대해 알려주세요.
아마도 그럴 것 같아요. 그것이 ‘나’임을 더 알게 되니까요. 작가는 결국 ‘나’를 쓰는 존재지요. 타인의 삶을 묘사해도 그 안에는 언제나 ‘나’가 있어요. 더 깊이 더 고요한 곳으로 내려가 ‘나’를 만나는 작업을 계속할 겁니다. ‘나’로 출발해 ‘우리’를 만나는, 공공재로서의 소설의 사회적 역할도 놓치지 않고 싶고요. 늦은 나이에 등단했으니 조금 어눌하더라도 감각적인 작품들보다는 감동적인 작품들에 매달리고 싶어요. 뜻대로 잘 형상화될지 모르겠군요. 차기작은 장편을 준비하고 있어요.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어느 이방인의 죽음을 다룬 작품입니다. 열심히 읽어주는 독자가 있을 때 쓰는 사람들은 힘을 얻지요.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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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임재희 저 | 작가정신
‘미국으로 간 이민자’, ‘한국으로 돌아온 귀환자’, 그리고 ‘한국에서 사는 한국인’이라는 세 부류의 인간형을 통해 ‘경계인’ 또는 ‘주변인’의 개념을,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운명에 처한 사람들까지로 확대하고 있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