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천희
2009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단편소설 「제니」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 「이상한 정열」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 등의 단편소설로 꾸준히 젊은작가상에 이름을 올리며 안정적인 작품활동을 이어온 기준영의 두번째 장편소설 『우리가 통과한 밤』 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2017년 봄부터 2018년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된 소설로(연재 당시 제목은 ‘비밀의 꽃’), “고단한 일상의 무게를 담담하게 견뎌내는 성숙한 소설적 시선이 돋보인다”는 호평을 받으며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한 『와일드 펀치』 (창비, 2012) 이후 꼬박 6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이다. 마흔 살을 앞두고 난생처음 화제의 연극무대에 출연하게 된 ‘채선’과 그 연극을 보고 단숨에 그녀에게 반한 이십대의 ‘지연’. 『우리가 통과한 밤』은 두 여자가 서로를 향한 이끌림을 강렬하게 느끼며, 혹은 그 마음을 애써 부인하는 사이 각자의 결핍이 서서히 메워지는 과정을 담백하게 그려낸다.
2012년에 출간한 『와일드 펀치』 이후 두번째로 선보이는 장편소설입니다. 물론 그사이 소설집 『연애소설』 과 『이상한 정열』 을 출간하셨지만요. 장편으로는 6년 만인 셈인데 출간 소감이 궁금합니다. 특히 이번 작품은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연재를 한 것이라 감회가 남다를 것 같기도 해요.
첫 장편이 출간되고 난 이듬해에 바로 두 번째 장편 초반부 몇 페이지를 썼는데, 그즈음 단편소설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단편 작업 위주로 시간을 보내게 됐어요. 『우리가 통과한 밤』 은 감정 에너지가 적잖이 드는 소설이었기 때문에 온전히 집중할 만한 여건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연재 제안을 받고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계기가 구체적으로 주어져 다행스러웠어요. 장편을 완주하며 소설 속 인물들과 여러 층위의 시간을 살아냈다는 기분이 듭니다.
『우리가 통과한 밤』 을 처음 접하게 될 독자분들을 위해 작품에 대해 소개해주신다면요.
젊은 여자가 나이 든 여자에게 구애하며 그녀를 홀리는 이야기가 물길 타듯 오르락내리락 이어져요. 그래서 나이 든 여자가 거기 반응하고 응답하고 흔들리며 예기치 않던 방향으로 나아가 마침내 그 모든 걸 삶의 파도로 받아들이게 되는 사랑 이야기.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런 이야기일 수도 있을 거예요. 늦깎이 배우인 나이 든 여자가 열정적으로 이해와 해석을 요하는 캐릭터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 대상이 텍스트 속 인물이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사람, 그 젊은 여자인 이야기.
소설은 마흔 살을 앞둔 채선의 시선에서 전개되지요. 화제의 연극무대에 출연하게 되었지만 배우로서의 포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중심이 되어야겠다는 욕망이 있는 인물도 아닙니다. 무료하고 시니컬한 모습이 매력적인데요, 이런 성격의 인물을 떠올리게 된 계기가 있을지요.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고통과 불행과 슬픔이 있고, 그걸 처리하는 방식도 다르죠. 채선은 자기가 겪고 느낀 것들을 누구와 나누고자 하는 열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인데, 그래서 오히려 무대에 오르면 감쪽같이 뭘 표현해낼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해요. 드러내놓은 것들 안쪽에 항시 뭔가가 더 있다는 걸 상기시키는 인물이라 이야기를 만드는 제게도 흥미로운 데가 있었어요. 글이 막힐 때는 내 생각, 내 의지, 내 프레임, 그런 걸 다 내려놓고서 온전히 그 인물의 마음을 사고 싶다는 소망으로 무언가가 차오르길 기다렸어요.
소설의 두 주인공인 채선과 지연은 연극을 통해 만나게 된 후 사랑에 빠집니다. 두 인물은 스무 살 가까운 나이 차와 동성연애라는, 어찌 보면 이중의 압박 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설정 때문에 특별히 고심하신 부분도 있을 듯합니다.
설정을 놓고 지인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기는 한데, 진심으로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다양한 관계들에 관심이 있어서 단편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그려왔어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 심지어 나는 저런 타입 정말 싫고, 안 맞고, 잘 모르겠어, 하는 사람들이 아주 절친한 사이에서도 나눠 갖지 못하는 무언가를 공유하게 돼버리고, 그래서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이 서로에게 유일해지는 그런 이야기도 있었고요.
인물과 이야기의 전개를 놓고 머뭇거리게 되는 지점들에서는 제가 통념이나 인정욕구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란 걸 인정하고 다시 출발했어요. 저란 사람의 한계를 이야기 속 인물들은 넘어서야죠. 캐릭터의 이 모습 이대로 충분하다는 걸 믿고, 그들이 나아가려는 방향으로 저를 열어두는 게 필요했어요.
이중의 압박이라고는 말했지만 사실 소설에서 이 부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진 않습니다. 그보다는 두 인물이 나누고 느끼는 감정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요, 이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예요. 사랑과 믿음이 완전히 공허해지는 자리에 놓인 사람들이 끝내 그걸 놓지 않는 이야기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찾아오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수시로 살아난다면 좋겠어요. 감정이란 늘 변화하는 것이고, 만질 수도 없고 영원한 것도 아니지만, 저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문장으로 그것들을 생생히 불러내 저와 또 제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곁에 둘 수 있게 되기를 바랐어요.
채선과 지연 외에 소설에 다양한 인물이 나오지요. 특히 중견배우인 문주성은 삶의 여러 국면을 경험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혜안으로, 채선과 지연에게 결정적인 조언을 해주는 인물이지요. 작가님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인물, 혹은 말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문주성이란 인물은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어른이죠. 한편으로는 이런 타입의 인물은 어느 영화나 연극, 소설 속에서 보았음직한 기시감을 주기도 해요. 특별한 점이 있지만 어떤 전형에 속하는 인물이랄까. 그가 지닌 그런 속성이 이 스토리에는 필요했어요.
문주성만큼이나 배우 전노아가 제게는 각별해요. 아마도 그녀가 채선, 지연과 오래도록 왕래하며 교감하지 않을까 짐작게 되는데,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놓이거든요. 스토리에 미더운 기운을 불어넣는 인물인 거죠. 제가 만나본 어떤 사람들,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나중에 내가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싶은 사람을 떠올리며 전노아를 그렸어요. 소설의 말미에 그녀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놓고서 채선에게 “지금 자기가 보는 걸 나도 보면 좋겠는데.” 하면서 지그시 바라보는 대목이 있어요. 딱 그만큼의 거리감과 존중하는 마음을 유지하면서 담담히 솔직한 표현들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무척 좋을 것 같아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품고 있던 이야기를 이제 독자분들에게 건네게 되었는데요, 독자분들에게 어떤 소설로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어떤 문장이나 대화들을 입 밖으로 소리 내 보게끔 만드는 소설이었으면 하고, 마치 한때 알고 지냈던 사람들인 것처럼 인물들이 마음에 남게 되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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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통과한 밤기준영 저 | 문학동네
외부의 캄캄한 어둠이 아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믿기로 한다면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기준영은 채선과 지연이,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사람들이 서로 나눠 가지는 마음에 대해 차분하게 그려나간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