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주말판 신문과 브런치. 종이신문은 없어질까? 적어도 독일에서는 종이신문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독일인들에게 소중한 주말 ‘리추얼’에 종이신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다양한 주제의 별도 섹션이 거의 책 한 권의 두께로 나오는 주말신문을 독일인들은 브런치와 함께 아주 느긋하게 읽어나간다. 그들은 주말 저녁에 만나는 사람들과 나눠야 하는 대화 주제의 대부분을 이 주말 신문에서 찾는다.
오늘날 ‘책’은 더 이상 유일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 아니다
오늘날 정보는 인터넷이라는 엄청난 정보처리 수단으로 전달된다. 무지하게 빠르다. 책으로 전달되는 정보의 양과 영상으로 전달되는 정보의 양을 비교하면 도무지 상대가 안 된다. 대학생인 두 아들은 하루 종일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만 들여다본다. 내 아들들이 책을 보는 경우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보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생각하면 아주 큰코다친다. 그들이 습득하는 정보는 대부분 동영상이다. 동영상으로 전달되는 정보의 양은 책으로 전달되는 정보의 양이 죽었다 깨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니까 ‘책을 보지 않으면 아는 게 없다’며, 책 읽지 않는 세태를 탄식해서는 안 된다.
디지털 시대에서 책이 가지는 의미는 변했다. 책은 더 이상 지식과 정보 전달의 유일한 매체가 아니다. 그 특권은 사라졌다. 그러나 책이 지금까지 끌어왔던 ‘지식의 문화’, 즉 도서관과 신문, 잡지 등이 가지는 ‘문화적 리추얼’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앞으로도 폼 나는 문화로 지속될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비데가 나왔다고 휴지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휴지는 더욱 고급이 되어야 한다. 싸구려 휴지는 보풀이 남아 그곳(!)에 낀다. 몹시 불편하다. 아주 고급 휴지만 쾌적하게 물기를 닦아낸다. 바람으로 물기를 말리는 경우도 있지만, 위생상 좋지 않다고 한다. 또한 바람으로 그곳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릴 만큼 성격이 느긋한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어차피 휴지는 꼭 있어야 한다. 고급 휴지만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다.
책도 마찬가지다. 아주 고급 기능, 폼 나는 기능만 살아남는다. 책이 지녀왔던 그 폼 나는 기능 중에 하나는 ‘성찰적 기능’이다. 동영상으로 전달되는 정보는 일방적이다. 시각,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며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동시에 수용해야 한다. 정보의 양 또한 장난이 아니다. 집중할 수밖에 없다.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책은 다르다. 쌍방향적이다. 내가 언제든 읽는 행위를 멈추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책의 귀퉁이에 내 생각을 적어놓을 수 있다. 물론 동영상도 그렇게 할 수 있고, e-book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앱이 많다. 그러나 실제 동영상을 보다 멈추고, 자기 생각을 정리하거나 e-book에 줄 치고 자기 생각을 메모하는 사람을 본 적은 거의 없다.
책 읽는 행위는 동영상을 보는 행위와는 차원이 다른 ‘리추얼(ritual)’을 동반한다. 리추얼이란 정서적 변화와 더불어 ‘의미’가 구성되는 문화적 행위를 뜻한다. 우리가 공동체의 중요한 날들을 기리기 위해 하는 행사들, 즉 개인이나 가족의 기념일을 챙기는 이유는 바로 ‘의미’를 구성하는 인간만의 특별한 문화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음악회를 가는 것은 단순히 음악만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음악만을 들으려면 집에서 녹음이 잘된 CD를 들으면 된다. 요즘은 음악회 실황을 아주 좋은 음질로 생중계하는 인터넷 사이트도 많다. 음악회는 잘 차려 입고, 좋아하는 사람과 팔짱을 끼고 음악회장을 향해 출발하는 행위부터 시작된다. 음악회 중간의 휴식 시간에 잠시 나와, 음악회에 오면 꼭 만나는 반가운 지인들과 샴페인 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행위 또한 음악회라는 리추얼에서 빠뜨려서는 안 된다. (‘샴페인 잔을 들고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독일에서 경험한 음악회를 말하는 거다. 과시의 측면이 강한 한국의 휴식 시간은 많이 다르다. 물론 그 또한 사회적 의미를 포함한다.) 음악회가 끝나고 동반한 사람과 그날 음악회의 감동을 나누는 것 또한 음악회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행위다.
책을 읽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편안한 소파에 몸을 푹 파묻고 백열등의 스탠드 아래서 책을 읽는 행위와 좁은 화면에 머리를 처박고 책을 읽는 행위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책 읽는 행위는 단순한 정보의 습득만이 아닌 ‘문화적 의미’가 동반되는 의례적 행위라는 것이다. 종이신문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종이신문을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식탁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 한 잔과 함께 종이신문을 넘기는 리추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와 ‘만족’이라는 삶의 의미가 있다. 독일 신문의 주말판은 무척 요란하다. 거의 책 한 권 분량의 두께다. 책, 건축, 가드닝, 음식 등의 테마가 각각 별도의 섹션으로 되어 있다. 브런치 카페에 앉아 아주 천천히 이 주말판 신문을 읽어나가는 독일인들의 주말 오전 시간은 너무나 폼 난다. 이런 거 하라고 ‘주5일 근무제’를 하는 거다. 브런치 카페의 음식 사진이나 SNS에 잔뜩 올리며, ‘나를 위한 시간… 힐링힐링’ 하며 남들에게 자랑이나 하라고 주5일 근무제를 하는 게 아니다.
한때 ‘편지공화국’이라는 ‘공동체’가 있었다
종이책과 달리 종이에 쓰는 ‘손편지’는 도무지 살아남을 것 같지 않다. 책의 리추얼은 아직 살아 있지만, 오늘날 손편지의 문화적 의미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기껏해야 ‘성의 있음’을 표시하는 정도다. 음성 통화, 영상 통화는 물론 엄청난 양의 동영상 자료까지 보낼 수 있는 SNS에 손편지 따위는 상대가 안 된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편지가 차지한 기능은 엄청났다. 오늘날의 인간 문명은 편지로 가능했다. 한때 ‘편지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라는 ‘공동체’가 있었다.
편지는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부터 존재했다. 편지 형식을 띤 고대 파피루스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로마인들이 남겨놓은 편지에는 오늘날과 거의 유사한 형식의 인사말들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편지에 ‘정형화된 인사말’을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유학을 가기 위해 독일의 여러 대학에 입학지원서를 쓸 때였다. 사실 당시까지 내가 써본 편지는 어설픈 연애편지 몇 통이 고작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공식적인 편지를 썼다. 독어로 편지 쓸 때는 ‘매우 존경하는…(Sehr geehrter Herr/Frau…)’과 같은 과도한 인사말로 시작해야 하고, 편지 끝에는 ‘친절한 인사로(mit freundlichem Gr??en)’와 같은 관용어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사실이 참 낯설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관용적인 표현들이 이미 고대 로마인들의 편지에서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구 사회에서 시작과 끝의 인사말을 비롯한 편지의 형식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확정된 것은 16세기 이후다.
독일어 편지의 형식. 유학을 준비하며 독일어로 편지를 처음 써봤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에게 ‘매우 존경하는…(Sehr geehrter Herr/Frau…)’이라면서 시작하는 독일어 편지의 형식은 내게 무척 낯설었다. 그들은 전혀 친절한 내용이 아닌 편지 끝에도 ‘친절한 인사로(mit freundlichem Gru?en)’와 같은 관용어를 넣는다. 이 같은 편지의 관용적 표현은 16세기에 굳어진 유럽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리스인들보다는 조금 이후의 시대인 로마인들의 편지에서 보다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표현들이 발견된다. 편지에 정보 전달과 더불어 감정적 교류의 기능이 추가된 것이다. 로마 시대의 웅변가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수많은 사람과 편지로 교류했다. 당시 아테네에서 유학하던 아들에게 보낸 일련의 편지는 『의무론』이란 이름의 책으로 오늘날까지 읽히고 있다. 14세기 베로나 대성당과 이탈리아 북동쪽의 베르첼리(Vercelli)라는 도시에서 키케로의 편지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후 키케로의 편지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가치에 의지하려는 르네상스적 사유에 매우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키케로의 사상뿐만 아니라 키케로가 사용한 지식 교류의 수단으로서의 ‘편지’라는 형식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들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키케로와 더불어 세네카(Seneca, L?cius Annaeus, BC 4년?~65년)는 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편지 마니아’였다. 세네카는 오늘날 ‘자기개발통신강좌’의 전형이라 여겨질 수만큼의 편지를 통한 자기계발서적 교훈을 남기고 있다(사이먼 가필드 저, 김영선 역, 『투 더 레터(To the Letter)』 , 아날로그, 2013년). 이들의 편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기본 의제를 설정한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는 키케로, 세네카로부터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편지라는 형식을 애용한 것도 비슷했다. 페트라르카 또한 수많은 지인들에게 편지를 남겼다.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다. 그의 편지는 500여 통이 남아 있다.
‘편지공화국(Respublica litteraria)’이라는 이탈리아어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417년이다. 당시의 베네치아 공화국의 대표적 휴머니스트였던 프란체스코 바르바로(Francesco Barbaro, 1390~1454)가 콘스탄츠의 동료 포기오 브라치올리니(Poggio Bracciolini, 1380~1459)에게 보낸 편지에서다. 자신의 원고를 독일과 프랑스의 동료들에게 소개해달라는 부탁과 더불어, 자신이 속한 유럽의 지식인 사회를 ‘편지공화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당시 이 표현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고, 곧 잊혀졌다. 당시 이탈리아 인문학자들 사이에는 ‘편지공화국’과 유사한 표현들이 많이 사용됐다. ‘지식인사회(societas literatorum)’ ‘박식한 세계(orbis eruditus)’ ‘편지공동체(sodalitas litteraria)’ 등. 당시만 해도 ‘편지공화국’이 그리 특별한 표현은 아니었던 것이다.
‘편지공화국(republic of letters)’. 유럽에서 국민과 영토에 기반한 ‘국가’가 출현하던 시기에 영토와는 상관없는 편지공화국이라는 지식공동체가 생겨났다. 지구상의 수많은 문화권에서 유럽 문화가 패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지식공동체 때문이다. 새로운 지식의 출현, 즉 ‘지식의 편집’은 바로 이들의 셀 수 없이 많은 ‘편지’를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편지공화국이 의미 있는 개념으로 다시 등장한 것은 1494년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에 의해서였다. 영국의 런던, 프랑스 파리, 스위스 바젤 등 유럽 전역을 무대로 활동한 에라스무스는 지적 문화를 무시하는 야만에 저항하여 편지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때 가톨릭 사제였던 그가 ‘편지공화국’이란 표현에 ‘republic of epistles’란 표현 대신 ‘republic of letters’를 사용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성서의 신약은 대부분 편지의 형태로 되어 있다. 21편이 편지로 되어 있고, 이 중 사도 바울의 편지가 14편이다. 성서의 편지에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epistles’이다. 가톨릭 사제인 에라스무스에게는 이 단어가 훨씬 익숙한 단어다. 그러나 그는 의도적으로 ‘letters’란 단어를 사용했다.
에라스무스는 1517년에 시작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에 앞서 타락한 가톨릭교회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미 무너져버린 중세의 ‘기독교공화국(respublica christiana)’에 대한 우회적 풍자로서 ‘편지공화국’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자, 에라스무스는 뒤로 물러났다. 독일의 마틴 루터는 선배인 에라스무스의 지지를 몇 번이나 요청했으나 그는 외면했다. 에라스무스는 끊임없이 여행 다니며 편지를 썼다. 현재 1600여 통이 남아 있는 그의 편지 발신지로 유럽의 거의 모든 도시가 망라되어 있다. 그는 편지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몇 번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가능한 한 편지는 논의, 장소, 시간, 수신인에 딱 어울려야 한다. 중대한 문제는 진지하게, 평범한 문제는 깔끔하게, 사소한 문제는 세련되고 재치 있게 다루되, 쓴소리는 간절하면서 기개 있게, 위로는 달래면서 친절하게 해야 한다.’(앞의 책, 131쪽).
16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편지공화국의 범위가 전 유럽에 걸쳐 확대된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시기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아주 활발하게 활동한다. 유럽의 봉건제가 ‘국민’과 ‘국토’에 기초한 ‘국가’라는 근대적 체제로 변화해가는 과정에서 정치적 영토 개념에 구애받지 않는 ‘편지공동체’라는 지적 커뮤니티가 출현한 것이다. 편지공화국은 오로지 편지와 출판물로만 운영되었다. 수백 년에 걸쳐 편지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에 앞선 과학적 지식을 소유하고자 했던 유럽의 왕들과 귀족들의 후원 덕분이다. 훌륭한 학자를 후원하는 것은 그만큼의 평판을 얻는 효과가 있었다. (이 독특한 유럽의 후원 문화가 갖는 특별한 의미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겠다.) 그러나 편지공화국이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인정투쟁’이라는 학자들만의 독특한 심리적 욕구 때문이다. ‘동료학자들의 평가’는 편지공화국 유지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금전적 인센티브나 명예보다는 동료학자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 편지공화국의 참여자들이 그토록 지적 혁신에 몰두했던 것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문화심리학자이자 '나름 화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 <남자의 물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현재 전남 여수에서 저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프랑수아즈
2018.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