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비잠>의 한 장면
처연한데 예쁘다. 독창적이지 않은데 섬세하다.
일단 여배우가 나카야마 미호다. 고개 젖힌 모습으로 내게 각인된 <러브레터>의 배우, 그녀가 연기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료코는 옷을 아주 잘 입는다. 우아하고 색감 좋은, 디자인이 눈에 띄는 옷차림. 그리고 사는 집은 유명 건축가가 설계했을 게 분명한 공간 구조. 내게는 스타일리시한 영화 <나비잠>.
소설가, 서재, 만년필, 원고지, 싱글 중년, 반려견, 책꽂이, 베스트셀러......내가 혹할 키워드가 포진해 있다. 일본 영화인가 싶지만 일본어 영화다. 정재은 감독 작품.
봄에 일본에서, 가을에 한국에서 개봉했다. 유명 작가 료코와 작가 지망생이자 한국 유학생 소찬해의 사랑 이야기다. 영화 중 유일한 한국어는 ‘나비잠’, 갓난아이가 두 팔 올려 자는 잠을 일컫는 단어. 나비잠을 자고 막 눈을 뜬 료코 곁에서 연인 찬해가 설명해준 이 한국어가 영화 제목이 되었다. 사랑은 꿈처럼 아름답고 꿈처럼 사라지기 때문일까. <나비잠>은 제목마저도 감각적이다.
료코와 찬해는 만년필 때문에 만났다. 료코의 분신 같은 만년필을 찬해가 일하는 가게에서 분실하고 찾아준다. 국적, 나이, 신분으로 보자면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서 맺어진 연인이지만 그것이 그러니까 운명이겠지.
찬해는 료코가 가장 아끼는 만년필과 반려견 톤보를 잃었을 때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다. 톤보를 다시 찾을 수는 없지만 자신은 동거인으로 남았다. 그리고 유전형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작가 료코에게 만년필 같은 존재가 된다.
점점 기억이 사라져가는 작가 료코의 마지막 작품을 그들은 함께 쓴다. 료코가 구술하고 연인이 문장으로 옮기는 방식, 찬해는 ‘사오리와 고스케의 연인 이야기’에 깊이 개입한다. 훗날 작가가 된 찬해가 그들이 함께 썼던 작품 <영원의 기억>을 읽으며 그 흔적을 발견하고 연필을 드는 장면은 문학적이다.
영화 <나비잠>의 한 장면
<나비잠>은 내게 강렬한 두 컷을 남겼다. 다리를 서로 겹친 채 책을 읽는 두 사람, 찬해의 손이 가만히 료코의 발등을 토닥이는 장면 하나와 원고지를 창문에 붙인 채 빨간 펜으로 수정하는 장면이다. 연인의 발과 원고지!
영화관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부른 노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로>가 절로 나온다. 어렵게 사랑하고, 사랑을 잃고 글을 쓰는 문학적인 사람들. 잘 가거라, 더 이상 내 것인 아닌 열망들아를 되뇌는 사람들.
정재은 감독은 “우리는 늘 계속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은 변하고 끝난다. 사랑이 끝난 다음에 무엇이 남는가”를 탐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요양원의 료코를 뒤늦게 찾아간 찬해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기억합니다’라는 료코의 눈빛을 받는다. 사랑의 흔적은 기억을 뛰어넘어 바로 알아보는 것. 한쪽만 기억한다 해도 그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을이다. 어렵게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겐 더욱 아픈 계절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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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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