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어릴 적에는 아침에 곧잘 일어나던 아이가 언제부턴가 아주 게을러진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5분만 더, 5분만 더…’ 하다가 학교에 늦는 일이 다반사에요. 주말이면 하는 일도 없이 새벽까지 잠을 안 자다 정오가 다 돼서야 일어나지요. 전문가들은 아이를 믿으라고 합니다. 잔소리 해봐야 역효과만 난다는 건 전문가 아니라도 아는 얘기지요. 하지만 다른 집 아이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공부를 할 거라 생각하니 불안해집니다. 깨우기만 하고 모르는 척 하려고 했는데 부시시한 모습으로 나오는 아이를 보니 저절로 혀를 끌끌 차며 기어이 한마디 하고 맙니다. “아니, 학생이 이렇게 늦게 일어나 무슨 공부를 하누? 엄마아빠 때는 4당5락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지요? 청소년 스스로도 맘이 편하지 않아요. 난 왜 이렇게 게으를까 자괴감이 들지요. 걱정할 거 없어요! 다른 친구들도 다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그렇듯 수면 패턴 역시 진화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골이나 산 속에 가본 적이 있나요? 해가 지면 칠흑처럼 깜깜해지는 곳, 손을 눈 앞에 대고 꼼지락거려도 보이지 않는 곳 말이에요.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살았을 겁니다. 일단 해가 지면 어두워서 뭘 할 수 없는 데다 위험하기도 했지요. 모든 활동을 해가 뜨고 지는 데 맞추는 것이 편하고 유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24시간 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이란 게 생겨났습니다. 자고 깨는 건 물론, 체온, 혈압, 맥박, 호르몬 분비 등이 대략 24시간 리듬에 맞춰 움직이지요. 몸속에 ‘생체시계’가 생긴 겁니다. 이런 리듬은 수많은 동물과 식물에서도 관찰됩니다. 태양의 위대한 힘이지요. 1억 5천만 km를 넘어 이런 열기를 보내는 위대함은 좀 야속합니다만…
24시간 주기 리듬은 뇌 속의 시교차 상핵이란 곳에서 조절됩니다. 말이 어렵죠? ‘시교차’만 이해하면 됩니다. 눈의 망막에 물체의 상(像)이 맺히면 그 신호는 시신경을 타고 뇌 뒤쪽에 있는 시각중추로 전달됩니다. 그런데 오른쪽과 왼쪽 시신경이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서로 엇갈려서 진행하지요. 엇갈리는 부분을 시신경 교차, 즉 시교차라고 합니다. 시교차 상핵이란 시교차 바로 위에 있는 구조란 뜻입니다. 이곳이 시신경 가까이 있다는 건 우연이 아니지요. 아침에 해가 떠올라 빛이 눈에 들어오면 시교차 상핵이 활성화되어 우리 몸을 깨웁니다. 체온을 올리고, 혈당을 올리는 호르몬을 분비시켜 몸에 에너지를 공급하지요. 계속 졸리면 안 되니까 졸음을 일으키는 호르몬을 억제시킵니다. 그 호르몬 이름이 멜라토닌입니다. 멜라토닌은 어두워질 때쯤 분비됩니다. 자연스럽게 잠들어 밤새 푹 잘 수 있는 건 멜라토닌 덕분이지요.
그런데 청소년은 늑대인간이라고 했지요? 모든 게 변합니다. 대략 10세쯤부터 멜라토닌이 분비되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집니다. 그래서 중고생은 11시 전에 잠들기 어렵습니다. 새벽 1-2시까지도 별로 졸리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청소년은 성장발달을 위해 하루 8-10시간은 자야 합니다. 그런데 아침에는 학교에 가야 하니 8시 전에는 일어나야 하잖아요. 결국 대부분의 청소년이 만성적인 수면부족 상태인 셈입니다. 일요일에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는 건 게으른 게 아니라 생리적으로 자연스런 현상이지요. 이런 사실이 알려지고 서양에서는 등교시간을 늦추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등교시간을 늦추면 성적이 올라가고, 학교폭력이 줄어든다는 연구도 계속 발표됩니다. 우리나라도 경기, 충북, 제주 등지에서 등교시간을 늦춘 바 있습니다.
잠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특히 뇌기능에 중요합니다. 잠은 창의력, 기억력, 주의력, 판단력, 문제해결능력, 계산능력 등 모든 인지기능은 물론 감정이나 기분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잠이 부족하면 우울증이 생기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지요. 신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자는 동안 성장호르몬이 많이 나와 키가 큰다는 사실은 다들 알지요? 뿐만 아니라 잠은 심장병, 당뇨병, 건강한 피부, 그리고 비만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2014년 컬럼비아 대학 연구팀은 1만명의 청소년을 조사하여 하루 6시간 미만으로 자는 경우 비만이 될 가능성이 20% 높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심지어 청소년기에 잠이 부족하면 중년이나 노년기에 비만이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청소년의 수면시간은 점점 줄고 있습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이래 인류의 수면시간은 꾸준히 줄었다고 하죠. 밝은 빛이 24시간 주기 리듬을 흩뜨리기 때문입니다. TV가 등장한 후에는 더 심각해졌고요. 요즘은 더더욱 심각합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때문입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스마트폰을 갖고 잠자리에 듭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에 좋아요가 몇 개나 달렸는지, 아이돌 그룹의 동영상이 올라오지는 않았는지, 친구에게 메시지 온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 득달같이 답장을 하고 댓글을 달지요. 24시간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잠이 올 수가 없지요. 잠이 안 와서 스마트폰을 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기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얘깁니다.
인공적인 빛이 생체시계를 자꾸 흩뜨린다고 했지만 빛은 파장에 따라 세분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디지털 기기에서는 파장이 짧은 청색광을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청색광은 생체시계 교란 작용이 가장 강합니다. 디지털 기기가 늘어나는 것과 현대인의 수면문제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걸 뒷받침해주는 증거지요. 그래서 청색광을 차단하는 갈색 렌즈를 초저녁부터 착용하면 잠을 잘 잘 수 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더 쉬운 방법이 있어요. 스마트폰을 잠자리에 갖고 가지 않는 겁니다. 거실에 놓아 두거나 꺼 두면 됩니다.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24시간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건 정신을 혹사시키는 일입니다. 또 하나, 늦게 자는 버릇이 들면 자꾸 야식을 먹게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잠이 부족한데 자기 전에 뭔가를 먹으면 위와 장이 그걸 소화시키느라 밤새 일을 해야 합니다. 야식을 먹으면 살이 찌는 건 물론이고 위와 장에 좋지 않을뿐더러 숙면을 취하기도 어렵습니다. 잠을 많이 자기만 하면 키도 크고, 피부도 좋아지고, 살도 빠지고, 기분도 좋아지고, 공부도 더 잘하게 된다는데 망설일 필요가 있나요? 당장 오늘부터 스마트폰을 끄고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어봅시다!
강병철(소아청소년과 전문의,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대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다. 2005년 영국 왕립소아과학회의 ‘베이직 스페셜리스트Basic Specialist’ 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며 번역가이자 출판인으로 살고 있다. 도서출판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의 대표이기도 하다. 옮긴 책으로 《원전, 죽음의 유혹》《살인단백질 이야기》《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존스 홉킨스도 위험한 병원이었다》《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