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나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누구에게나 대작으로 인식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런데 6개월 만에 백만 부가 팔렸다는 마가렛 미첼의 원작 소설은 1936년에 출간됐고, 아카데미상 10개 부문을 휩쓴 영화도 1939년에 개봉했으니 아무리 명작이라도 쉽게 다가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2003년 프랑스에서 초연된 공연으로 감상해보면 어떨까? 영화만큼 화려한 무대 세트와 의상, 내로라할 배우들이 영화에는 없는 음악과 함께 명작의 매력을 새롭게 써내려가고 있는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말이다. 스칼렛 오하라, 레트 버틀러, 애슐리 윌크스 역에 각각 바다, 신성우, 테이, 백형훈 등이 이름을 올렸는데, 요즘 TV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더욱 친숙해진 뮤지컬배우 백형훈 씨를 직접 만나 무대 안팎의 얘기를 들어 보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과거에 책이나 영화로 본 적이 있나요?
공연을 준비하면서 영화를 처음 봤어요. 소설은 워낙 방대해서 읽어볼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웃음). 영화도 긴데 정말 재밌게 봤어요. 영상, 사운드, 의상 등 그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나 싶고 배우들의 연기도 충격적이었어요. 당시 영화 기술을 한 단계 높인 작품이라고 해요.
독특한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백형훈 씨가 맡은 애슐리는 어떤 캐릭터인가요?
마가렛 미첼은 다양한 군상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스칼렛은 극적인 인물이지만, 그 외 인물은 그 시대에 있을 법한 대표적인 캐릭터들이 아닐까. 애슐리는 남들이 볼 때는 엘리트지만 세상 물정 모르고 자신의 의지나 줏대는 없는 인물이죠. 그래서 전쟁 같은 고난이 닥쳤을 때 이겨내지 못해요.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남자라고 생각해요. 유혹에 약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 애슐리를 보면서 많이들 답답해하시는데, 분명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인물이라서 작가가 이런 캐릭터를 비중 있게 그려낸 게 아닐까 싶어요.
레트는 애슐리와는 확연히 다른 캐릭터인데, 굳이 나누자면 어느 쪽에 가깝나요(웃음)?
레트는 자기 의지도 확고하고 타고난 장사꾼이죠. 저는 평범한 편이라 애슐리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애슐리처럼 쉽게 의지를 꺾지는 않아요. 제 갈 길은 갑니다. 레트처럼 자유분방하지도 않아서 딱 중간이지 않을까(웃음).
작품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요?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인데, 저는 그렇게까지 힘든 시절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 시대 사람들의 감정, 그 삶의 굴곡을 이해하는 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작품의 배경은 미국이고, 원작 소설과 영화도 미국에서 만들어졌지만, 뮤지컬은 프랑스에서 제작됐잖아요. 색다른 점이 있나요?
작품 자체는 미국색이 짙은데, 뮤지컬은 또 프랑스색이 들어 있어요. 노예제도나 인종차별 등의 사회적인 문제가 나오는데, 프랑스는 그런 부분을 혁명을 통해 바꾼 나라잖아요. 그래서 흑인 노예장이 원작에서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사는데, 뮤지컬에서는 부당함을 느끼고, ‘인간은’이라는 넘버에서도 평등을 노래해요. 그런 부분은 인상적이었어요. 또 음악은 프랑스뮤지컬의 경우 개성이 뚜렷하잖아요. 한국 정서와도 잘 맞는 것 같아요. 웅장하고, 듣기 좋고, 선율이 아름답고. 주위에서 90년대 한국 가요 같다고도 하시더라고요.
실제로 이번 작품에 90년대에 스타 가수들이 상대역으로 나오잖아요.
맞아요. 신기했던 건 예전에 <엘리자벳>을 했는데 그때 옥주현 누나가 있었고, 이번에는 바다 누나가 있잖아요. S.E.S와 핑클은 저 초등학교 때 우상이었거든요. 그 시절을 대표하는 두 걸그룹의 메인 보컬 분들과 작품을 하는 게 정말 신기해요(웃음).
백형훈 씨도 이제 TV에 나오잖아요(웃음). 프로그램 참여 전에 생각했던 것들은 이뤄졌나요?
기대 이상으로 달성했죠. 사실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어렸을 때 꿈이 가수라서 오디션을 많이 봤는데 방송으로 진행되는 건 감정 소비도 심하고. 그런데 주변에서 저를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설득해 주셨어요. 한번 나가보자 싶었는데, 하면 할수록 욕심도 생기고, 방송은 짧게 나가지만 그 과정이 정말 치열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노래를 왜 시작했나 다시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어쨌든 결승까지 가서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도 입증됐고. 무엇보다 방송을 통해 뮤지컬을 보러 오시는 분들이 생겨서 기뻤어요.
사실 뮤지컬배우에게 노래는 연기의 일부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작품에서 넘버를 부를 때는 캐릭터의 감정과 그 넘버를 통해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은지에 가장 중점을 둬요. 넘버는 노래라기보다는 연기니까요. 대신 그렇게 되려면 평소 연습을 통해 기본적인 가창력은 갖춰야죠. 결국 ‘배우가 노래를 잘한다’는 건 ‘노래만 잘한다’가 아니라 ‘노래와 연기 모두를 잘한다’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공연과 방송, 균형을 잘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배우로서 어떤 ‘내일’을 꿈꾸나요?
사실 ‘나도 이제 어떤 작품의 어떤 배역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잠시 착각할 때가 있었는데, 너무 심각한 오만과 자만이더라고요(웃음). 뮤지컬 무대가 가장 좋고, 아직도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제 나이에 맞는 역할들을 차곡차곡 해나가면서 어떤 배역에 제 이름이 거론됐을 때 누가 봐도 ‘잘 어울리겠다’는 말을 듣는 게 제 단기 목표입니다. 오래 무대에 서고 싶지만, 가늘고 길게 가기보다는 어느 정도 도톰하게 가고 싶고요(웃음).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