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뮤지컬이 초연부터 사랑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창작진의 머릿속에 존재하던 이야기가 지면으로 옮겨진 뒤 연습실에서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 있었다 해도 정작 무대라는 특수한 공간, 관객들 앞에서 공연되다 보면 수정과 보완이 필요하게 마련인데요. 이 작품 역시 작은 변화들을 거듭했지만 초연부터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2016년 초연돼 객석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6개월 만에 앙코르 공연을 펼쳤던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인데요. <라흐마니노프> 가 6월, 단 37회 공연으로 다시 관객들을 만날 예정입니다. 초연부터 참여했던 박유덕, 안재영, 김경수, 정동화 배우가 작품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연습을 마친 김경수 씨를 한 카페에서 직접 만나봤습니다.
“벌써 세 번째 무대지만, 새로운 공연장에서 하고, 해가 바뀌면서 배우마다 또 다른 생각들이 누적됐을 테니까 그런 점도 전달돼야겠죠? 그래서 처음 공연하는 것처럼 연습하고 있어요.”
<스모크>도 공연 중이잖아요. 에너지 소모가 큰 작품이고, <라흐마니노프> 도 2인극이라서 번갈아 무대에 오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 <라흐마니노프> 를 공연하는 기간에는 <스모크> 공연을 하지 않기로 했어요. 사실 겹치지 않게 하려고 작년부터 <라흐마니노프> 일정을 물어봤는데, 대관 문제 때문에 확정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공연들을 진행했거든요. 작년, 재작년에 이른바 겹치기를 좀 했는데, 스스로는 큰 문제가 없지만 관객들 입장에서는 그 모습이 마냥 좋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짧은 기간에 배우로서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거든요.”
지난해까지 너무 열심히 달렸던 김경수 씨는 연초에 여행도 하고 쉬면서 스스로를 충전했다고 하는데요. 멋진 차림으로 인터뷰에 나선 김경수 씨에게 여행 때도 패션에 신경 썼느냐고 물어봤습니다(웃음). 답변은 영상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죠!
<스모크>는 트라이아웃 때부터, <라흐마니노프> 도 초연부터 참여했으니 두 작품 모두 낳지는 않았지만 키우다시피 했는데(웃음), 배우로서 계속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가요?
“그럼요, 말씀하신 것처럼 초연부터 기르고 키웠는데 어떻게 놓겠어요(웃음). 다른 사람 눈에는 욕심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에서 오랫동안 공연되는 작품을 봐도 한 배우가 장기적으로 참여하잖아요. 작품에 대한 책임감과 주인의식인 것 같아요. 작품을 좋은 쪽으로 발전하고 다듬어야 하니까. 그렇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엄청난 쾌감이 있거든요. 새로운 시즌에 또 다른 배우들이 와서 함께 고민하면서 의견을 교류할 때 묘한 느낌이 있고요. 제가 그들보다 낫다는 게 아니라 생명을 연장한 느낌이랄까. 굉장히 감사해요.”
<라흐마니노프> 는 초연 때부터 같은 배우들이 무대에 서잖아요. 호흡이 정말 잘 맞는 반면 그래서 더 주의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편해서 무대 위에서 김경수와 박유덕, 김경수와 안재영이 나오면 안 되겠죠. 합이 너무 잘 맞을 때 거기서 더 가버리면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거든요. 그런데 해가 바뀌어 다시 만나니까 눈의 깊이나 대사의 톤이 달라져 있더라고요. 달라진 그들과 다시 호흡을 맞추는 거라서 익숙하기보다는 이번에는 더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유덕, 안재영 씨가 표현하는 라흐마니노프는 각각 어떤 특징이 있나요?
“참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유덕 배우는 대본에 충실한 편이에요. 그 충실함 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찾아내는 것 같아요. 대사가 없는 사이사이를 많이 연구하고. 두 사람 모두 섬세한데, 유덕이는 다른 작품도 같이 해서 오랜 벗 같은 느낌이 들어요. 재영이는 동생 같고요. 실제로 달 박사와 라흐마니노프는 나이 차가 많았대요.”
정동화 씨가 연기하는 달 박사는 어때요?
“저보다 훨씬 재밌습니다. 위트가 넘치고, 애드리브도 재밌게 잘하는 친구거든요. 니콜라이 달이라는 인물을 잘 구축하기 위해서 초연 연습할 때부터 서로 얘기를 많이 했는데, 제가 좀 진지한 편이라면 동화가 더 유연하게 분위기를 환기하는 편이라고 할까. 큰 방향성은 같고요.”
정신의학자라고 하면 보통 진지하고 진중한 느낌으로 많이 표현할 것 같은데, 작품이 무겁게 갈 수 있는 상황에 웃음을 주는 인물이기도 해요.
“그게 바로 동화의 힘인 것 같아요. 저는 처음에 정말 진지하게 접근했는데, 동화가 재밌는 부분들을 많이 찾아왔어요. 사람이 다르니까 똑같이 표현하기는 힘들 것 같아서 제 나름의 접근 방식을 고민했죠. 일부러 재밌게 하는 것보다는 재밌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본 거예요. 예를 들면 차이코프스키가 어설프게 발레를 하는 장면이 짧게 나오는데, 워낙 유명한 발레곡이 많으니까 그가 발레를 익혔을 것이라는 전사를 입혀 봤어요. 3일 배웠다는 건 제 애드리브이고 희화화되긴 했지만(웃음), 정말 발레를 이해하고 싶었을 것 같아요.”
세 번째 무대인데, 라흐마니노프를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나중이라면 모르겠는데, 유독 이 작품은 라흐마니노프보다는 니콜라이 달을 어떻게 잘 만들지에 대한 생각이 커요. 사실 처음부터 니콜라이 달이라는 인물이 궁금하고 재밌을 것 같았거든요. 제가 악기 연주하는 걸 좋아해서 라흐마니노프도 해보고 싶긴 하지만.”
연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바이올린은 일부러 그렇게 연주하는 거예요(웃음)?
“비올라예요. 원래 못하는 것도 있고, 공연을 위해 기본적인 건 익혔지만 진지하게 가니까 재미가 없더라고요. 못 켜면 못 켤수록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이 열리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사실 아무리 연주를 잘해봤자 라흐마니노프 귀에 찰까요? 일부러 못 켜서 상대를 자극하고 그 마음을 열게 한다면 그 방향이 맞는 것 같더라고요.”
하긴 바이올린은 리드 악기지만 비올라는 현악 파트에서도 중재하는 성격이 강하잖아요. 달 박사의 직업과 어울리네요. 대본에는 어떤 식으로 표기돼 있어요?
“대본에는 원래 없었어요, 비올라 자체가. 초연 때는 인물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잖아요. 니콜라이 달은 정보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어딘가에 아마추어 비올라 연주자였다고 적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걸 이용한 뭔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비올라는 슬픈 표정의 철학가다’라는 대사 역시 대본에 없는 말인데 욕심을 냈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 이 대사를 넣어보고 싶다고. 니콜라이 달의 직업과 닮아 있잖아요. 누군가를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얘기해 보세요, 들어줄게요’라며 잘 들어주는 사람이니까요.”
함께 연기하는 즈베레프 교수도 달 박사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꽤 비슷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맞아요, 심지어 두 사람 모두 이름이 니콜라이예요. 재밌죠(웃음)? 접점이 있죠. 각각 프로이트,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열등감도 있고, 결국 라흐마니노프를 통해 성장하죠. 달 박사는 정신의학자로서는 아직 초년생이지만,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진심을 읽어주고 받아주면서 스스로도 자신의 직업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하지 않나.”
달 박사는 라흐마니노프에게 자기 암시를 제시하는데, 김경수 씨는 어떤 자기 암시를 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고 있나요?
“예전에는 ‘초심을 잃지 말자’였는데, 진부할 수 있지만 정말 중요한 말이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모든 걸 행복하게, 감사하게’라는 점도 생각해요. 괴로운 시기가 있었거든요.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고통스럽고, 무대에 올렸을 때 사람들의 안 좋은 평이 있으면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에도 속상하고요. 사실 평이 안 좋다는 건 그만큼 기대했으나 그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건데. 그것마저도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라는 걸 절대 잊지 말자는 게 요즘 저의 자기 암시예요. 그래서인지 작년 하반기부터 매 순간 기쁘게 작업하고 있어요. 생각이 달라지니까 표정도 밝아지고 풍기는 에너지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웃음).”
‘나는 사랑 받는 음악가입니다. 새로운 곡을 쓰면 관객들이 나를 사랑해줄 겁니다.’ 달 박사가 라흐마니노프에게 알려준 자기 암시죠. 배우들 역시 이런 자기 암시가 없다면 무대에 오르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특히 객석의 반응이 입증되지 않은 창작뮤지컬로 무대에 설 때면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피나는 연습이 가장 중요할 텐데요. 수많은 제작진과 배우들의 절실한 자기 암시, 그만큼의 노력으로 재연에 나선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는 6월 9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에서 단 4주간 공연됩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와 그의 가려진 시린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주는 한 정신의학자의 따뜻한 이야기를 현악 연주 팀의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만나 보시죠!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