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가기 전에, 세계를 읽다] 궁금했던 그 문화 이야기 - 독일 편
<세계를 읽다> 시리즈는 장소보다는 사람, 그리고 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본격적인 세계문화 안내서다. 그곳에서 직접 살아보며 문화적으로 적응하는 기쁨과 위험을 몸소 겪었던 저자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현지인의 생활문화, 관습과 예법들을 쉽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 칼럼에서는 매주 한 나라의 책에서 한두 가지 주제를 선정해 여행자들이 궁금해할 법한 그 문화 이야기를 속 깊게 들려주려 한다.
글ㆍ사진 도서출판 가지
2018.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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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상징이었던 찰리 검문소가 남아있는 베를린 거리. 동쪽으로는 과거 동독군 사진이, 서쪽으로는 연합군 사진이 크게 걸려 있다. ⓒShutterstock

 

 

‘통일 독일에서 미리 만나는 ‘차이의 문화’

 

독일 역사는 숨 막힐 듯한 급상승과 급강하, 과격한 회전과 방향 전환, 정신 없이 빠른 변동을 반복하는 롤러코스터 타기에 비유할 수 있다. 어떤 나라도 희망과 두려움, 꿈, 충성과 극단적 경향, 운명과 열정을 근대 독일처럼 강렬하게 경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독일의 첫 여성 총리이자 동독 출신인 앙겔라 메르켈은 정치적 인기가 무척 높다. 통일 독일에 여전히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사람들은 연합정부가 조금씩 풀어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옛 동독 출신의 정치가가 키를 잡고 있는 한 동서독의 분열을 빠르게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동서의 차이점


지역별 다양성이 뚜렷한 연합국가인 독일에서 가장 큰 차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옛 동독과 서독, 즉 동독인과 서독인 사이에서 발견된다. 40년 동안(그것도 역사상 가장 급속한 변화가 일어났던 40년!) 완전히 다른 정부와 경제체제 아래서 살아온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형성되지 않았으리라고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동서로 분리된 40년의 격차는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 뷔어 진트 아인 폴크)”라고 거리에서 숱하게 외쳤던 수많은 독일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깊게 뿌리내려 있었다. 독일을 두 나라로 나누었던 물리적 장벽을 의기양양하게 허문 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이 ‘머릿속의 장벽’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베시스(wessis. 동독인이 서독인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 ‘서쪽 놈들’ 같은 뜻)와 오시스(ossis. 서독인이 맞받아서 동독인을 가리키는 말) 사이의 주요한 차이에는 그들이 살아온 체제가 반영되어 있다. 동독인은 서독인이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고 피상적이며 자기 눈앞의 좁은 사회에만 관심을 갖고 오만하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서독인은 동독인이 너무 게으르고 단순하며 원하는 것을 급하게 얻으려 하면서도 진취적이지 못하고 불안정하다고 맞받아친다.

 

두 지역의 격차는 사람들의 정신뿐 아니라 산업 경관과 주택 공급에도 존재한다. 옛 동독 지역의 많은 공장과 시설은 가망이 없을 정도로 낡고 비효율적이어서 몇몇 공장은 설비를 교체했지만 대다수 시설은 사용이 불가능해 폐쇄되었다. 오늘날 최신식 공장이 계속해서 들어서고 있는데, 정부나 경제계의 낙관주의자들은 서독의 설비 시설보다 한참 앞선다고 떠들어대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관측이 한낱 낭만적인 환상에 불과하다고 저평가한다.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옛 동독 지역의 위험한 환경오염 상태였다. 옛 동독의 공산주의자들은 산업 공해가 자본주의의 착취적인 생산 방식에서만 나온다고 생각해 안심이라도 했던지 각종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공장을 별 제제도 없이 잔뜩 지어놓았다. 거기서 나오는 무시무시한 오염물질을 신속히 제거하지 않고 공장 및 발전소를 폐쇄하지 않은 탓에 1990년대에 동독 내 많은 지역의 공기와 물이 오염되었다.

 

한편, 통일 직후 몇 년 동안 옛 동독 지역을 여행한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부딪힌 문제는 가는 곳마다 크게 차이가 나는 도로사정과 그로 인한 엄청난 불편함이었다. 옛 동독 지역은 심지어 주요 도로와 아우토반(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이 잘 정비되지 않거나 2차선이어서 속도가 나지 않고 불편했다. 기차 여행도 서독 지역만큼 쾌적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이런 모든 상황들이 크게 개선되었다. 독일 연방정부와 도이치반(독일 국영 철도회사)이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한 결과, 동서 간 도로 격차는 거의 제거되었고 환경적으로 위험 지역이었던 동독 도시들의 상태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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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분단의 상징이었지만 멋진 갤러리로 탈바꿈한 베를린 장벽. 베를린을 사랑한 젊은 예술가들의 자발적 참여로 완성되었다. ⓒShutterstock

 

 

동서가 만나는 베를린


베를린은 독일의 험난한 재통합 과정이 가장 빠르고 의미심장하게 진행되었던 곳이다. 이전에 동독에 속했던 구역들은 오늘날 서독과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가장 부유하고 호화로운 마을들은 여전히 서 베를린에 있지만 동 베를린 지역도 수준을 상당히 끌어올렸다. 물론 동 베를린은 과거 공산주의 국가였던 동독의 전시 도시였던 데다 옛 독일 제국과 나치 독일의 정부가 자리 잡았던 곳이기에 이전에도 웅장하고 화려하기는 했다.

 

베를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분단되면서 동 베를린과 서 베를린으로 나뉘었다가 1989년 통일이 되면서 다시 하나의 도시로 합쳐진 역사를 갖고 있다. 1948년부터 1989년까지 매우 독특한 상황과 지위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지역적 특성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통일 전 서 베를린은 개방적이고 자극적인 유흥 문화로 수많은 젊은이를 끌어 모았는데, 당시 청년들이 십대를 베를린에서 보내면 군 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은 전반적인 개방성과 관용,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인해 다른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의 집결지가 되었고, 시의회에서 제공하는 넉넉한 보조금과 도시의 매혹적인 분위기로 많은 예술가를 유혹했다. 이런 강점들 덕분에 베를린은 ‘자유분방함과 기행의 도시’라는 오늘의 평판을 얻었다. 이는 진실에 가깝고, 다른 지역에 사는 독일인들도 베를리너를 감탄 섞인 갈망과 관용의 눈길로 바라보는 편이다.

 

그러나 통일 이후 베를린에는 심리적으로 심한 분열 현상이 존재했다. 몇 년 전만 해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표면상 하나가 된 지 20년이 지난 된 베를린에서 많은 젊은이가 자신을 동독 또는 서독에 속한다고 생각한다는 보도를 했다. 동 베를린에 사는 젊은이들은 도심지에 베시(Wessi)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화려한 클럽과 커피숍, 미술관, 디스코텍들이 들어서느라 자신들은 더 이상 돌아다닐 데가 없다고 불평했다. 그들은 서 베를린의 젊은이들이 가는 모임 장소나 서구화된 동독 지역 어디에서도 불편함을 느끼며 결국 고향의 더욱 외진 구역을 찾아 들어간다(많은 상을 받았던 영화 <굿바이 레닌>은 이런 혼란스런 감정을 어두우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잘 보여주었다). 한편 베시스들은 동 베를린 중심가와 고풍스런 프렌츨라우어베르크의 몇몇 ‘인기 있는’ 장소를 즐겨 찾지만 그들의 안락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동독 외곽 지역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 독일 내에서 가장 개방적인 성향으로 알려진 베를린에서도 이처럼 견고한 ‘머릿속의 벽’이 남아 있는 것이다.

 

독일에서 벌어지는 현상 중에 특기할 만한 것으로 오스탈기(ostalgie. 동독에 대한 향수)가 있다. 이는 동쪽과 향수를 뜻하는 독일어를 합성한 말로, 가능하면 옛 동독의 생활방식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물론 독재나 비밀경찰, 정치 선전 등의 부정적인 역사는 예외로 하고 말이다. 이런 목적에서 론도 커피(Rondo Melange), 슈프레발트 오이피클(Spreewaldg?rken) 등 동독 시대의 브랜드를 그대로 유지한 애호식품들이 1990년대 초반 독일 시장에 재등장해 사랑을 받았다. 베를린의 유명한 알렉산더 광장에는 과거 계획경제의 장점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겨냥해 ‘99퍼센트 동독 제품’이라는 이름을 내건 상점들이 들어섰다. 이런 오스탈기 흐름이 영화 <굿바이 레닌>의 상업적 성공을 이끄는 데 한몫 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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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프렌츨라우어베르크의 인상적인 건물 벽화. 예술가들의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Shutterstock

 

 

께 살아가기


어쨌거나 오늘날 서독 지역에서 거주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옛 동독 지역 출신이다. 통일 후 동독인의 약 7분의 1이 서쪽으로 이주했다. 동독 지역 5개 주의 인구는 통일 후 10여 년 만에 18퍼센트나 줄었다.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향하는 인구가 젊은 층, 여성, 특히 고급 인력이 대다수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인구 변화는 심각했다.

 

동독 출신의 재능 있고 진취적인 젊은이들은 고향에서는 자기 재능에 맞고 보수가 좋은 직장을 찾기 힘들어 서독 지역으로 떠난다. 그러나 이들 중 다수는 이전에 고향을 떠났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친절과 동료애, 호의가 부족한 서쪽 사람들에게 실망을 느끼며 고향을 떠나온 일을 후회한다. 확실히 옛 동독인들은 서독인보다 ‘머릿속의 벽’을 더욱 뚜렷하게 느낀다. 서독 지역의 높은 생활수준에는 만족하지만 고향에서 경험했던 인간적 관점들을 잃게 된 것을 후회한다. 그들이 보기에 베시스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일에만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 한편 베시스가 볼 때 오시스는 여전히, 어쩌면 더욱더 ‘집단’에 집착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수가 지금도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어쩌면 이렇듯 어쩔 수 없이 이어지는 독일 내의 이주로 인해 양 지역의 격차가 희석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다 보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결국 머릿속의 벽들도 모두 무너지지 않겠는가.

 

이 글을 쓴 리처드 로드(Richard Lord)는 미국인으로 영국과 미국, 프랑스를 거쳐 독일에서만 18년을 살며 일했다. 보스턴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영화와 연극 비평 전문 프리랜서 기자로, 그리고 음식 및 정찬에 관한 월간지 『CHOMP』의 부편집장으로 일했으며, 그가 쓴 작품 한두 편이 보스턴, 런던, 독일에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저서로 『Beyond Walls: Berlin Views』, 『Succeed in Business: Germany』, 『Countries of the World: Germany』, 번역서로 『Thirty Years of German-Israeli Relations』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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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읽다> 시리즈는 장소보다는 사람, 그리고 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본격적인 세계문화 안내서다. 그곳에서 직접 살아보며 문화적으로 적응하는 기쁨과 위험을 몸소 겪었던 저자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현지인의 생활문화, 관습과 예법들을 쉽고 친절하게 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