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저 | 창비
고전과 재미는 서로 무관한 듯 보이지만, 실상 고전이야말로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우스갯소리로, 살아남았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 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소설이 긴긴 세월 생존하기 위해서는, 즉 여러 세대에 걸쳐 널리 읽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미있어야 한다. 물론, 모두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재미있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재미란, 포복절도하고 파안대소하게 하는, 그런 문자 그대로의 재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재미에도 여러 층위가 있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요컨대 너무 흥미진진해서 이 이야기가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하는 작품도 있다. 위대한 감독 히치콕은 언젠가, “영화의 재미는 관객의 방광과 전투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영화가 지루하면 관객은 방광이 보내오는, 소변의 부름에 잡아 먹힌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라이스트가 남긴 몇 편의 소설은, 정말로, 인간의 근원적 욕구마저 잊게 할 만큼 재미있다.
한동안 프랑스 문학을 신봉하며 살아온 우물 안의 개구리로서, 일단 단어를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독일어와 독일 문학에 대해 적잖이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독일 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괴테와 결이 맞지 않았던 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으리라. 그 뒤로 오랜 세월, 차마 다 열거하기 어려운 일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독일 문학의 심오한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사실상 ‘광인들의 만신전’이라 할 수 있는 독일 문학을 어찌 싫어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검은 숲(Schwarzwald) 저편에 잠들어 있는 작가들에게 매료되었다.
그중 가장 먼저 나를 사로잡은 두 작가가 있었으니, E. T. A. 호프만과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다. 나는 E. T. A.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를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전율을 똑똑히 기억한다. 시각적 환상이 없더라도 히치콕의 「현기증」보다 더 경이로운 황홀경을 선사했으니 말이다. 그러고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읽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단편집이 마침내 나를 무릎 꿇렸고, 그 완전무결한 환희를 변함없이 찬미하고 있다. 클라이스트의 그리 길지 않은 일곱 편의 소설을 다 읽고, 그제야 겨우 그의 매력을 깨닫게 되었는데, 황망하게도 더는 읽을 게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희곡을 여럿 발표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건 소설, 장편 소설이었다! 그러나 클라이스트의 문학이 막 피어나던 그때, 그의 연인 헨리에테의 몸속에선 암이 자라나고 있었다. 결국 이제 죽음밖에 기약할 수 없는 두 사람은 함께 죽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방아쇠가 당겨졌다. 그리하여 나는 이 위대한 암시, 즉 (장편 소설을 암시하는) 그의 단편만을 품에 안은 채 여태 살아왔다. 걸작의 징조처럼 보이는 이 짧은 작품들마저 이토록 위대하니, 그가 살아가면서 채워 갔을 (그러나 빈자리로 남아 버린) 세계는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클라이스트는 본디 인생의 목적을 중시하는, 요즘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확신의 J’였지만, 주변 사람들 눈엔 달리 보였던 것 같다. 당대의 인물평을 살펴보자면, 그는 “이상주의적이고 허황한 행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낭만주의자”였다. 어쩌면 사랑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았기에, 그토록 결연한 결정을 내렸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낭만주의자”였던 클라이스트는, 내가 주제넘게 보증허건대, 불세출의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내가 이 같은 절창(絕唱)을 경험하게 된 데에는, 클라이스트의 작품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옮겨 준 황종민 번역가와 이 책의 출간을 이끌어 준 편집자의 덕도 있으리라 추측한다. 아무튼 독일어를 전혀 모르기에 원문의 맛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미하엘 콜하스』(창비)에 수록된 작품들은 하나같이 재미있고, 훌륭하고, 심지어 황홀하다. 이러한 재능을 견줄 만한 작가는 프랑스의 또 다른 낭만주의자, 스탕달을 들 수 있겠으나, 헉 소리 나게 하는 기이함만을 두고 보자면 클라이스트가 단연 압도적이다. 비교적 최근(2013년이니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에 영화화된 표제작 「미하엘 콜하스」를 제외하고도, 이 책에 들어 있는 모든 작품들은 저마다 기적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말줄임표가 등장하는 「O 후작 부인」, 자연의 조화일 뿐인 지진을 신의 축복 혹은 심판으로 해석하며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 「칠레의 지진」 등 문학사에서 숱하게 언급되는 작품들조차 순수하게, 그 자체로 재미있다. 개인적으로는 「성 체칠리아 혹은 음악의 힘」이라는 작품을 좋아하는데, 마치 베르니니가 조각한 「아빌라의 성 테레사의 황홀」을 문장으로 옮긴 듯 법열을 체험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고전이 재미있을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한 클라이스트의 기묘한 매력은,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겐 하나의 난제였다. 으레 위대한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클라이스트 역시 특정 사조에 휩쓸리기보다 그 물결에 올라타고 더 먼 곳을 내다보았다. 요컨대 클라이스트의 작품 세계는 그의 삶을 반영하는데, 오늘날 읽기에도 놀라운 솜씨로 인생의 모순과 행복의 기만을 폭로한다. 『미하엘 콜하스』에 수록된 모든 작품들은 각기 다른 재미를 선뵈지만, 그 각각의 결말만을 따로 추려 보자면, 특정한 법칙을 따르고 있는 듯 보인다. 가령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저마다 예정된 운명으로 곤두박질치는 까닭에, 마치 라이프니츠가 열심히 논증했던 예정조화를 추구하고 있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테드 창의 단편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빛의 속성, 이미 출발한 순간부터 최후에 이르는 최선의 경로를 알고 나아가는 빛의 움직임을 클라이스트의 작품에도 적용해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클라이스트는 라이프니츠를 숭배하는 캉디드와 달리, 낙천주의에 안주하기보다 필연적 운명에 맞서 싸우는, 일견 어리석은 도전같이 보이는 무모함을 인간의 참된 미덕으로 간주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가 마침내 도달한 결말은 모조리 감동적이고,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에 뛰어든 영웅의 출사표처럼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벅찬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이것을 재미라고 불러도 된다면, 클라이스트의 작품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는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클라이스트의 삶 자체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던 듯싶다. 스스로의 운명을 예감했음에도, 잔혹한 식인 장면이 등장하는 『펜테질레아』(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아마존의 여왕 펜테질레아와 영웅 아킬레우스의 미친 사랑 이야기다.) 같은 작품을 굳이 발표한 그의 선택을 보노라면, 과연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운명의 행방을 너무 또렷이 알았기에, 그토록 두려움 없이 자신을 밀어붙였는지도 모르겠다. 괴테의 혹평, 연이은 실패, 이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 명료히 예비되어 있는 연인의 죽음, 클라이스트라는 ‘빛’은 결국 총구에서 산화해 버리고 말았다. 훗날 발저와 카프카가 그를 숭배했다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까?
한때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 책, 『미하엘 콜하스』를 얘기했던 것 같다. 단지 내 취향에 맞거나 문학사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에 그쳤다면, 그토록 미친 듯이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분명히 재미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추천했던 것이다. 평소 고전에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 책을 더 찾아서 읽고 싶어지게 할 만큼 말이다. 앞서 언급한 「성 체칠리아 혹은 음악의 힘」에서 울려 퍼지던 음악, 성상을 파괴하러 성당에 들이닥친 불한당들을 돌연 교화시킨 그 성스러운 선율처럼, 클라이스트의 작품은 독서에 흥미를 잃은 이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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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훈 (편집자)
책을 읽고, 책을 만들고, 좋은 책을 찾아다닙니다.